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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犯언론' 요미우리의 계속되는 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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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犯언론' 요미우리의 계속되는 망언

신문사 뿌리 자체가 극우 기회주의집단, 몰락 자초

매일 발행부수 1천4백만부의 일본 최대 신문사 요미우리(讀賣) 신문이 광복절인 15일 또다시 일제의 침략을 미화, 정당화하는 사설을 실어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요컨대 일제의 침략은 구미제국의 침략을 받은 아시아를 구하기 위한 '아시아 해방전쟁'이었으며, 종군위안부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주장이다.

요미우리의 이같은 망언은 해마다 반복되는 것으로, 요미우리 신문 자체가 태평양전쟁 당시 앞장서 전쟁을 선동한 '전범언론'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새로울 게 없다. 패전 당시 요미우리 사주는 대표적 전범으로서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으나, 재빨리 맥아더 편에서 서서 반공(反共)을 선창함으로써 도리어 사세를 확장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기회주의적 언론이기도 하다.

일본이 오늘날 국제사회의 미아로 취급받는 데에는 이처럼 자신의 역사를 깨끗이 청산하지 못한 업보라는 게 국제사회의 지배적 평가다. 아울러 이는 일제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해 지금까지 각분야에서 질곡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언론의 또다른 자화상이기도 하다.

***"역사를 다시 바로잡고 싶다"**

요미우리는 2차세계대전 패전 57주년을 맞은 15일 '역사를 올바르게 다시 바로잡고 싶다'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제2차 대전 당시 동아시아에는 중국과 태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식민지 밖에 없었다"며 "일본은 아시아 제국을 침략한 게 아니며, 대전은 이들 '구미제국의 영토'를 침공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극우들이 주창해온 '아시아 해방론'의 동어반복이다.

요미우리는 또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전시 근로에 동원된 여자정신대를 '위안부 사냥'을 위한 제도처럼 캠페인하고 있는 일부 신문의 역사날조는 자학사관의 극치"라고 비난했다. 과거 침략행위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을 주장하고 있는 경쟁지 아사히(朝日)신문을 겨냥한 발언이다.

요미우리는 "독일의 경우에도 전쟁 당시 점령지에서 장병의 위안시설용으로 국가적, 강제적 '여성사냥'을 했다"며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의 포악성이 '거대 악(惡)'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불문에 부쳐졌고, 독일 지도자와 국민은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의 표정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청산을 철저히 했다고 평가받는 독일도 군위안부 문제는 덮고 있는데 왜 일본만 이 문제에 대한 책임추궁을 당해야 하는 식의 논리다.

이어 요미우리는 "종전일인 1945년 8월15일 당시 일-소 중립조약을 깬 소련이 일본 북방영토로 침공을 계속하고 있었다"며 "이런 소련이 극동국제군사재판정(도쿄재판)의 검사석,판사석에 서서 일본을 재판한 것은 모순된 구도"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말해, "일본 극우여 총궐기하라"는 격문에 다름아니다.

***요미우리, "종군위안부라는 것 자체가 존재한 적 없다"**

요미우리의 이같은 사설은 상습적이다. 지난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논란이 한창일 때도 요미우리는 일본 극우를 대표해 전선의 맨 앞에 나섰다.

요미우리는 지난해 3월2일자와 5월9일 두차례 사설을 통해 "종군위안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3월2일자 사설에서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를 주장한 아사히 신문 등에 대해 "역사를 날조하면서까지 일본을 악의 화신으로 깎아내리려는 '자학사관'"이라고 몰아붙였고, 5월9일자에서는 도리어 "공장 등에 동원됐던 '여자정신대'를 종군위안부로 잘못 기술하고 있는 한국의 교과서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미우리는 또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동원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강변했다.

이같은 요미우리 사설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는 반론문 게재를 요구했으나, 요미우리는 언론의 기본상식조차 지키지 않고 이 요구도 거부했다. 이에 대해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일본 정부가 최소한 두 차례나 인정한 역사적 사실을 뒤엎으려는 것이라고 공개리에 반박하기도 했다.

첫째, 93년 8월 일본 관방장관 담화. 일본 정부는 91년 12월부터 1년 8개월 동안 군위안부, 구 일본군, 조선총독부 관계자, 위안소 경영자 등을 조사했으며 한국에 조사단도 보냈다. 그 결과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은 담화 형식으로 발표했다. 담화 중에는 "위안부 모집은 주로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담당했는데 이 때에도 감언과 강압 등 본인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다수 있었으며 관헌이 직접 가담한 사례도 있음이 명백해졌다"는 내용이 있다.

