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무릎관절이 좋지 않아서 겨울이면 운동 삼아 집 뒤의 산을 오르내리느라 바다에 통 가지 못하였는데, 얼핏 달뜨는 것을 가늠해보다 달력을 보니 내일부터 연 사흘 동안이 이번 사리 중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기간이다.
해서 내일은 오랫만에 바다 갯것을 하러 갈 요량으로 TV의 아홉시 뉴스(하루가 멀다하고 쌈박질만 하는 정치꾼들 욕은 하면서도)만 좀 들여다보고 자리에 누웠는데 평소 버릇이 아니어서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내일이 여덟물이니 늦어도 여덟 시까지는 바다에 가야 하리라. 그럴려면 아침은 일곱 시에 먹고 일곱 시 반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갯것을 많이 해 올 수 있을까? 개 건너 아홉 구미로 갈까 영너머로 갈까? 아니면 살구미로 갈까? 새만금으로 가면 요즈음엔 굴이 서고 샘이가 많이 돋았다는데 새만금을 갈까….'
생전 처음 가는 갯것인 양 여기저기 이것저것 생각해 보는데 샘이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갑자기 쿡! 하고 웃음이 나왔다. 이러니 가뜩이나 보고 싶은 TV도 못 보게 하고 자란다고 툴툴대던 아이들이 그냥 말 리가 있나. 세째놈이 대뜸 "아빠, 뭣 먹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 아니, 샘이."
이번에는 안식구가 웬 뜬금없는 말인구? 하는 듯 옆에 누운 채로 "뭔 샘이를 먹어?" 어둠 속에서 고개를 돌렸다.
"아아니 그냥, 나 혼자 꿈속에서…. 얼른 잠 들이나 자." 나도 몰래 튀어나온 말에 얼렁뚱땅 사태를 수습했지만 속으론 뭣 먹느냐는 셋째놈 말이 우스워서 영영 잠을 놓치고 말았다.
금년 겨울에도 변산의 풍물패 '천둥소리'는 예년처럼 설을 앞두고 스무 날 동안을 이 지역 분들을 모아서 풍물굿 강습을 했다. 그러니까 올해로 여섯번째 하는 겨울 정기강습인데, 폐교된 초등학교 하나를 지역의 몇몇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임대해서 중고등 과정의 대안학교인 변산공동체 학교와 탁아소를 꾸리며 교실 한 칸은 아예 풍물 전용교실을 만들어서 강습과 공연 연습을 하는 것이다.
눈 퐁퐁 오는 한 겨울이 되면 한 삼십 명씩 모여서 조개탄 난로 벌겋게 피워놓고 북 장구 두드리며 하루에 막걸리 한두 말씩 비워내는 재미로 놀기 좋아하고 굿 좋아하는 이 지역의 사람들은 천둥소리의 풍물강습회가 열리기를 고대한다.
그러니 사실 강습회가 열려도 공부는 뒷전이요 노는 데는 선수들이 모이는 셈인데 이중에는 스스로 오후반이라고 말하며 오전 시간은 으례이 빼먹고 오후에 느직하니 나타나는 오병윤이라는 삼수생이 있어 자칭 별명이 '얼큰이'다.
얼큰이는 술을 많이 먹어서 얼큰이인데, 금년부터 얼큰이가 된 게 아니고 아조 십 수 년 전부터 얼큰이가 되어 면 소재지의 또래 얼큰이들을 모아서 얼큰당을 만들고 믿거나 말거나 그 얼큰당의 2대 당수라고 하는 사람이다.
이 삼수생 얼큰당수가 한번 판을 잡으면 입심이 하도 좋아서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데, 하루는 일회용 도시락 두개에 귀하기 짝이 없는 샘이 자반을 싸 와서 턱하니 술안주를 풀어놨다.
