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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를 감싸면서 임진왜란과 동학농민혁명의 격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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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주를 감싸면서 임진왜란과 동학농민혁명의 격전지였다

2019년 4월 고을학교는 <완주고을>

*강의 마감됐습니다^^

봄이 만개한 4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66강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를 둘러싸고 있어 전주를 외호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 동학농민혁명의 격전지였던 완주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아름다운 위봉사에도 봄이 활짝 피었다.Ⓒ완주군

고을학교 제66강은 2019년 4월 2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6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전주IC-삼례읍(비비정/동학농민봉기기념탑)-용진읍(봉서사)-소양면(송광사/위봉사/위봉산성)-점심식사 겸 뒤풀이-대아호-고산면(삼기정/고산향교/백현서원)-경천면(화암사)-경천호-익산IC-서울의 순입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완주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66강 답사지인 <완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임진왜란과 동학농민혁명의 격전지
완주는 전북의 중앙에 위치하여 전주시를 둘러싸고 있으며, 동쪽은 진안군, 서쪽은 김제시, 남쪽은 임실군과 정읍시, 북쪽은 익산시와 충남의 논산시, 금산군에 각각 인접하고 있습니다.

완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로 555년(위덕왕 2) 완산주가 설치되었으나 565년 폐지되였습니다.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무너진 뒤 신라에 병합되어 685년(신문왕 5) 다시 완산주가 설치되었으며. 이때부터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757년(경덕왕 16) 전주로 바뀌었고, 완산정이 설치되어 군사상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892년(진성여왕 6) 견훤이 완산에 후백제를 건국하였으며 936년(고려 태조 19) 후백제의 멸망 때까지 45년간 후백제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936년(태조 19) 전주가 안남도호부로 바뀌었다가 940(태조 23) 다시 전주로 복구되었습니다. 993년 완산을 승화로 고치고 절도안무사를 두었으며 995년 전국을 10도 12주로 나눌 때 강남도에 속한 순의군이라 칭하였습니다. 1005년(목종 8) 전주 절도사가 파견되었고, 1018년(현종 9) 지방제도 개편 때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1022년 다시 전주목으로 개칭되었습니다. 1355년(공민왕 4) 전라도 안령사였던 정지상이 원의 사신인 야사불화를 감금시킨 사건 때문에 부고로 강등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완산부로 승격되었습니다.

조선시대는 1392년(태조 1) 이곳이 태조의 고향으로 중시되어 완산유수부로 승격되었으며, 1403년(태종 3) 전주부로 개칭되어 조선말까지 변동이 없었으나 그 영역은 고려시대보다 축소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고산군이 통합되어 전주군이 설치되었으며, 1935년에 전주읍이 전주부로 승격됨에 따라 전주군이 완주군으로 개칭되어 15개 면을 관할하였습니다.

▲빛나는 풍광을 자랑하는 대아호Ⓒ완주군

웅치(곰치재)와 이치(배티제) 전적지
완주에는 임진왜란과 동학농민혁명의 격전지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웅치(熊峙 곰치재)와 이치(梨峙 배티제) 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맞서 싸워 전주성을 지키고 호남 곡창지대를 왜군의 수탈로부터 막아내는 전과를 거둔 역사적 장소로 현재 전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당시 왜군은 주력부대를 둘로 나눠 장수, 진안을 지나 웅치를 넘어 전주성으로 진격하고자 했으나 상당한 전력의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가 다시 금산을 통해 이치를 넘어 전주로 진격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호남을 지키기 위해 관군과 의병 1만 2천여 명이 결사항전으로 맞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호남을 보전하고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결정적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치대첩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기리는 유적이 ‘금산 이치대첩지’와 ‘완주 이치전적지’로 나뉘어 있습니다. 완주 이치전적지는 이치 정상에 ‘이치전적지’라 새긴 비석이 있고, 그 안쪽으로 ‘무민공(武愍公) 황진장군 이현(梨峴)대첩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2016년 전적지에 400명의 무명 의병을 기리는 ‘임란순국무명사백의병비’가 세워졌는데 비를 세운 취지가 “관군의 주력부대가 승리를 거둔 7월 전투는 세상에 자세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의병이 주도한 8월 전투는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채 묻혀지고 있다. 그것이 아쉬워 이 비를 세워 바로 알리고자 한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치전적지와 이치대첩지는 행정구역뿐 아니라 기리는 주체도 다른데 전적지는 황진의 기념물과 400명의 무명의병이 중심이라면 대첩지는 철저하게 권율 중심입니다.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와 최후 항전지
또한 완주에는 봉건정부의 수탈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반봉건과 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발발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와 최후 항전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는 항일투쟁의 성격을 띠는 역사적 사건으로, 완주군 삼례읍은 전봉준 장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자 북상하기 위한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은 곳입니다. 특히 2차 봉기 당시 수많은 농민군이 삼례에 재집결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삼례읍에는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과 기념탑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운주면에는 농민군 최후 항전지라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완주군 대둔산 전적지가 있는데 이곳은 동학 농민군이 우금치 전투 이후 거의 궤멸된 상황 속에서도 대둔산의 험한 산세를 활용해 일본군에 끝까지 항전했던 곳으로, 지금도 돌담 등 당시 흔적이 잘 남아 있습니다.

