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하이닉스 죽이기’가 현실화됐다. 미국 상무부는 1일(현지시간)하이닉스 반도체에 대해 57.37%라는 초고율 상계관세를 부과하는 예비판정을 내려, 가뜩이나 어려운 처지의 하이닉스를 벼랑끝으로 몰아넣었다. 하이닉스는 앞으로 계속 미국에 수출하려면 매달 미국에 3백억원을 예치해야 할 판이다.
***마이크론 매입협상 깨지자 재차 공세**
미 상무부는 이날 하이닉스의 경쟁사인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러지사(시장점유율 18.2%로 D램 2위업체)가 "채권단의 출자전환 및 부채탕감 등 실질적인 보조금 지원을 통해 제품을 수출한 하이닉스 등 한국 D램업체들이 자국 산업에 피해를 입힌 만큼 그에 해당하는 관세를 매겨야 한다"고 편 주장을 1백% 수용, 상계관세 부과 판정을 내렸다.
본판정은 6월로 예정돼 있지만 유럽연합(EU)도 이달말 하이닉스에 대해 30%대 상계관세를 부과할 것으로 알려져, 전문가들은 미국의 예비판정 결과만으로도 공급 과잉으로 출혈경쟁을 벌여온 D램 반도체 업계의 재편작업이 급물살을 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상계관세(countervailing duty)란 수출국 정부가 지급한 보조금을 상쇄하기 위해 수입국이 수입품에 부과하는 특별관세를 뜻한다. 즉 외국정부의 부당한 보조금에 상응하는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공정무역을 지향한다는 것.
그러나 전문가들은 “현실적으로 상계관세 규정이 당초 취지와는 달리 보호무역의 정책수단으로 남용될 소지가 크다”면서도 이번 판정이 기술력과 자금력을 가진 선진업체에게는 호재로 작용하고 뒤쳐지는 기업에는 악재가 되는 ‘양면의 칼’로 작용할 가능성을 우려해왔다.
미국 정부와 마이크론 테크놀러지사는 한국 정부의 보조금 문제를 이미 2년전부터 제기해 왔다. 미국측은 2001년 3월 무역대표부(USTR)가 발표한 국별무역장벽(NTE)보고서에서도 산업은행의 회사채 인수조치를 문제삼은 바 있다. 그러나 2001년 말 마이크론이 하이닉스 인수협상을 시작하면서 잠시 보류됐다.
하지만 양해각서까지 체결하는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4월말 인수협상이 깨지고 독일 인피니언이 지난해 6월 한국산 D램에 상계관세 부과를 요구하며 유럽연합에 제소하자, 마이크론도 지난해 11월 미 상무부에 제소함으로써 세계 최대 D램 생산국인 한국을 상대로 유럽연합과 미국 업계가 공동보조를 취하는 형국이 됐다.
***외교부, 재경부 전전긍긍**
마이크론은 우리 정부가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은행이 정부 지시나 위임에 따라 하이닉스를 주된 대상으로 15조원 규모의 자금을 지원했고 이 가운데 3조2천5백억원이 정부 보조금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마이크론은 또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과정에서 하이닉스와 관련된 일부 은행에도 공적자금이 투입되면서 해당은행이 사실상 정부 지배 아래 들어갔다고 간주하고 있다. 산업은행 회사채 신속인수제도의 경우에도 특혜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번 조치는 지난해 3월 철강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에 이어 가장 파장이 큰 사안이어서 양국간 통상관계가 더욱 껄끄러워질 전망이다. 유럽연합도 마찬가지로 하이닉스를 지난해 WTO에 제소해놓은 상태여서 이 문제는 향후 우리나라의 최대 통상마찰 요인이 될 게 확실시된다.
외교부는 2일 “이번 예비판정으로 하이닉스는 미국에 D램 제품을 수출할 때마다 잠정관세를 예치하게 돼 자금압박에 시달릴 것으로 예상될 뿐 아니라 마이크론과 인피니언 등 타국 업체들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수출에 큰 차질이 예상된다”며 사태가 심각하다는 인식을 나타냈다. 이에 따라 외교부는 “오는 4월 하순부터 진행될 미 상무부 실사에 업계와 공동으로 적극 대응하는 한편 한.미 양자협의를 통해 우리 입장을 적극 개진해 향후 조사 과정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더 큰 고민을 하는 곳은 재정경제부다. 만에 하나 하이닉스가 잘못될 경우 그 여파가 산업은행은 물론, 외환, 조흥,우리은행 등 공적자금 투입은행으로 전가되면서 금융권이 재차 흔들리고 공적자금 회수에도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무슨 일이 있었어도 마이크론에 팔았어야 했다"며 향후 몰아닥칠 후폭풍을 우려했다.
***반도체시장 질서 재편될듯**
이번 상무부 판정은 향후 반도체시장 역학관계에도 큰 폭풍을 몰고 올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D램 세계시장은 현재 최악의 상황이다. 작년 11월 9달러대에 이르렀던 DDR(더블데이터레이트) D램의 현물가격은 IT경기의 침체지속으로 3달러 중반대에서 머물고 있고 이라크 전쟁, 장기 경기침체 가능성 등으로 소비심리는 더욱 냉각돼 있다.
이때문에 인피니언은 난야와 22억 달러 규모의 생산제휴 협상을 맺었고 NEC와 히다치의 반도체 합작법인인 일본의 엘피다는 미쓰비시의 D램사업부를 인수하면서 대만 파워칩 세미컨덕터와 파운드리 제휴를 맺는 등 살아남기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하이닉스에 대한 미국의 상계관세 판정으로 아시아 현물 시장에 공급과잉 현상이 심화되고 IT경기의 침체가 내년까지 지속된다면 파산이 줄을 이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삼성전자를 비롯한 인피니언, 마이크론, 하이닉스, 난야 등 4,5개 업체를 중심으로 재편작업이 이뤄지면서 D램 시장은 자연스럽게 차세대 시장을 겨냥한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옮겨간다는 시나리오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하이닉스측은 미국의 상계관세 부과에 따른 영향을 최소화하는 조치를 이미 해둔 상태라고 반박하고 있다. 상무부의 결정이 있기 전에 이미 시장 수요를 예측해 64메가 및 128메가 D램 제품을 미국으로 들여와 충분히 재고를 확보한 상태이며, 한국에서 생산한 제품을 미국 고객들의 해외 공장으로 출하함으로써 관세부과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방식으로 미국 고객들에 출하하는 D램 중 약 80%는 상계관세를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나머지는 미국의 유진공장에서 공급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조만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미국에 이어 상계관세 부과를 결정해도 유럽 업체들의 해외 공장에 D램을 공급하는 같은 방식으로 피해 나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과연 하이닉스 계획대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한국의 반도체업체들은 지난해 기준 약60억달러의 반도체칩을 미국에 수출했다. 현재 미국내 반도체칩은 대부분 장기계약을 통해 공급되며 현물시장을 통해 수출되는 칩은 전체의 20% 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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