둘째는 96년 8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당시 총리가 군위안부 출신에게 보낸 '사과와 반성의 편지'다. 이 편지는 비록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을 손상한 것을 반성하고 있다.

또한 95년 7월 일본에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 발족된 것도 군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민간차원에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반론에도 불구하고 요미우리는 마이동풍이었다.

***"신사참배는 당연한 일. 외국대통령들도 참배시켜야"**

요미우리는 이뿐 아니라 일본 각료들의 신사참배도 일관되게 옹호,지지해 왔다.

지난해 8월13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가 기습적으로 전범들을 모셔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당연히 아시아 각국의 비난여론이 들끓고 아사히 신문 등 일본내 반론도 거셌다.

하지만 요미우리만은 달랐다. 요미우리는 참배 다음날인 8월14일자 사설에서 "참배를 앞당긴 것은 적절한 정치적 판단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15일에 앞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15일에 꼭 참배하겠다고 표명해온 총리지만 13일에 앞당겨 참배한 것은 한중 양국의 반발이나 구미의 비판적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현명한 정치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15일의 참배를 강행했을 경우 한중 양국과의 관계악화로 부진한 일본경제에 악영향이 전망됐었다"고 격찬했다.

요미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앟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지도자가 추도하는 것은 어떤 국가도 행하고 있는 당연한 일이므로, 내외사람들이 더 나아가 외국 원수도 참배할 수 있는 국립추도시설을 만드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원수들에게도 신사참배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요미우리는 뿌리 자체가 극우 기회주의집단**

요미우리의 이같은 극우적 노선은 요미우리의 뿌리 자체가 극우이기 때문이다. 요미우리는 일본제국주의 시절만 해도 발행부수에서 아사히나 마이니치에게 크게 밀리던 3류신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창업자 자체가 경찰 간부 출신의 극우파 인물인 데다가, 극우논조를 펴야만 사세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 누구보다도 극우적 논조의 기사와 사설을 양산해왔다.

2차대전에서 미국에게 패하자 철저하게 전쟁의 나팔수 노릇을 했던 일본 신문계는 종전 뒤 대부분의 사장이 책임을 지고 퇴진했다. 56개 전국신문사 사장 중 44명이 퇴진했다. 그 가운데는 아사히, 마이니치 등 유력 신문도 포함되었다.

아사히의 경우 종전 후 두달이 지난 45년 10월 '스스로를 벌하면서'라는 사설로 "우리는 결코 과거의 실수를 애매하게 끝낼 생각은 없다"고 전쟁책임을 분명히 할 것을 다짐했다. 그에 따라 일선기자들의 주장대로 전쟁책임을 물어 사장 이하 전 중역이 퇴진했다. 그것도 모자란다는 주장에 따라 11월에는 다시 사고(社告)로 "전쟁 중 진실 보도, 엄정한 비판을 하지 못한 죄과를 천하에 사과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요미우리는 달랐다. 유력 신문 중에서는 사주의 1인 지배체제였던 요미우리는 '사내민주화'를 통해 과거를 반성하겠다는 교묘한 논법을 내세워 사주가 퇴진을 하지 않았다. 아사히처럼 과거사를 공식사과하지도 않았다.

요미우리가 이처럼 전범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요미우리가 재빨리 점령군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빌붙었기에 가능했다. 요미우리는 맥아더가 반공전선을 구축하려 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읽고 사시를 반공으로 정한 뒤 맥아더에게 적극 협조했다.

한 예로 요미우리는 맥아더에게 접근, "반공전선을 구축하기 위해선 일본인의 사기를 되살릴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미국스포츠인 프로야구를 광범위하게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해 맥아더의 승인을 얻어내기도 했다. 이렇게 해 오늘날 일본프로야구가 탄생할 수 있었고, 그 선봉을 요미우리의 자이언츠 구단이 맡게 됐다.

요미우리가 오늘날 일본 최대발행부수 신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카멜레온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요미우리는 앞으로도 극우적 목소리를 계속낼 게 분명하다. 일본 극우만이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착오적 극우가 정치권등 리딩그룹을 지배하면서 일본이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면에서 국제사회의 미아로 전락한 데에서도 읽을 수 있듯, 요미우리의 운명도 이미 정해진 게 아니냐는 게 일본언론계의 중론이다.

시대의 변화에 뒤처져 극우, 반공을 외치는 집단의 말로는 어느 나라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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