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조원에 이르는 카드채 문제가 ‘제2의 대우사태’로 악화될 가능성이 거론되는 등 시장 상황이 불안하다. 일각에서는 전쟁, 북핵, 분식회계 등 악재들이 쏟아지면서 또다시 경제위기가 도래할 조짐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 월가에서는 “한국이 지난 97년같은 금융위기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조속히 제대로 된 채권시장을 구축해야 한다”고 충고해 주목된다.
***블룸버그, "아시아 채권시장 키워야 외환위기 예방 가능"**
블룸버그 통신의 아시아 경제 담당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 주니어는 7일(현지시간) "투자자들이 보다 유동성 풍부한 채권시장을 찾아 아시아를 떠나고 있는 요즘 이같은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지난 97년 아시아 경제 위기 때 국채, 회사채, 자산담보부채권(ABS) 등 해외투자자들이 살만한 자국 통화표시 채권이 있었다면 그처럼 악화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활성화된 채권시장이 없는 한 아시아는 97년같은 자본이탈 현상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페섹은 “아시아 경제는 은행 대출과 단기 외화차입금에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 환율과 채무상환시기의 불일치 등으로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면서 “아시아 전체가 자금을 거래할 수 있는 큰 시장을 형성해야 미국 달러와 유로에 대한 의존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시아 채권시장이 활성화되려면 채무불이행에 대한 보증기관이 필요하다. 채권의 등급을 매기는 신용평가기관도 역시 요구된다. 페섹은 여기에 덧붙여 '환율의 안정성'도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현재 세계3대 주요통화는 달러, 유로, 엔이다. 하지만 아시아의 대표통화인 엔은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떨어지고 있다. 일본이 수출을 떠받치기 위해 엔화 약세를 끊임없이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실성은 부족하나 일각에서는 유로와 엔에 대항하는 아시아 단일통화에 대한 논의도 나오고 있다.
***외환보유고만 많으면 뭐 하나**
아시아 각국들은 아시아 채권시장 조성이 금융안정과 기업자금조달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구체적 노력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 2~4일 서울 신라호텔에서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역내 채권시장발전 국제회의가 열려 아시아채권시장 발전의 장애요인인 환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역내 신용보증기관을 설립, 신용격차를 줄여나가기로 합의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5년전 외환위기 당시 아시아 역내에 총자금량은 많았지만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여러 국가들이 외환위기를 겪었다”며 “여유자금을 역내에서 유통시켜 외환위기도 막고 채권시장도 발전시키자는 차원에서 많은 국가들이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경부에 따르면, 아시아 지역은 1조2천억 달러의 엄청난 외환보유고와 국내총생산(GDP)의 30%가 넘는 저축률을 자랑하지만 언제나 금융위기에 노출돼 있다. 아시아 지역내 자금은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 투자되면서 이들 자금은 다시 해외투자자의 손을 거쳐 아시아의 위험자산에 재투자되고 있어 환율 변동 등 외부요인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다시 빠져나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외환운용 주도권의 결여'에 따른 위기의 연속이다.
***우리나라 채권시장은 아시아의 4%에 불과**
2001년말 기준 아시아채권시장 발행 잔액은 6조8천7백33억달러로 아시아의 채권시장 규모는 전 세계의 24% 수준에 그치고 있다. 게다가 아시아 채권 시장 중 한국은 2천9백27억달러로 4%에 불과하다. 국내 최대 채권발행기관 중 하나인 카드사들의 채권이 갑자기 부실화되듯 국내 채권시장은 해외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5조8천1백69억달러로 아시아 전체의 85%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4천30억달러로 6%에 해당하고 대만은 1천2백43억달러, 말레이시아는 8백28억달러, 싱가포르는 5백22억달러로 집계되고 있다.
한국은 유독 자산유동화증권(ABS)시장에서는 아시아 최대다. IMF사태를 겪은 결과다. 재정경제부에 따르면 한국은 2000년에만 전년도의 10배가 넘는 4백90억5천5백만달러의 ABS를 발행, 일본(2백11억8천4백만달러)을 제치고 아시아지역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96년 이전에는 ABS를 발행하지 않았으나 외환위기 와중에 부실화된 기업을 정리하기 위해 발행을 시작, 97년 7억7천만달러, 98년 19억9천5백만달러, 99년 45억8천1백만달러로 규모를 차츰 늘려갔다.
재경부 관계자는 “ABS 발행 규모가 크다는 것은 부실기업이 많았다는 사실을 나타내주는 동시에 그만큼 많은 부실기업을 정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따라서 시장의 투명성을 세계 수준으로 높이면 한국의 채권시장 발전도 그리 멀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아시아 금융허브도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SK글로벌 파문에서도 볼 수 있듯, 아직 우리 기업이나 회계법인, 감독기구 등의 수준은 채권시장 도약을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 투성이다. 더욱이 금융허브 운운 하기 위해선 뼈를 깎는 심정으로 경기 탓을 하지 말고 투명성 제고노력을 진행해 나가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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