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당국의 규제 움직임이 회계법인을 넘어서 이번에는 신용평가기관으로 향하고 있다.
엔론, 월드컴 등 거대기업들이 분식회계로 파산하기까지 이를 방관한 죄는 비단 회계법인뿐이 아니라는 게 미 금융당국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분식회계사태에는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이라는 스탠더드 & 푸어스(S&P), 무디스, 피치 등의 잘못도 크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울리지 않은 경보기'**
영국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지는 최신호(11.28)에서 “신용평가기관들이 엔론, 월드컴 등의 파산 위기를 간파하지 못한 원인을 SEC가 조사하고 있다”면서 “이들 신용평가기관들은 앞으로 더 강력한 규제를 받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지난 11월 15~21일 워싱턴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SEC는 “세계3대 신용평가기관들이 고유의 업무를 수행하기에 너무 비대해진 것이 아니냐”며 S&P, 무디스, 피치 등을 공개적으로 성토했다.
이론적으로 채권에 대한 신용평가 비용은 투자자들이 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채권 발행기관이 신용평가기관에게 평가비용을 제공한다. 바로 여기에서 신용평가기관이 부실화될 요인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3대 신용평가기관은 1934년 SEC의 결정에 따라 준금융규제기관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예를 들어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MMF(기업어음 등에 투자하는 초단기금융상품)나 정부 보증이 없는 저축상품 등은 3대 신용평가 중 적어도 1곳으로부터 최상위등급을 받아야 거래가 가능하다. 평가를 받는 기업들이 신용평가기관의 위세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게 돼 있는 것이다.
신용평가기관들이 기업들 위에 군림하는 반면 방대한 업무를 따라가지 못해 시기적절한 신용등급을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 엔론의 채권을 갖고 있다가 엄청난 손해를 본 투자자들은 “신용평가기관의 기업평가가 너무 느리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97년 아시아 외환.금융위기 때에도 무디스 등은 '울리지 않은 경보기'라는 비판을 받았었다.
***"요즘은 이곳저곳 불지르는 방화범"**
반대로 요즘은 이들 평가기관들이 ‘느리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너무나 빨리 신용등급을 강등하고 있다면서 항의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알카텔, 비방디 유니버설 등 최근 신용평가기관으로부터 강등당한 프랑스 기업들은 “부당한 신용등급 강등으로 회사의 위기가 증폭됐다”면서 “이들 신용평가기관들은 이곳저곳에 불지르기 좋아하는 방화범, 또는 사형집행자 같이 행동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게다가 신용평가기관들은 점점 신용등급을 평가하는 해당기업에게 컨설팅을 제공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회계법인이 감사업무를 맡은 기업에 대해 컨설팅을 해주는 이해상충이 신용평가기관에서도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SEC는 과거 두 번에 걸쳐 신용평가기관 개혁방안을 강구했다. 그러나 과도한 시장규제가 될까 우려해 실행에 옮기는 것을 주저해 왔으나 이번에는 다를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엔론과 월드컴 사태 이후 ‘규제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미국 상원도 보다 강력한 규제로 기울고 있다”면서 “금융시장에 불고 있는 작금의 규제강화 바람에 따라 신용평가기관들이 지금까지 누려오던 자유를 일부 잃게 될 것은 거의 틀림없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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