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본, 독일 등 세계 주요증시는 물론 국내 증시가 '공황적 폭락'에 빠져들자 원인 분석이 한창이다. 지배적 결론은 '디플레이션의 세계화'. 미국기업의 자존심이라 불려온 포드 자동차가 최근 파산 위기에 몰리는 등 다국적 대기업들의 실적이 악화되고 있는 배경은 다름아닌 디플레이션이라는 것이다.
디플레이션은 일반적으로 수요가 부족하거나 공급이 넘쳐 물가가 하락할 때 발생한다. 하지만 최근의 물가하락은 공급가격 자체가 낮아지면서 초래되는 측면이 강하다.
이에 최근 서방언론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중국발 황화론(黃禍論)'이다. 과거 몽골의 칭기즈칸이 유럽대륙을 침략해 공포에 떨게했듯, 이번에는 중국이 경제적으로 서구를 초토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콩의 경제전문주간지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FEER) 최신호(10.17자)는 '가격파괴자'(Price Chopper)라는 커버스토리 특집기사에서 "중국이 전세계 디플레이션을 촉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10일 "미국이나 유럽 또는 일본 기업들은 저가 중국상품과 경쟁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 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공장폐쇄와 감원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의 출현으로 미.일 기업들 줄줄이 '좀비기업'으로 전락**
중국이 지난해말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중국의 수출은 더욱 빠르게 늘고 있다. 중국내 관세 및 투자 등과 관련된 각종 규제가 WTO 가입으로 완화되면서 더욱 많은 외국기업들이 중국에 투자를 하고 있으며, 여기서 생산한 제품들은 다시 해외로 수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통찰력 있는 분석으로 정평 있는 푸르덴셜 증권 수석 투자전략가 에드워드 야데니는 "최근 미국 증시의 향후 전망은 경제여건의 불확실성이 워낙 큰 탓에 '장기 침체' 에서부터 '완만한 회복' '조만간 급반등' 까지 폭 넓은 스펙트럼을 구성하고 있다"면서 다양한 시나리오를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끄는 시나리오가 '전세계적 디플레이션' 시나리오다.
야데니는 "인류의 역사를 전쟁과 평화의 시대로 대별한다면 전자는 인플레이션, 후자는 디플레이션을 각각 의미했다"며 "평화의 시기에는 국내, 국제적으로 경쟁압력이 높아진 결과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는데 냉전의 종식으로 시작된 평화가 디플레이션 1차 빅뱅을 초래했다면, 12억 인구의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함으로써 디플레이션 2차 빅뱅이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디플레이션은 이런 경쟁구조에 잉태된 거시경제적 문제로, 그 결과 '좀비(걸어다니는 시체) 기업'이 양산된다. 10년 불황에 허덕이는 일본에는 요즘 좀비기업이 즐비하다. 얼마 전 부시 미국 대통령이 자국 철강산업 보호를 위해 고율 관세를 부과했듯이, 미국에서는 특히 철강 산업에 좀비기업들이 즐비하다다는 게 야데니의 주장이다.
요컨대 중국의 출현으로 일본, 미국 등 세계주요 기업들이 줄줄이 '좀비 기업'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 "경쟁자를 무덤으로 보내버리다"**
FEER지는 생산기지로서의 중국의 위력을 "경쟁자를 무덤으로 보내버린다(Burying Competitoin)"라고 표현했다.
다국적 기업들은 처음에 중국을 '거대한 내수시장'으로 보고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중국은 '세계의 생산기지'일뿐 내수시장으로서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1980년대초 일찌감치 중국에 진출한 다국적 전자메이커 필립스가 좋은 예다. TV 등 온갖 가전제품을 거대한 중국 시장에 팔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필립스는 아예 중국 현지에 공장을 세워 값싸면서도 질 좋은 제품들을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오늘날 필립스는 중국에 23개 공장에서 매년 50억 달러상당의 제품을 만들고 있지만 그중 3분의 2는 해외로 수출되고 있다. 아직 중국의 내수시장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 등 주요시장에는 중국산 제품들이 물밀 듯 들어오고 있다. 미국 시장의 경우 일본제품보다 중국제품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으며, 지난 6월 대미 중국산 전자제품 수출고만 전달보다 12.3% 증가한 12억 달러에 달했다. 특히 컴퓨터와 DVD 등 중국의 첨단 전자제품 수출은 어느 수출품목보다 증가세가 두드러져, 작년동기 대비 올해 7월까지 무려 47%나 수출이 증가했다.
이처럼 중국산 제품이 밀려들면서 미국에서 팔리는 TV세트 가격은 1998년 이후 매년 평균 9%씩 하락하고 있다.또한 일본에서는 중국 가전업체 하이얼그룹이 만드는 소형냉장고와 세탁기는 일본모델보다 20~30% 저렴한 가격으로 날개돋힌 듯 팔리고 있다.
중국은 전자제품만이 아니라 농산물 수출로도 수입국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한 예로 가뜩이나 디플레이션에 시달리는 일본의 경우 값비싼 송이버섯 시장에 값이 10분의 1에 불과한 중국산 송이버섯이 쏟아져 들어와 무차별적으로 '가격 파괴'를 하고 있다. 그 결과 도쿄 대형 할인매장에서 팔리는 송이버섯의 3분의 2가 중국산이다.
하지만 중국 역시 디플레이션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7년간 중국의 평균물가는 20% 가량 하락했다. 10년전 중국에서 21인치 컬러 TV는 4백 달러가 넘었는데 지금은 80달러에 불과하며 계속 값이 떨어지는 추세다.
***다국적기업, 신상품 개발후 생산은 중국에서**
FEER는 "전세계 상품가격과 다국적기업 전략에 미치는 중국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WTO 가입 이후 중국의 기업들은 무서운 속도로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외국기업들을 위협하고 있다. 스위스 ABB나 독일 지멘스가 같은 다국적 기업들은 중국기업들이 저렴한 전기제품들을 만들어내자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다.
수입관세가 대폭 낮아지면서 외국으로부터의 생산시설 도입 비용이 절감된 것도 이같은 중국제품의 가격파괴 공세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중국민간기업들의 수출고가 올해 상반기에 50%나 급증한 것도 중간재 비용이 줄어들어 최종생산품 가격이 크게 낮아진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과거 중국산제품이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선진국 소비자들이 외면해 왔다고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중국제품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값싸면서도 질좋은 제품"으로 바뀌면서 중국상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고 있다.
이같은 인식전환의 핵은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다국적기업이다.
이미 다국적기업들은 신상품이 개발되면 일단 그 제품을 중국내 생산기지에서 만들어 세계에 수출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중국을 생산기지로 삼고 있는 다국적기업으로는 제너럴일렉트릭, 필립스, 도시바, 지멘스, 삼성전자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들 다국적기업들이 중국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에 달한다.
전세계 상품가격이 하락하고 있는 것이 중국 때문만은 물론 아니다.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나 유럽연합(EU) 등 국경을 없애는 경제통합이 이뤄지면서 상품의 국제이동이 쉬워진 것도 적지 않은 요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동인은 세계화의 가장 큰 혜택을 입고 있는 중국이라는 게 지배적 인식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세계화를 설파해온 미국이 세계화의 최대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세계화 부메랑론'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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