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간선거 역사상 집권당이 상하 양원을 모두 장악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미국 유권자들이 늘 절묘한 ‘견제와 균형’ 감각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집권당에게 행정, 입법이라는 양날의 칼을 모두 쥐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민주주의의 나라’를 자처해온 미국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지난 5일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는 상.하원 모두에서 공화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전통의 '종언'이다.
***역대 사상최악의 '돈 선거'**
이번 공화당 승리는 60%의 인기도를 유지하고 있는 조시 W.부시 대통령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게 정치분석가들의 일반적 분석이다. 그러나 패배를 한 민주당이나 미국 전체를 바라보는 일부 학자들은 이번 선거가 ‘미국 민주주의의 변질’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들춰보이고 있다.
선거자금에 대한 제한없이 누가 많은 선거자금을 썼느냐로 승패가 갈리는 '금권정치형 선거제도' 때문에 공화당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투표제도 역시 사전에 유권자 등록을 해야 하는 등 돈과 시간을 가진 기득권층이 아닌 서민층에게 불리하게 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때문에 ‘투표로 연결되지 않는 민심’의 비중이 커지면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합법적 독재’로 변질돼 가고 있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선거전문가들은 민주당 표밭인 중하층 유권자들이 투표를 포기하는 대신, 공화당 표밭인 부유층과 유력한 이익단체들의 투표성향이 이들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더욱이 전국총기협회(NRA)나 미국은퇴자협회(AARP)와 같이 막강한 로비력을 갖춘 단체들이 공화당지지 유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투표를 독려해 승패를 좌우할 정도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부시는 현역대통령이라는 정치적 프리미엄을 최대한 활용해 체니 부통령과 함께 둘이서 중간선거 사상 최고액인 1억8천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모으는 실력을 발휘했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양당이 모금한 정치자금만 4억1천6백만달러로 선거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공화당은 2억8천9백만달러, 민주당은 1억2천7백만달러를 모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선거에 투입된 자금은 모금액보다 더 많다. 연방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양당 후보들은 모두 6억1천7백만달러 이상을 선거비용으로 지출했다. 이 또한 지난 98년 중간선거 때보다 무려 50% 정도 늘어난 사상 최대 규모다.
***상대방 비방 TV유세에 무한정 돈 투입**
이처럼 선거자금이 많은 들어가는 이유는 뚜렷한 선거 쟁점이 없는 가운데 후보들이 상대후보 흠집내기를 가장 유력한 유세전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각 후보들은 TV 유세를 통해 상대방을 비방하느라 막대한 돈을 들였다.
돈 있는 기업가 출신, 자금동원력이 월등한 현역 의원이 각종 유세매체를 싹쓸이하는 불공정 게임이 미국 민주주의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최대의 격전지로 꼽힌 노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지난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밥 돌 전(前) 상원의원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돌(66) 후보는 엄청나게 뿌려진 선거자금 덕을 톡톡히 본 것으로 알려졌다.
상대인 민주당의 어스킨 볼스후보가 클린턴 행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강적이었기 때문에 부시 진영은 노스캐롤라이나주에만 2천만달러 이상의 선거자금을 쏟아부었다.
차기 재선을 노리는 부시 대통령이 자신의 동생인 젭 부시가 주지사 재선에 나선 플로리다주에 1천3백만달러를 투입한 사실과 비교해 보면, 노스캐롤라이나에 공화당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그 결과 돌 후보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없는이에게 불리한 미국의 선거제도**
이번 중간선거의 투표율도 역대 선거와 비슷한 35%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유권자 실종’ 현상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는 토머스 패터슨 하버드대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투표를 시민의 의무라고 종용하면서도 실상은 투표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상한 나라다.
패터슨 교수는 최근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티터지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인 가운데 87%는 선거일 2주 이상을 앞두고 미리 투표를 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유권자 등록’을 거쳐야 하는 주에 살고 있다"면서 "선거 당일 유권자 등록이 허용되는 주는 불과 6개뿐”이라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유권자 등록을 하지 못한 유권자는 선거 당일 투표를 하고 싶어도 못한다.
또한 선거일에도 근무를 해야 하는 관행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플로로다주 같은 곳에서는 투표마감시간도 저녁 7시로 정했다. 저녁 8시 이후로 마감시간을 잡은 다른 주들에 비해 이런 주의 투표율은 몇 %포인트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언론의 무관심과 지엽말단적 보도도 한 원인**
미국의 언론들도 해가 갈수록 선거 보도에 지면을 덜 할애하고 있다. 패터슨 교수는 “도대체 미국의 뉴스 미디어들은 어디에 있느냐”면서 “미국 언론들은 재미있는 정보와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져 중간선거 보도에 시간을 낼 여력을 찾기 힘들다”고 개탄한다.
그는 “98년 중간선거의 경우 94년 중간선거보다 절반 이하로 선거보도가 줄었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더욱 떨어졌다”면서 “10개 주의 선거관련보도를 비교해보니 98년에 비해 13%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나마 기사화되는 선거보도도 후보들의 지엽말단적인 사항들에 대해서 집중되고 있다. 후보들이 국가 현안을 문제삼는 운동을 벌이면 무시하거나 따분한 것으로 매도되고 그 대신 후보들간의 인신공격적인 공방이 주로 방송된다.
패터슨 교수는 “2000년 대선에서 선거일을 앞두고 부시 후보가 70년대에 음주운전으로 걸렸던 사건이 어째서 선거기간 내내 고어 후보가 펼친 외교정책보다 더 많이 보도가 됐느냐”고 반문한다.
패터슨 교수가 이끌고 있는 하버드대 ‘유권자 실종현상 연구’팀이 10만명의 미국인을 면담한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들이 선거에 흥미를 잃고 있는 이유가 몇 가지 드러났다.
응답자 81%는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당선되기 위해서는 어떤 말도 서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답했으며 75%는 “후보들은 국가 현안 해결보다는 서로 싸우는데 더 열중한다”고 응답했다. 이런 인식들로 인해 선거에 대한 미국 유권자의 무관심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 미국은 '정치 퇴행중'이다.
과연 이것은 미국만의 현상인가. 대선을 눈앞에 두고 선거공영제 확대같은 건설적 대안을 백지화시키고 있는 우리나라 정치권도 스스로를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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