▲위난에 처했을 때 전주에 있는 경기전의 위패를 모셔오기 위해 쌓았다는 위봉산성Ⓒ완주군

고중리산성의 쑥고개
완주 일대에는 산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고성산성은 고성산(374m) 정상에 쌓은 테뫼식 산성입니다. 성곽의 둘레는 546m, 높이는 5m로 동북이 둥글고 서남이 뽀족한 타원형인데 둘레546m이고 높이는 5m 내외입니다. 산성의 중앙에는 정상 부분의 약간 높은 고지가 있으며 서쪽, 북쪽, 북동쪽, 동남쪽에 네 개의 성채(城砦)가 남아 있으나 누각이나 성문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성내에는 우물터도 없으며 약간의 기와 조각들만 남아 있습니다.

고중리산성은 <고적조사자료>에 “농성이라 한다. 석축으로 둘레 150칸, 높이 6척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중리산성이 있는 곳에 현재 쑥고개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숯고개’라는 발음을 강하게 하여 나타난 명칭으로 보입니다. 숯고개를 한자로 옮기면 '탄현(炭峴)‘이 되는데 이는 백제시대에 좌평 성충(成忠), 흥수(興首) 등이 신라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백제의 요충지입니다.

이러한 명칭은 대동여지도에서도 나타나는데 백제 탄현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교통로의 연결망과 산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탄현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삼국사기>에 501년(백제 동성왕 23) 7월 “탄현에 성책을 설치하여 신라를 방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숯고개는 신라와 국경에 이르는 3개 노선이 합쳐지는 곳이므로 이곳에 산성이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벽은 거의 무너졌지만 원형은 남아있고 성 둘레는 약 350m로 큰 규모는 아니나 배재, 싸리재 등을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이 좋은 곳입니다. 성 안에는 건물터가 남아있고 백제시대 토기편 등이 흩어져 있고 성벽은 타원형으로 성벽 전체가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면서 부분적으로 붕괴되어있습니다.

길마재산성은 완주 지역의 여러 성과 연락하는 요지로서 방어의 관문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용계산성과는 직선거리 8㎞에 불과하고 정북에 만수산성, 북서쪽에 고성산성, 서쪽에 이전산성, 남쪽에 산성동산성이 넘어다 보이는 중추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동쪽 벽은 깎아 세워진 암벽으로 전혀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고, 성벽은 자연석으로 축성되어 있는데 남단과 북단의 석축이 남아 있을 뿐 서쪽 석축은 거의 황폐한 상태입니다.

