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반인권적 범죄의 소멸시효가 지났지만 예외적인 상황임을 들어 그 피해자에게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5부는 14일 유신시절이던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사한 고(故)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하고 '18억4800만 원 배상'의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칙적으로 이 사건에서 원고들의 청구권은 시효기간의 경과로 소멸했지만 이 사건에서는 중앙정보부가 치밀하게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함으로써 의문사진상규명위가 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까지는 원고들로서는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으므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는 소멸시효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예외 사유가 되는 것으로서, 원고들이 '객관적으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경우에 해당해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은 신의칙에 반해 허용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중앙정보부와 같은 거대 국가조직이 서류를 조작하는 등 방법으로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고문 피해자를 오히려 국가에 대한 범죄자로 만든 사건에서 국가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또 최 교수의 사망과 관련, 최 교수의 간첩 행위를 인정할 자료가 없는데도 간첩임을 자백했다는 내용으로 수사서류를 조작해 허위 발표를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최종길은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해 사망했거나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이를 피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사망했거나, 또는 의식불명 상태의 그를 사망한 것으로 오인한 수사관들이 건물 밖으로 던짐으로써 사망한 사실이 인정되고 중앙정보부가 이를 은폐하기 위해 허위 발표를 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문사 사건으로서 30년 동안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던 최종길 교수 사망 사건의 사실관계가 법원 판결에 의해 확정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재판부는 당시 최종길 교수의 조사를 맡았던 중앙정보부 수사관 차철권 씨의 명예훼손 혐의와 관련, 차 씨가 2002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 점을 인정해 유가족에게 2000만 원을 배상하라며 1심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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