추석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불황탓에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썰렁하다. 벌써부터 많은 이들은 얄팍한 주머니 사정에 비해 크게 오른 추석물가로 내심 걱정이 많다. 하지만 이런 걱정도 '호사스러운 걱정'이다. 연일 언론의 가난의 벼랑끝에서 떠밀려 사라져가는 안타깝기 짝이 없는 '빈곤자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런 차에 정치권에서 또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소식이 전해왔다. 정대철 민주당대표의 '추석선물 타령'이 그것이다. 정대표는 지난달 31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역대대통령의 예를 들어가며 노무현대통령의 '쪼잔함'을 비판했다.
***정대철 대표의 푸념**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은 봉황문양이 새겨진 인삼과 수삼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봉황문양이 새겨진 인삼을, 노태우 전대통령은 1백만~2백만원을 국회의원회관으로 보내왔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항상 멸치를 보내왔으며 김대중 전대통령은 시시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물은 한국문화인데 노 대통령은 전혀 선물이 없어 자칫 정을 잃어버릴 수 있다. 대통령이 판공비로 그런 선물 돌린다고 욕할 사람은 없다. 나는 그런 추석선물을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노 대통령은 코드가 달라서 그런지 그런 게 전혀 없다.
노 대통령이 명절때 선물을 하지 않는 것은 철두철미한 판단 때문인 것 같은데, 내 정서엔 맞지 않는다. 비서들이 월급 받는다고 입을 씻을 순 없으며 나는 김 한톳씩이라도 보낼 작정이다."
얼마 전 '낭만을 찾아서'라는 명분으로 박희태 당시 한나라당대표,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 등과 함께 룸살롱에서 젊은 여급들을 앉혀놓고 수백만원어치 술을 마셨다가 여론의 지탄을 받고 대국민 사과까지 했던 정대표가 이번에는 '한국문화'를 명분으로 추석선물 푸념을 해 또다시 설화를 자초한 셈이다.
***귀향활동비 놓고 고스톱 치기도**
정대철 대표 시각에서 보면, 노대통령의 행동은 정치권에서 흔히 쓰는 표현인 '미풍양속'에 어긋하는 독불장군식 행동이다. 실제로 과거 정치권 관행을 보면 정대표 푸념도 일부 이해가 간다.
YS가 야당총재시절이던 80년대말에도 그는 명절때마다 부친이 어장에서 보내온 멸치박스를 수천박스씩 선물했었다. 명절 때에는 국회 뒷편에 보란듯이 멸치박스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기도 했었다.
노태우대통령시절에는 명절때 민정당 국회의원들에게 귀향활동비라고 3백만원씩을 돌렸다가 맹성토를 당한 적도 있다. '겨우 이것 갖고 누구 코에다 붙이라는 얘기냐'는 반발이었다. 몇몇 의원들은 아예 "한사람에게 몰아주자"며 의원회관내에서 이를 판돈으로 놓고 고스톱을 쳐 빈축을 사기도 했었다.
이같은 문화속에서 오랜 세월 정치를 해온 정대철 대표 입장에서 본다면, 추석을 앞둔 시점, 그것도 내년 총선을 눈앞에 둔 중차대한(?) 시점에 청와대가 당을 모른 척 하고 있는 대목은 당대표로서 여간 서운하고 체면 깎이는 일이 아니었을 성 싶다. 노대통령에 대한 성토도 이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읽힌다.
***여론의 따가운 역풍에 당황한 청와대**
이같은 정대표 발언에 대해 1일 청와대는 즉각 반응하고 나섰다. 노대통령이 이번 추석에 선물을 보낼 대상과 액수를 공개한 것이다. 역대정권 초유의 '공개'다.
윤태영 대변인은 "청와대 비서실, 경호실, 사회지도층 인사, 여야 국회의원, 민주당 원외지구당위원장, 청와대 출입기자 등 5천여명에게 4만원 안쪽의 영-호남 토산품을 보내겠다"며 "이외의 선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대표 등 정치권에서 은연중 요구하고 있는 '모종의 지원'은 생각말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이 보도된 후 나타난 여론의 반응은 청와대를 적잖이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국민 세금'으로 뭣하는 거냐"는 냉소적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돈이 있으면 차라리 불황의 그늘아래 고통받고 있는 극빈가정이나 소년가장, 독거노인들에게 쓰라"는 게 일반적 지적이었다.
모든 일을 '투명'하게 처리하겠다는 청와대의 선의가 예기치 못한 여론의 따가운 역풍을 맞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제 우리 '피접대층'도 '4류'에서 벗어날 때**
이같은 정치권의 '추석선물 파동'은 말 그대로 해프닝성이 강하다. 하지만 이같은 해프닝을 지켜보는 국민 다수의 시선은 소태 씹은듯 씁쓸하다.
정대표 주장대로 명절때마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우리의 오랜 미풍양속이다. 하지만 우리의 본디 미풍양속은 '뇌물성 선물'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기업의 경우 평소 궂은 일을 해온 수위 아저씨, 청소부 아주머니 등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게 우리의 미풍양속이었다. 가족의 경우 평소 자주 찾아뵙지 못한 어른이나 사정이 넉넉치 못한 친인척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보내는 게 우리의 미풍양속이었다. 지금도 대형할인매장이나 슈퍼마켓 등에는 이런 작은 정성들을 위한 알뜰 선물들이 가득 쌓여 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사회에서 명절때마다 택배차량이나 오토바이로 길거리 교통이 며칠씩 마비되는 사태가 생겨났다. 아파트 수위들의 경우 명절때 어느 집에 얼마나 많은 선물보따리가 들어오는가를 보고 '파워'를 재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가족들까지도 같은 기준으로 가장을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유명백화점에는 한병에 1천만원을 넘는 양주들과 수백만원짜리 명절선물용 식품들이 버젓이 전시되기에 이르렀다.
최근 많은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이 '선물 안주고 안받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하는 한결같은 말이 "선물 안받기는 쉬운데 선물 안주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라는 토로다. 괜히 선물을 안보냈다가 찍히는 '후환'이 두렵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해법은 '하나'다. 우리사회의 이른바 '피접대층'의 '선물 안받기 선언'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대통령의 선언이 우선 먼저 있어야 하고, 여야 지도층의 선언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각 정부부처 및 언론기관의 선언도 필요하다.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깨면 일시적으로 '금단'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금단 현상이 지나간 뒤 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을 생각해보자. 이제 우리 사회의 내로라 하는 '피접대층'도 '4류'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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