용계산성은 <동국여지승람>에 “용계성은 용계천 위에 있는 데 서쪽 10리 지점에는 숯고개가 있고 서북쪽으로는 연산현 경계와 30리 떨어져 있다. 이 옛 성은 석축으로 둘레는 1014척이요, 높이는 10척인데 지금은 반쯤 무너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문헌비고>에도 “고산 용계산성은 용계천 위에 있는 데 석축으로 둘레가 1014척이지만 지금은 반쯤 무너져 있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백제가 둔치고 지키던 곳이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 안에는 건물지와 삼국시대의 토기편, 기와편이 흩어져 있습니다. 지금은 험난한 골짜기에 불과하지만 백제시대에는 이 길을 통하여 육십령 고개를 거처 신라 땅에 이르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위봉산성은 1675년(숙종 원년)에 쌓은 것으로, 둘레가 약 16km에 이르며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과 조경묘에 있던 태조의 영정과 그의 조상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피난시키기 위해 이 성을 쌓았습니다. 실제 동학농민봉기로 전주가 함락되었을 때 영정과 나무패를 이곳으로 가져 왔다고 합니다. 성안에는 영정과 위패를 모실 소형 궁전을 두었으나 오래 전에 헐려 없어졌습니다. 성의 동, 서, 북쪽에 각각 문을 냈는데, 지금은 전주로 통하는 서쪽에 반월형 문 하나만이 남아있습니다. 성안에는 행궁을 지키는 승군들이 거처하는 위봉사가 있습니다.

완주의 읍치구역에는 고산향교만이 남아 있습니다.

고산향교는 1397년(태조 7)에 건립을 하였으나 1399년(정종 2)에 원인 모를 화재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음해에 다시 세웠으나 1592년(선조 2) 임진왜란 때 왜구들의 손에 불타 없어졌습니다. 현재 있는 대성전은 1601년(선조 34)에, 명륜당은 1604년에 차례로 중건되었습니다.

즐비한 서원과 영당들
완주에는 선현들을 배향하고 교육을 시켰던 서원과 영당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구호서원은 1730년(영조 6)에 처음 세워졌으며 친원파에 대항하다가 죽음을 당한 박상충과 조선 개국원종공신 이성중, ’왕자의 난‘에서 큰 공을 세운 박은, 송유저, 박소, 임사수 등 5명의 위패를 모셨으나 1777년(정조 1)에 모두 없앴다가 1798년 다시 모시게 되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리고, 그 자리에 비석을 세워 백산단이라 하였습니다. 1904년(광무 8)에는 이름을 구호단이라 하고 박종설, 임치우, 유기섭 등 세 사람을 더 모셨고 1970년 사당을 세우고 이름을 구호서원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반곡서원은 이 지방에 살고 있던 담양 국씨들이 자기들의 선조들의 절의와 효행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1871년(고종 8)에 세워 1995년에 중건하였습니다. 현재 국유를 중심으로 국함, 국침, 국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들 삼형제가 쓴 문집인 <환성집> <송만집> <죽계집> 각각 1권을 비롯하여 <고산읍지> 등 36권의 책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백현서원은 1866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03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1941년 임윤성의 위패는 후손들이 천곡사로 옮겼고 현재는 정묘호란 때에 호남과 영남을 끼고 청군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구영의 위패만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정안당은 1682년(숙종 8)에 구영의 형 구휘에 의하여 고산향교 남쪽에다 세웠던 것인데, 1688년(숙종 14)에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1840년(헌종 6)에 보수하였고, 1866년에 헐리었던 것을 1922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천곡서원은 사당은 1941년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 구영과 함께 임윤성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임윤성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율곡을 만나 학문상 의심나는 곳을 문답하였고 <중용> 중 율곡의 견해를 책머리에 적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용학문답>이라는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임윤성의 후손들이 유림들의 동의를 얻어 사당을 짓고 위패를 백현사에서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보광서원은 1720년(숙종 46) 처음 세워졌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1869년 헐려 없어졌다가 1971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당에는 이언필, 육대춘, 이지성, 이지도, 양몽설, 김준업, 유정, 이후태 등 다섯 성(性)의 인물을 모시고 있는데, 이중 이언핍은 1454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내려와 후학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그의 둘째아들 이지도 흥학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용진서원은 1680년(숙종 6)에 창건되었으며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2년 원구억 마을 입구에 복원하였습니다. 황희, 황수신, 김맹, 이익, 강이온, 박금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외문과 내문을 지나면 사당이 있고 한쪽에 열녀각이 있으나 비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청하서원은 처음 어떻게 여기에 세워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렸던 것을 1968년에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홍삼문과 외문인 진덕문을 지나 ‘청하서원’이라는 현판이 붙은 강당이 나오고 강당 뒤로 내삼문이 좌우로 있는데, 왼쪽의 내삼문 뒤에는 ‘청하사’라는 사당과 재각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군량미 조달로 공을 세우고 정묘호란 때에 청나라와 화의를 반대하였던 김장생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화산서원은 1624년(인조 2)에 본래는 전주시 중화산동에 창건하여 1662년(현종3년)에 사액되고 왕명으로 송시열이 찬하고 송준길이 쓴 묘정비를 세웠습니다. 그 뒤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었다가 1988년에 옥천 경암공파 자손들의 협조로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사우만 이전, 중건하였고 묘정비는 그 자리에 남겨 두었습니다.

