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처럼 살았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였는데
요즘은 바보처럼 공부했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있다.
책을 많이 읽지 못하였다는 후회보다 더 큰 후회는
쉽고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었음에도
어렵고 재미없고 비효율적으로 공부했다는 후회다.
책 읽지 않고 공부 게을리 한 것은 내 잘못이지만
공부를 어렵게, 재미없게, 비효율적으로 하는 데는
내 잘못보다 선생님들의 잘못이 더 크다는 생각을 해본다.
남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반성하라 가르쳐왔던 내가
선생님들을 탓하는 것은
한자를 이용하여 개념을 이해시키려 노력하셨던 선생님을
거의 만나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륙'과 '착륙'이 헷갈려 괴로웠던 기억이 있다.
'국경일'과 '공휴일'의 차이를 알지 못하였던 부끄러움도 있다.
3/4과 4/3를 놓고 무엇이 '진분수'이고 무엇이 '가분수'인지
고민하다가 기억력 나쁨을 한탄하면서 연필을 부러뜨렸고,
'to 부정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명사적 용법' '형용사적 용법'을 노트에 받아쓰기 바빴다.
'방정식'과 '항등식'의 개념을 고민하지 않았고
암기한 공식에 맞추어 기계처럼 문제만 풀어재낀 다음에
동그라미나 사선 그어대기에 분주하였다.
공부는 재미없는 작업이었고 성적은 제자리걸음이었으며
꿈은 오그라들었다.
누군가가 '떠날 이(離)' '이별할 이(離)' '땅 륙(陸)' '붙을 착(着)'
이라고만 말해주었어도 괴로움 없었을 것이고,
'나라 국(國)' '경사 경(慶)' '날 일(日)'의 국경일(國慶日),
'여러 공(公)' '쉴 휴(休)' '날 일(日)'의 공휴일(公休日)인 것이라고
귀띔해 주기만 하였어도
공부도 학교생활도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실을
선생이 되고서도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알 수 있게 되었다.
"분수(分數)는 '나눌 분(分)' '숫자 수(數)'로
1보다 작은 숫자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1보다 작으면 진짜 분수이고
1보다 크면 거짓 분수이다.
1보다 작으면 '참 진(眞)'의 진분수이고
1보다 크면 '거짓 가(假)'의 가분수다.”
라고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었더라면 삶도 공부도
재미있었으리라는 생각을 돋보기를 쓸까 말까 고민하는
지금에서야 할 수 있게 됨이 많이 안타깝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유배지에서 그의 자녀들에게
독서법(공부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 바 있다.
"내가 몇 년 전부터 독서에 대하여 자못 깨달았는데,
헛되이 그냥 읽기만 하는 것은 하루에 천 번 백 번을 읽어도
오히려 읽지 않는 것이다. 무릇 독서할 때
도중에 한 글자라도 의미를 모르는 곳을 만나면
모름지기 널리 고찰(考察)하고 세밀하게 연구(硏究)하여
그 근본 뿌리를 깨달아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한 가지 책을 읽더라도 수백 가지 책을 아울러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읽어야 읽은 책의 의리(義理, 뜻과 이치)를
환히 꿰뚫어 알 수 있으니 이 점을 꼭 알아야 한다."
학창 시절의 내 지적 능력이 형편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요즘 학생들의 지적 능력 역시 무척 초라하다.
피상적으로 아는 것은 많지만 정확하게 아는 것은 극히 적고
객관식 문제의 답을 찾아내는 능력은 있지만
그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많이 부족하다.
3, 40년 전 학생들은 공부 양이 적었어도 아는 것 많았지만
지금의 학생들은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함에도
지식도 지혜도 많이 부족하다.
어른들의 잘못이고 선생님들의 잘못이다.
알려주기 이전에 이해시켜야 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한자를 이용하여
개념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도와야 함에도
대부분의 선생님은 개념 설명은 해 주지 않고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된다고 윽박지르고,
개념 이해할 시간도 주지 않으며,
스스로 생각하여 깨달을 시간도 주지 않고,
무조건 배우라 이야기하고 무조건 암기하라 닦달만 한다.
무슨 일에서든 기초가 중요하고 공부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공부에서는 어휘가 기초다.
어휘력이 없으면 문장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글쓴이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며 지식도 지혜도 쌓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요즘 대부분 학생의 어휘 실력은 수준 이하다.
배우기에만 힘쓸 뿐 탐구하기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이고
사전 가까이 하지 않고 한자를 멀리하기 때문이다.
어휘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사전을 가까이 해야 한다.
국어사전은 기본이고 한자사전까지 가까이해야 한다.
더디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어사전을 펼쳐야 하고
이어서 한자사전을 뒤적여서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귀찮다는 이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사전을 찾지 않는다.
의미도 모른 채 암기하고 문맥 통해 대충 이해하고 넘겨버린다.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음에도
정확한 지식 습득할 수 없고 재미 느낄 수 없으며
실력 향상시킬 수 없는 이유다.
아날로그는 아날로그대로의 장점과 역할이 있고
디지털은 디지털대로의 장점과 역할이 있는 것처럼
한글은 한글대로의 우수성과 역할이 있고
한자는 한자대로의 우수성과 역할이 있다.
냉장고와 자동차가 외국으로부터 들어왔지만
이미 우리 것이 되어 우리가 잘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한자 역시 비록 중국으로부터 왔지만 진즉 우리 것이 되어
지극히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으니
우리 글자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인 것 맞지만
100점 아닌 99점 글자임을 인정하고
그 1%의 부족함을 한자가 보충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한글의 부족함을 한자를 통해 보충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분명 아니다.
한자를 활용하지 않은 언어생활, 학문연구, 문화생활은
전기, 컴퓨터, 인터넷을 거부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한자는 누가 뭐라 해도 또 하나의 우리 글자이고,
학문에서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매우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아니 고등학교 때라도
한자를 이용한 개념 중심의 공부를 하였더라면
많은 시간 책상 앞에 앉아있지 않고서도
훨씬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나를 흥분하게 만들기도 하였고 슬프게 만들기도 한다.
암기하려 하지 말고 개념을 철저하게 파헤쳐서
완벽하게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귀찮고 짜증나고 시간이 아깝다 생각될지라도
기본 개념에 대한 철저한 이해, 반드시 해야만 한다.
비결은 이것이다. 이렇게만 공부하면
공부도 재미있는 작업이 될 수 있고 효율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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