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권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무명의 신예들이 잇달아 승리를 거둬 이목을 끌고 있다. 기성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임계치를 넘어선 결과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슬로바키아에선 30일(현지시간)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진보정당 '진보적 슬로바키아' 소속 주사나 카푸토바 후보가 이날 치러진 대선에서 58.4%를 득표해 41.6% 득표에 그친 연립 여당 사회민주당의 거물 마로스 세프쇼비치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진보적 슬로바키아'는 의석이 없는 원외 정당이다. 카푸토바 역시 정치 경험이 없는 신인이다. 그는 14년간 수도 브라티슬라바 인근의 고향 마을 페지노크에서 불법 폐기물 매립문제와 싸운 환경운동가다. 2016년 환경 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드먼 환경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다. 슬로바키아 대선은 부패한 여당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자 선거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대선은 지난해 2월 탐사보도 전문기자인 잔 쿠치악 피살 사건 이후 드러난 정경유착 사건이 지배했다. 쿠치악은 슬로바키아 정치인들과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의 유착 관계를 취재하고 기사를 준비하던 중 집에서 연인과 함께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마피아와 연루된 의혹을 받는 인사 중에는 로베르토 피초 전 총리의 측근들도 포함돼 있었다. 분노한 국민들의 시위가 이어져 피초 전 총리는 총리직을 결국 사퇴했다.
이후 검찰이 지난해 9월 체포한 용의자들은 기업인으로부터 뒷돈을 받고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또 검찰 2인자가 이 기업인과 수백 건의 문자를 주고받은 정황이 드러나 사퇴하기도 했다.
대중들의 분노에 카푸토바는 "악에 맞서야 한다"며 기성 정치권에 도전해 호응을 얻었다. 그는 쿠치악 피살 사건이 있기 전까지 공직 출마 의사가 없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었다.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고 있는 슬로바키아에서는 총리가 평상시 국정을 담당하지만 대통령이 내각 구성 승인권, 헌법재판관 임명권, 법률 거부권 등으로 견제 권한을 갖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 배우 대통령 당선 눈앞
같은 날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선에서도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출구조사에서 30.4%를 얻어 페트로 포로셴코 현 대통령(17.8%)과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14.2%)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50% 이상 득표자가 없어 1, 2위 득표자가 21일 결선투표를 치르게 된다.
배우 겸 코미디언 출신으로 정치 경험이 전무한 젤렌스키가 일거에 유력 대선 후보가 된 데에는 기성 정치에 대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심판 정서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영국 <가디언>은 젤렌스키가 "국가의 변화를 열망하며 교착상태에 빠진 국가개혁과 침체된 경제에 실망한 젊은 유권자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젤렌스키는 지난 2015년 방영된 TV 정치풍자 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주인공 대통령 역을 맡아 국민 배우로 부상했다. 평범한 역사 교사가 정부의 비리에 염증을 느끼고 정직한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과정을 그린 이 드라마는 정부와 정치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통해 큰 인기를 끌었다.
현 포로셴코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도 이번 대선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제과회사 성공을 바탕으로 자동차, 조선, 미디어 사업으로 억만장자에 오른 인물이다. 포로셴코는 지난 2014년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실각한 후 치러진 대선에서 러시아에 병합된 크림반도를 되찾겠다고 공언했지만, 현재까지도 국민들의 반러 감정에 부응하지는 못했다.
국방위원회 부의장인 글라드코브스키의 아들이 러시아에서 밀수한 부품을 우크라이나 방산 업체에 매우 비싼 가격에 판매한 혐의로 고발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정부의 부패도 여전했다.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및 나토 가입을 지지하는 친서방주의자로, 포로셴코와 노선이 비슷하다. 그러나 사회 각 분야에 뿌리내린 부패와 국민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이 맞물려 결선투표에서도 승리가 유력하게 점쳐진다.
집권세력과 기성 정치에 대한 염증이 젤렌스키를 일약 유력 대선후보로 만든 동력이지만,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과 5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경험이 전혀 없는 그가 군 최고사령관과 국가안보회의 수장을 맡을 수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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