삼현사는 류몽인, 류숙, 류중교를 모셨는데 원래는 삼현영당이라 하였고 창건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이 고장에 살고 있는 고흥 류씨 문중에 의해 1958년에 하나의 가묘와 같이 세워진 사당입니다. 류몽인은 조선중기의 설화문학의 대표적인 사람이었으며, 류숙은 1597년 정시문과에 병과에 급제하여 검열의 벼슬에 임명된 후 부제학의 벼슬에 이르러 영주군에 봉하여졌고 그 뒤 대사간. 형조참판 등의 벼슬을 역임한 인물이었습니다. 류중교는 평생을 학문에 정진한 인물로 나이 21세에 스승 이항로의 명을 받아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수정하였고, 두 번이나 벼슬에 임명받았으나 사양하고 성리학에만 주력하였습니다.

▲장비와 악비 등 중국 명장의 이름을 따와 지었다는 비비정Ⓒ완주군

아름다운 정자 비비정·삼기정·남계정
완주에는 아름다운 정자도 남아 있습니다.

비비정(飛飛亭)은 1573년(선조 6) 무인 최영길이 별장으로 지은 것인데 중간에 철거된 것을 1752년(영조 28) 관찰사 서명구가 중건하여 관정으로 삼았으나 오랜 세월에 관리가 부실해지면서 소실되자 최영길의 9대손 최광용이 을유년에 감영에 품계를 했지만 중건을 보지 못했다가 1998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비정기>에는 최씨 집안을 찬양하기 위하여 ‘장비’나 ‘악비’등 중국 명장의 이름을 붙여 비비정이라고 했을 뿐 지명을 취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비비정은 삼천, 추천, 전주천이 합수되어 다시 소양천과 고산천에 합수되어 만경강이 시작 되는 한내 언덕에 있는 정자인데, 한내는 ‘큰 내’라는 뜻으로 이곳은 호남으로 통하는 관로의 요충지이며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한 마지막 길목이었고,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한 월천이기도 합니다.

삼기정(三奇亭)은 1439년(세종 21)에 고산현감 최득지가 창건하여 하연에게 기문을 받아 정자에 걸었습니다. 오랜 세월 퇴락과 중수를 거듭해 오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편액은 강암 송성용이 썼습니다. 정자 앞에는 행주 기우만이 1912년에 쓴 비명을 새겨 1964년에 세운 하연의 <삼기정기문>이 있습니다. 창건자 최득지는 본관은 전주, 호는 율헌이며 1413년(태종 13) 장흥교수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1439년(세종 21) 고산 현감이 되었습니다. 정자의 이름은 이곳의 냇물, 돌, 소나무의 어울리는 풍광이 기특하다는 뜻입니다.

남계정(南溪亭)은 남계 김진이 학문과 교육에 뜻을 두고 낙향하여 지은 정자입니다. 나이 20세에 후진을 양성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렀습니다. 지금도 의병장 고경명, 조헌, 부제학 심음시 등 당시의 유림들이 남계의 학문과 덕망을 찬양한 현판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건물은 1580년(선조 13)에 신축하여 1673년(현종 14)에 중수하고 1859년(현종 10)에 중건하였다고 합니다.

▲국보로 지정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하앙식 구조의 화암사 극락전Ⓒ완주군

국보와 보물 간직한 유서 깊은 사찰들
완주에는 국보와 보물이 즐비한 유서 깊은 사찰이 많습니다.

화암사는 불명산 깊숙이 위치하며 694년에 창건되어 원효와 의상이 수도하였고 신라의 설총이 학문을 익힌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화루와 극락전이 남북으로, 불명당과 적묵당이 동서로 마주 바라보고 서 있는 입구(口)자형의 가람배치로, 극락전 왼쪽에는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철영제가 있고 적묵당 뒷편에는 산신각, 우화루 옆에 명부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옛 모습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화암사는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로 이용하여 조화를 이루도록 한 건축양식이 선인들의 슬기를 새삼 느끼게 하는 곳입니다.

