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100년된 그날…‘3·1 만세운동길’에 태극기는 없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100년된 그날…‘3·1 만세운동길’에 태극기는 없다

33인 묵비 모신 광주 만세운동 발상지 기념공원도 찾는 이 없어..

태극기 부대가 태극기를 모욕한 탓일까?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글들이 매스미디어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거리에서 태극기를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3·1운동에 관련된 기념비적인 공간에서도 태극기는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100년 전 그날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독립 운동가들이 핏줄 선 양손에 들었다는 그 태극기를.


▲광주 양림동 '3.1 만새운동길'. 100주년을 맞은 3.1절이지만 적막하고 태극기도 눈에 띄지 않는다ⓒ프레시안

광주의 3·1 만세운동 발상지는 양림동이다. 1903년 4월에 미국인 선교사 유진벨 (Dr. Eugene Bell, 한국 이름 배유지)가 세운, 광주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수피아 여학교가 3월 10일 광주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3월 1일 불씨를 지핀 서울 만세운동의 불길이 전국에 번진 5일 후인 3월 6일, 광주 양림동 남궁혁 장로 집에 수피아 여학교 교사 박애순을 비롯하여 광주 애국청년들과 기독교인들이 모여 광주의 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거사 일은 광주천변에 장이 서는 3월 10일 오후 두 시로 정했다. 3월 10일 오후 두 시, 수피아 여학교, 숭일학교 학생들은 양림교회 언덕길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행진을 시작했다. 행렬은 광주천을 따라 밀물처럼 장터로 모여들었다.

장총과 일본도로 무장하고 말을 탄 일본군 기마 헌병대가 이들 앞을 막아섰다. 당시 시위를 이끌던 수피아 여학교 2학년 윤형숙(1900~1950)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선봉에서 유난히 큰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날 윤형숙은 헌병대가 내려친 일본도에 왼쪽 팔을 잃었다. 선혈이 낭자한 채 경찰서에 끌려간 윤형숙은 ‘너는 누구냐’는 일경의 질문에 ‘보다시피 나는 피흘리는 조선의 혈녀다“고 답했다 한다.

그 후 윤형숙은 징역 4개월에 4년 연금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면서 심한 고문으로 오른쪽 눈까지 실명했다. 윤형숙은 그날 이후 ‘남도의 유관순’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 광주 3.1만세운동 발상지 기념 테마공원. 색바래고 구겨진 종이 태극기 몇장이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다.ⓒ프레시안

광주만세운동을 계획했던 남궁혁 장로의 집터는 현재 광주 만세운동의 발상지라는 안내판과 함께 작은 테마공원이 조성돼있다. 공원 안에는 민족 대표 33인의 묵비석이 놓여 있다.

만세운동 행렬이 시작됐던 그 길은 현재‘3·1 만세운동길’이라는 기념 길이 됐다. 길 옆 옹벽에 그려진 벽화에는 만세운동 선봉에 섰던 윤형숙 열사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100주년이 되는 3·1절 아침, ‘3·1 만세운동길’은 적막했다. 태극기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테마공원 잡목 나뭇가지에 소형 태극기 몇 개가 매달려 있었지만, 언제 걸어놓은 것인지 색이 바랜 채 구겨져 있었다.

비장했던 거사의 스토리텔링이 숨쉬는 기억의 장소들은 ‘3·1 운동 100주년’ 기념일에도 그렇게 적요에 잠겨 있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