바닷가에 살아도 샘이 모르는 강습생들이 있는지라 그 사람들은 가늘고 짧고 까맣고 꼬실꼬실해서 꼭 사람의 특정부위에 나는 그것과 같은 샘이 자반을 보고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라 선뜻 집어먹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데, 이 얼큰당수가 샘이 한 저붐을 집어서 들고는 왈,
"내가 이것을 모아서 요리해다 맛보게 할려고 부안 매산고개(옛날 청량리 오팔팔같은 곳이다) 색시방에 가서 한달 동안이나 아침마다 쓰레비질을 한 사람이여."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는 사람들은 늘 자기보고 술 먹고 얼큰할 때 봐도 얼큰당, 술 안먹고 쌩쌩한 아침에 봐도 얼큰당이라 부른다며 당명을 이제는 주유천하당으로 고치겠노라고 큰소리를 쳤다. 이러니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포복절도하고 그 광경을 떠올리던 내가 잠자리에서도 웃을 수밖에.
샘이는 본디 이름이 불등 풀가사리이며 겨울과 이른 봄의 바위에 붙어 자라는 바늘지럭시만씩한 주황색의 1년생 해초다. 예전에도 다른 해초에 비해 적고 귀했지만 오염에 약해서 지금은 특히 더 귀하다.
지럭시가 짧고 가늘고 미끄러우니 샘이를 뜯으려면 그릇에 아궁이 불땐 재를 퍼 담아가지고 가야 하는데 바닷가 바위에 가서 이곳저곳 샘이 있는 곳을 어렵게 찾으면 거기에 재를 뿌리든지 손에 묻혀서 뜯어야 미끄럽지 않게 뜯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손 시리게 뜯은 샘이는 그래서 더욱 맛있다. 가히 해초 중의 최고급이라 할 수 있다. 뜯은 샘이를 집에 가져오면 다시 손질하여 꾸적을 골라내고 물에 여러번 씼어 행궈 깨끗한 자리를 펴 볕에 하루를 말리는데 샘이는 마르면 더욱 머리카락처럼 가늘어지고 꼬실꼬실해져서 한 바구니 뜯어말려도 뭉치면 크게 서너줌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촌의 대사에는 샘이 자반이 빠져서는 격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특히 딸아들 여우는 큰일을 치를 아주머니들은 그 귀한 샘이를 여러날을 두고 뜯어다 말려서 암지나 쓸 만큼 될 때까지 모으는 것이다. 마른 샘이를 불달은 후라이팬에 참기름 소금 조청만으로 볶아내는 게 자반이다. 이 자반을 한 저붐 입에 넣고 먹어보면 바삭하고 달고 짭조름하고 고소해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술안주로 최상이다.
샘이 국 또한 일품이다. 뜯어온 샘이를 손질해서 햇볕에 말리지 않고 생으로 국을 끓이면 사골 고은 것처럼 뽀오얗게 물이 우러나오며 약간 걸쭉해지고 부드러운데 여기에 뒤영조개(살조개)나 굴, 고동 삶아 깐 것을 넣고 끓여 파 마늘 양념에 진간장 간을 맞추면 전날 술 먹고 쓰린 속에 다른 건 다 안들어 가도 이것만은 들어가서 속을 어루만진다.
샘이는 초봄이 언뜻 지나면 알이 배여서 통통해지고 이내 뿌리가 뽑혀서 사그러졌다가 다시 어름 빠각빠각 어는 겨울이나 돼야 그 반가운 낯 꼴을 볼 수 있다.
혹 샘이 이야기에 질린 분이 있다면 지총과 꼬시래기 이야기를 해서 위안을 드려야겠다. 지총은 '지충이'라고도 하는데 겨울 가고 꽃샘바람도 스러들 쯤 해야 새순이 자라는, 갈색의 털이 많고 통통한 연년생 해초다. 샘이처럼 물이 빠지는 바위에 붙어서 자라지만 샘이와는 달리 바위웅덩이 물 고여 있는 곳에서 더 잘 자란다.
어디를 가도 흔한 이 지총은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위를 건강하게 하고 소화를 돕는 좋은 약재다. 지난해 자랐다가 줄거리만 앙상한 뻣신 아비순 옆에서 새로 돋은 통통하고 짧은 어린 지총을 뜯어오면 가장 많이 해 먹는 요리 방법은 된장에 덖는 방법이다.
