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우사태'라 불리는 엔론 사태를 계기로 기업신화가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성공기업의 모토로 알려져온 ‘창조적 파괴’가 바로 그 대상이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혁명적 결과는 반드시 혁명적 과정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주장이 엔론 사태를 계기로 힘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몇 년전부터 최고경영자(CEO)라는 용어가 화두가 되면서 경영에 ‘점진적 개혁’이나 ‘통제’보다는 ‘혁명성’과 ‘창조성’에 우위를 두어야 한다는 이론이 크게 유행했다.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경영학자들에게 엔론이 그동안 보여준 파격경영 방식은 경영이론의 대표적 성공사례였다.
<Leading the Revolution>의 게리 하멜, <Practising Creative Destruction>의 리처드 포스터와 사라 카플란,<Devising Strategy Through Simple Rules>의 캐시 아이젠하트와 도널드 설, <Winnnig the War for Talent>의 에드 마이클스 등 ‘창조적 파괴’를 주창해온 학자들은 하나같이 엔론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엔론이 미국 역사상 최대의 파산기업이 된 것을 보면서 두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첫 번째는 엔론을 높이 평가해온 컨설턴트나 학자들이 경솔했던 것일까. 또 하나는 장기 경영전략을 엔론처럼 급진적 개혁에 바탕을 두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이다.
실리콘 밸리의 경영이론가이자 런던 비즈니스 스쿨의 객원교수인 게리 하멜은 엔론에 대한 자신의 저서가 무비판적이라는 비난에 동의하지 않는다. 평소 엔론은 급진적 개혁을 성공시켜 에너지산업계 전체에 변혁을 가져왔다고 주장해온 그는 “엔론은 올바른 길을 걸었는데 실패한 점에서 더욱 비극적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엔론이 천연가스 시장에 경쟁구도를 심었고, 발전소 개발에 진출했으며 광역통신과 온라인 전력 거래 등을 시도한 것은 자본과 기업가 정신이 결합해 만든 위대한 성공작으로 묘사되었다.
하멜은 자신의 저서에서 “엔론은 영속적인 개혁이 가능한 체제를 구축했다. 수천명의 직원이 스스로를 혁명가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믿게 한 조직이었다”고 썼다.
그러나 혁명은 통제하기 매우 어렵다는 난점이 있다. 통제 불가능이 바로 엔론의 갑작스런 추락의 핵심요인이었다. 엔론의 경영진은 재무구조를 주주가치와 상반되게 끌고 가면서도 교묘하게 이를 은폐했다.
하멜은 이에 대해“엔론의 자신감이 지나친데서 온 경영실패”로 해석하고 싶어한다. 기업 확장과 주가 상승을 위해 경영진이 자금 동원에 편법을 사용함으로써, 건전 성장이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에 위험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스탠퍼드대 경영학 교수인 캐시 아이젠하트도 “엔론이 기존의 기준으로 볼 때 비전이 없어보이는 산업에 새로운 사업모델을 제시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엔론 온라인 같은 회사는 새로운 시장에 뛰어들 몇가지 기준만 제시하는 방식에 부응한 중간관리자급의 혁신적 사고에서 나온 사업모델이라는 것이다.
그는 엔론이 붕괴했다고 해서 이처럼 유연한 경영방식이 지닌 가치가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엔론이 무너지기 전부터 ‘혁명이 아니면 죽는다’는 류의 경영이론에 대한 반론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었다.
컬럼비아 비즈니스 스쿨 경영학 교수 에릭 에이브럼슨은 지난 여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게재된 논문에서 기업은 끊임없는 변화보다는 ‘역동적 안정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화는 조직이 분열될 위험을 크게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지난 2월 네슬레의 피터 브라벡 회장도 “1968년에도 혁명이 아니면 사회변화는 불가능하다는 말도 안되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도대체 천천히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라고 발언한 바 있다.
전 스탠퍼드 교수이자 경영학 저술가로 유명한 짐 콜린스는 점진주의학파의 대표논객이다. 그는 기업을 단순히 좋은 단계에서 월등히 좋은 단계로 변화시키는 요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5년에 걸쳐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결과로 나온 최근작 <Good to Great>(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에서 주주에게 최고의 장기 수익을 가져다준 기업들을 조사해보니, 초일류 기업의 공통점은 “계획된 변화라고 인정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보다 큰 목표를 향해 조금씩 실적을 쌓아갔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짐 콜린스는 “혁명적인 결과가 혁명적인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혁명은 운동선수에게 스테로이드를 처방하는 것처럼 단기간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건강에 위험을 초래한다. 15년 이상 우수한 경영실적을 내려면 혁명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장기적인 경영성과는 ‘체계적인 이념으로 무장한 잘 훈련된 직원들이 바람직한 행동을 실천하는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기업들의 경우 CEO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지만 결과는 눈부시다.
하멜의 저서에서 성공사례로 거론된 찰스 슈왑이나 시스코도 이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코닝도 마찬가지다. 존슨 & 존슨 정도가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을 뿐이다.
콜린스가 성공적 기업들이 변화할 필요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목표는 혁명적으로 하되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짐 콜린스는 "미국의 S & P 5백대 기업 중 리스트에 올라있는 평균연수가 10~12년에 불과하다"면서 “창조성과 통제, 혁명과 진화의 요소를 나름대로 배합한 조직만이 성공하는 기업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짐 콜린스는 1965년 이래 포천지 5백대 기업에 나타났던 1천5백여 기업 중 평균 시장 주가보다 7배 이상 성장한 초우량 기업은 1%에도 채 못 미치는 11 개 기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11개 회사의 성공 요인을 면밀히 분석해보니 이들의 성공 뒤에는 어김없이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CEO가 있었다고 한다.
엔론의 붕괴는 창조적, 변화 지향적 조직이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경영을 해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진적 개혁론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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