극락전(국보 제316호)은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하앙식 건물로 1981년 수리할 때 묵서명이 발견되어 1605년(선조 38)에 건립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하앙식 공포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유구이므로 목조건축구조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우화루(보물 제662호)는 극락전의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각 형식인데 정면만을 누각 형식으로 하고 후면은 단층 건물인 반누각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611년(광해군 3)에 세워진 것으로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었으나 크게 변형되지는 않았습니다.

중창비는 1411년(세종 23)에 비문을 짓고 1572년(선조 5)에 건립하였습니다. 앞, 뒷면이 모두 해서체로 된 894자가 쓰여 있는데 상당부분 글씨가 마멸되어 완전해독이 불가능합니다. 비문에는 신라시대 원효, 의상대사가 이 절에 머물면서 수도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괘불도>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문수와 보현보살을 협시로 권속들을 구성한 비로자나괘불도로서 채색에 있어서도 근대기 불화에 수용된 서양화법을 적극 수용하여 입체감 있는 표현뿐 아니라 수채화기법에 가까운 설채법 등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수용된 근대적 불화기법을 잘 보여주는 예이자, 전통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를 함께 적용한 작품으로 불교 회화적 가치가 큽니다.

▲보물이 많이 전해오는, 유서 깊은 사찰 송광사Ⓒ완주군

신라시대 도의선사가 창건한 완주 송광사
완주 송광사는 867년(경문왕 7)에 도의선사가 처음으로 세웠으며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1622년(광해군 14)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등이 지었다고 합니다. 이후로도 1636년(인조 14)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큰 절로 번창하였습니다.

대웅전(보물 제1243호)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기록에 따르면 1636년(인조 14)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1857년(철종 8)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석가여래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대웅전 벽면에는 1857년 중건 당시 그렸던 <벽지불탱화>와 <십오불탱화>가 남아 있습니다.

소조 사천왕상(보물 제1255호)은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소조석가여래 삼불좌상(보물 제1274호)은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모시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본존불에서는 삼불의 <조성기>와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습니다. <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이 반영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상과 함께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점이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종루(보물 제1244호)는 세조 때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1857년(철종 8)에 다시 세웠습니다. 건물 평면이 십자모양인데, 일반적으로 십자형 건물은 흔치 않으며 더욱이 종루로서는 이것이 국내에서 유일합니다. 건물의 꾸밈 또한 평범치 않아, 특히 처마 장식이 비길 데 없이 화려합니다.

나한전에는 목조의 석가여래좌상 좌, 우로 16나한과 오백나한, 인왕상 2구, 동자상 2구, 사자상 2구가 모셔져 있습니다. 나한전은 1656년(효종 7)에 벽암각성대사가 송광사를 중창할 때 건립한 것이며 1934년 해광스님이 중수하였습니다.

명부전에는 높이 1.6m의 거대한 지장보살상을 명부전의 주존불로 봉안하고 좌측에 보세존자를 모셨으며 그 좌, 우에 십왕상과 그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지장보살상에서 복장유물로 원통형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오색사리 6(녹색1, 흑색1, 백색2, 황색1, 진황색1)과 함께 묵기가 발견되어 이 불상의 조성연대가 1640년(인조 18)임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조 삼패전은 대웅전 불단 위에 삼존불을 모셔놓고 그 사이 양쪽에 각기 1위씩의 목패를 배치하고 있는데 ‘주상전하수만세’ ‘왕비전하수제년’ ‘세자저하수천추’라 새겨져 있습니다.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목패 뒷면에 묵기가 있어 목패가 인조 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다른 2위의 목패 뒷면에 있는 묵기를 통해 1792년(정조 16)에 3위의 목패를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적비는 1636년(인조 14)에 송광사 개창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비문은 신익성이 짓고 글씨는 의창군 이광이 썼으며 귀부와 이수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앞면에는 비명과 고려의 보조국사가 전주의 종남산을 지나다가 절터를 잡아 놓고 제자들에게 절을 지을 것을 당부하셨다는 내용과 보조국사로부터 벽암대사에 이른 계보가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종남산인 명공의 말을 인용하여 절을 짓게 된 경위 및 벽암의 제자와 시주한 사람, 그리고 개창 당시 기술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벽암당 부도는 병자호란 때 최고의 승병대장이었던 벽암 각성 큰스님을 추모하여 1660년에 세운 것입니다. 벽암스님은 당대 최고의 승려로서 나라에서는 그를 대공덕화주로 삼아 50일간 화엄법회를 열고 송광사를 다시 세우게 하였습니다. 그 후 벽암 스님은 송광사의 주지를 역임하고, 1660년 이곳에서 열반하였습니다.