깨끗이 씻은 지총을 펄펄 끓는 물에 데치면 이게 아주 새파래지는데, 건져서 두어 번 찬물에 행궜다가 꾹 짜서 된장 으깨어 삼삼하게 끓이는 냄비에 넣고 덖으면서 파 마늘 양념해서는 수북하게 한 대접 상에 내는 것이다. 된장만으로 간을 맞춘 삼삼한 것이라 밥 한 숫갈에 지총 한 숫갈씩 썩썩 비벼먹어도 좋고 덖은 냄비에 밥 한 그릇 부어서 휘휘 비벼먹어도 맛이 있다.
지총은 특유한 향긋한 맛과 부드러우면서도 깔깔한 입안의 감촉이 특징인데, 지총하고 밥을 먹으면 지총의 새맛에 과반 하기 마련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어느덧 푸욱 배가 꺼져서 속이 그지없이 편안하고 명랑하다. 그래서 속병으로 오래 고생하는 사람들은 지총을 씻어 말려서 무쇠솥에 볶은 다음 가루를 장만하여 두고 식후에 한 숟갈씩 장복을 했던 것이다.
이런 약은 부작용이 있을 수도 없고 먹기가 거역스러울 수도 없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장만할 수 있는 훌륭한 건위 소화제를 천지에 널려두고도 그 자체로 독인 비싼 병원 약만 찾는다.
지총은 또 깨끗이 손질하여 이맘때 들에서 캔 달래와 함께 김치를 담아 익혀 새콤하게 먹든지 삼삼하니 잘 익은 젖 항아리에 같은 때 나는 파래와 함께 장아찌를 박아놓으면 여름 덥고 땀 흘릴 때 짭짤한 밑반찬으로 먹을 수 있어 좋다. 여기에 조금 더 얌전을 낸다면 고춧가루, 통깨, 참기름을 치고 버무려 먹는다.
봄 바다의 해초 중엔 지총과 더불어 꼬시래기를 뺄 수 없다. 바위 물 웅덩이 속에 한 모둠씩 머리카락처럼 너울거리는 꼬시래기는 특히 민물이 흘러드는 쪽 바위에 많이 붙어 있는데, 한 봄에서 초여름까지 조금 쇠어도 먹을 수 있는 귀한 것이다.
꼬시래기는 꾸적(이 특히 많이 붙으므로 뜯을 때 조심해야 한다)을 떼어내고 손질해서 잘 씻어야 몸에 붙은 물 때가 빠진다. 그런 다음 끓는 물에 데치면 역시 파래지는데, 이때 꺼내서 찬 물에 행궜다가 건져 물기를 뺀 다음 파 마늘 고춧가루 양념에 설탕 고추장 식초 넣고 진간장으로 간을 맞춰 무쳐먹는다.
그렇지 않으면 데친 꼬시래기를 왜간장에 와사비 풀고 마늘다짐과 고춧가루 식초 설탕을 넣고 만든 양념장에 찍어먹으면 된다.
꼬시래기는 꼬실꼬실하대서 꼬시래기인데 씹으면 싸그락거리는 느낌과 부드럽게 찔깃거리는 맛이 꼭 냉면을 떠 올리게 한다. 꼬시래기를 뜯을 때마다 한번 꼬시래기 냉면을 말아보려니 하면서도 나는 아직 그것을 못하였다.
새만금으로 막히는 서해의 변산 바다에 갯것이 어디 이것뿐이랴. 바위에 돋는 나물 몇 가지만으로도 이렇듯 풍성하고 오롯한 이곳 사람들의 누백 년 삶이 깃들어 있는데, 이제 이곳이 막히면 이 소박하고 질긴 우리의 삶은 또 어디에 기대야 하는지ㅡ 해가 바뀌어도 걍팍해지기만 하는 이곳의 현실에, 생각하면 눈물이 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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