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이 요즘 반성을 많이 하고 있다. "외환위기에 처한 국가에 수백억달러의 자금을 빌려주는 대가로 무리하게 해당국가의 경제구조를 뜯어고치려 든다"는 비판을 수용한 것이다.
예컨대 지난 26일 1979년 이후 처음으로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대가로 해당국가에 권고하는 경제 및 사회 정책에 대한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그런 대표적 예에 속한다.
97년 한국 외환위기 당시 IMF가 남미에서나 쓸 수 있는 초(超)고금리 처방을 무리하게 적용하는 바람에 위기가 악화했다는 제프리 삭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로버트 웨이드 등 경제학자들의 비판이 옳았음을 인정한 셈이다.
***IMF의 신선한 변신 시도**
IMF는 2000년 5월 호르스트 쾰러 현 총재가 취임한 직후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모색해 왔으며 그 결과 구제금융을 받는 회원국이 자신들의 정책에 대해 1차적 책임을 져야 하며 개혁 프로그램도 해당 국가가 초안을 잡아야 한다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하나의 처방이 모든 나라에 적용될 수 있다(One-fits-all)"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지원 대상 국가의 여건에 맞는 '맞춤형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IMF는 또한 "경제 및 사회 정책 권고는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고 밝혀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 관련 요구도 종전보다 줄일 것으로 보인다.
이번 IMF 연차총회에서는 중남미 경제위기 대처 방안의 하나로 '국가 파산보호제' 도입 문제도 비중있게 다뤄질 예정이다. 이 제도는 미국식 기업파산 보호처럼 채무불이행(디폴트) 위험에 빠진 나라에 대해 한시적으로 채무상환을 유예해 주자는 것이다.
***미국은 IMF 변신에 못마땅**
하지만 국제금융계 일각에서는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미국이 주요 문제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배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IMF의 변신은 희망사항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영국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도 최신호(10.4)에서 "IMF의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미국은 IMF와 견해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면서 IMF의 변신에 최대 걸림돌은 미국이라고 지적했다.
IMF와 세계은행 연차총회를 겨냥한 반(反)세계화 시위대 수백명이 27일(현지시간) 총회장인 세계은행 주변 워싱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해 6백49명이 체포된 사건이 상징하듯 그동안 IMF와 세계은행은 '미국 월가의 하수인'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IMF 자체는 변화하려는데 미국이 방해하고 있다는 주장이 거세지면서 비난의 화살이 미국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앤 크루거 IMF 수석부총재가 국가파산보호제를 처음 제의했을 때 미국은 "국가파산보호제보다는 외채위기국의 채권단이 채무상환 조정을 하도록 허용하는 게 보다 현실적인 방법"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브라질마저 통화 가치가 폭락하는 등 중남미 전역에서 도미노 현상이 나타나자, 국가파산보호제 도입을 지지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IMF도 "국가파산보호제는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부채를 안고 있을 경우에만 국한될 것"이라며 미국을 설득했다. 이에 따라 미국도 IMF측 제의와 미국의 방안을 함께 모색해보자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면서 국가파산보호제를 지지하는 회원국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
***미국의 이중잣대가 제일 큰 문제**
더 큰 문제는 구제금융 대상 선정을 둘러싸고 미국이 보여주는 이중적 행동이다. IMF는 브라질만 하더라도 유동성 위기로 보기 때문에 구제금융 대상이며 이같은 구제금융 대상들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더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부시 행정부는 구제금융 기금규모 자체를 줄이길 원하고 있다. 폴 오닐 미 재무장관은 최근 "어느 나라가 금융위기에 빠질 경우 우리에게는 원치 않는 두 가지 선택만 놓여 있다. 회수 보장이 없는 자금지원을 하거나 디폴트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라고 구제금융에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다.
아르헨티나에 대한 구제금융을 거부해 아르헨티나가 디폴트에 빠지도록 방치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터키가 금융위기에 빠지자 미국은 막대한 구제금융을 제공하겠다며 나섰다. 대 테러리즘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구제금융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미국 금융기관들의 이해관계가 긴밀한 우루과이와 브라질에 대해서도 구제금융이 결정됐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일개 회사와는 달리 국가는 지급불능 상태인지 금융경색 상태인지 판정하기가 어렵다"면서 "IMF 정책주체들의 분열상이 가뜩이나 매우 위험한 시기를 맞고 있는 세계경제를 한층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97년 외환.금융위기에 직면하자 IMF구제금융 대가로 제일은행 및 공기업의 해외매각을 전제조건으로 내걸어 미국 금융 및 산업자본들에게 거대한 부를 선사한 바 있다. 미국은 아직도 남의 위기를 틈탄 장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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