위봉사 극락전의 <만불탱화>
위봉사는 고려 말 나옹이 중건하고 세조 때는 선석, 석잠 두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조선 말엽 포련대사에 의한 60여 칸의 건물 중수를 거쳐 1912년에는 전국 31본산중의 하나로 전북 일원의 50여 말사를 관할하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히 퇴락했습니다.

폐사 직전인 1988년 현재의 주지 법중 스님이 부임, 바로 도량정비를 시작하여 퇴락한 보광명전과 관음전을 관과 협조하여 보수하고 여러 시주의 동참으로 100여 칸의 건물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근 주변에는 산내 암자인 태조암과 숙종 원년에 축조한 위봉산성과 행궁 터 그리고 위봉폭포가 있습니다.

극락전의 <만불탱화>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9,500분의 아미타불화입니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도상(圖像)을 보여주는 탱화로서, 부처님의 표정은 물론이고, 두발과 의상까지 다채롭게 묘사되어 가까이 뵐수록 친근하면서도 경외로움에 절로 합장하고 귀의하게 됩니다. 전하는 말로는 19세기 말경, 위봉사 산내 암자인 태조암에서 여섯 분의 스님들이 탱화를 조성하였는데 그 쪽 산마루가 온통 탱화에서 방광하는 빛으로 싸여 마을 사람들은 산불이 난 줄로 착각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8폭의 탱화만이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광명전(보물 제608호)은 다포계 양식으로 건축된 팔작집으로 굵직한 재목들을 사용하여 집이 웅장하게 보이며 귀솟음도 뚜렷합니다. 귀공포의 간결한 처리수법과 보의 다듬은 기법 등으로 보아 17세기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단 위에는 석가모니불과 좌우보살을 안치하였고 불상 위에는 낙양각과 운룡으로 장식된 화려한 닫집을 달랐습니다. 별화를 그린 주악비천상이나 후불벽 뒷면에 그린 백의관음보살상 등은 색조가 차분하고 아늑한 금단청과 더불어 고식 채화의 우수함을 보여줍니다.

요사는 팔작지붕의 앞 뒤 건물 가운데를 맞배지붕으로 연결시켜 배치평면이 Ⅰ형을 이룬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는데, 건물의 용도도 서로 달라 앞면은 관음전이고 뒷면은 요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봉사에는 묘법연화경판, 동국여지승람목각판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동국대학교박물관과 국립전주박물관에 30여 쪽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진묵대사와 해인사 <대장경>에 얽힌 설화
봉서사는 727년(성덕왕 26)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이, 조선 선조 때에는 진묵대사가 중창하고 이곳에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였던 유서 깊은 사찰로, 진묵대사와 해인사 <대장경>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수도하던 진묵은 자주 해인사를 내왕하면서 <대장경>을 모두 암송하였다 하며 하루는 제자를 데리고 급히 해인사로 갔는데, 그날 밤 대장각 옆에서 불이 나 도저히 끌 수 없게 되었답니다. 이때 진묵대사가 솔잎에 물을 적셔 불길이 번지는 곳에 몇 번 뿌리자 갑자기 폭우가 내려 불길이 잡힘으로써 대장경판의 위기를 모면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진묵대사가 지팡이로 바위를 뚫어 발견했다는 약수터도 있습니다.

진묵대사는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났는데, 이 화포리란 곳은 옛날의 불거촌으로 부처가 살았던 마을이란 뜻입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7세에 출가하여 주로 완주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봉서사에서 선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불경을 강구하면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법통을 이은 종통이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그의 신비스러운 기행 이적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 4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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