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산(天藏山)은 불교사찰의 입지 유형 가운데 가장 빼어난 명당터로서 ‘하늘이 숨겨놓은 곳[天藏]’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천장산과 배봉산은 도심의 빌딩 사이로 비죽이 고개를 내민 녹지대의 섬처럼 보입니다만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빌딩 사이로 야트막히 길게 이어진 산줄기의 봉우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학교 제73강은 2019년 2월 10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성북구 석관동 의릉(懿陵) 매표소 앞에 모여주세요.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의릉 주소 : 서울 성북구 화랑로 32길 146-20 전화 : (02) 964-0579
교통편 : 서울지하철 1호선 신이문역 1번출구(도보 약 15분), 6호선 돌곶이역 7번출구(도보 약 15분). 시내버스 청량리역환승센터 또는 돌곶이역 7번출구에서 120, 147, 261번(‘의릉입구’에서 하차, 도보 4분)]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천장산(의릉/구 중앙정보부 강당)-경희대학교(근대건축물)-경희의료원(회묘 터)-연화사-홍릉터(홍릉수목원)-세종대왕기념관(세종신도비 및 구영릉 석물)-영휘원/숭인원-점심식사 겸 뒤풀이-바리봉(청량사)-떡전고개-서울시립대-배봉산(영우원 터)-휘경중학교(휘경원터)-회기역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9년 2월 <천장산과 배봉산-청량리 일대의 역사유적들>에 대해 들어봅니다.
하늘이 감춰놓은 명당, 천장산
북한산성의 대동문과 보국문 사이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칼바위능선은 화계사의 주봉을 이루고 다시 수유리고개를 넘어 ‘북서울꿈의숲’이 있는 오패산(123m)을 이룹니다. 다시 동남쪽으로 장위동고개를 넘어 천장산(天藏山 140m)에 이르러 동쪽으로 의릉을 품고 서쪽으로는 경희대의료원이 들어선 ‘회묘 터’를 감싸고 다시 뻗어나와 회기동고개인 안화현(安禾峴)을 넘어 청량사가 기대고 있는 바리봉을 지나 떡전고개를 넘어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110m)을 이루고 구 촬영소 뒷산에서 중랑천과 청계천을 만나 그 산줄기의 뻗음을 마감합니다.
천장산은 이 산줄기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회기동, 청량리동, 석관동에 걸쳐서 있습니다. 회기동(回基洞)은 ‘회묘 터’에서 유래됐고 석관동(石串洞)은 천장산의 한 지맥이 돌을 꽂아 놓은 듯이 보여 ‘돌곶이마을’이라고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옮긴 것이며 청량리동은 청량사(淸凉寺)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천장산은 예로부터 풍수지리상의 명당 터로 손꼽히던 곳입니다. 특히 연화사(蓮華寺)의 삼성각 상량문에 따르면 “진여불보(眞如佛寶)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시방삼세에 두루 하지만 드러나 보이지 않으므로 절의 뒷산을 천장산이라 부른다”고 하였듯이 사찰의 입지조건으로 가장 빼어난 명당 터로서 ‘하늘이 감춰 놓은 곳’이라는 산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천장산 일대는 조선 왕족의 묘지가 많이 조성되었습니다. 경종(景宗)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의 쌍릉인 의릉(懿陵)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묘도 이곳에 조성하였는데 훗날 연산군이 왕릉의 규모를 갖추고 회릉(懷陵)으로 격상시켰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다시 회묘(懷墓)로 격하되었습니다. 이후 연산군의 왕비였던 신씨의 묘까지 이곳에 조성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이장되어 ‘회묘 터’라는 한자 이름만 전해오는데 그것도 ‘회묘 터(懷基)’가 아니라 ‘돌아온 터[回基]’로 바뀌어 동네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능이 고종과 남양주 홍릉(洪陵)으로 합장되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으며 고종의 계비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 귀비 엄씨의 묘소인 영휘원(永徽園)과 영친왕의 아들 이진(李晉)의 묘소인 숭인원(崇仁園)도 있는데, 이 일대를 모두 아울러 ‘홍릉’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또한 주변에는 천안 전씨(天安 全氏)의 시조인 전섭(全聶)과 전씨 종가의 세 공신인 삼충공(三忠公) 이갑(以甲), 의갑(義甲), 락(樂)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5년에 의친왕 이강(李堈)이 건립한 제단이 남아 있습니다. 전섭은 온조왕이 처음 백제를 세울 때 공을 세운 십제공신(十濟功臣) 중 한 명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져 천안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환성은 천안의 별호입니다. 백제 초기의 인물인 전섭의 묘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아 후손들이 모여 사는 천안 삼태리에 단소(壇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후손들은 본관을 천안으로 하고 16세손 전악을 중시조로 삼았습니다. 전악(全樂)은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삼사좌복야를 지냈으며, 천안군(天安君)에 봉해졌습니다.
의릉,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
의릉(懿陵)은 경종(景宗)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의 능입니다. 왕과 왕비의 봉분을 앞뒤로 배치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으로 조선시대 왕릉 가운데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가 묻힌 여주의 영릉(寧陵)이 같은 구조이며, 이때 왕은 위쪽, 왕비는 아래쪽에 모시게 됩니다. 능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으며 난간 석주에는 12지를 넣어 방위를 표시하였고 위쪽에 놓인 왕의 능에만 곡장(曲墻)을 두르고 있는데 이것은 부부의 예로서 한 곡장 안에 두 봉분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경종은 숙종의 장남으로 계비인 희빈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숙종에게는 희빈 장씨 외에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가 있었으나 이들에게는 후사를 이어줄 아들이 없었습니다. 해서 경종은 태어난 지 두 달여 만에 원자로 봉해지는데 이것은 당쟁으로 이어집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인현왕후가 아직 젊기에 후궁의 아들을 원자로 삼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펴다가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이 사건으로 서인은 대거 축출되면서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고 경종은 3세의 나이로 다시 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종의 나이 14세 때,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하기 위해 취선당 서쪽에 마련해놓은 신당이 발각되어 ‘무고의 옥’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이때 사약을 받은 희빈 장씨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만나면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기절시키는 이해하지 못할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 때문인지 경종은 어릴 때부터 병약하여 임금이 된 후에도 병치레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후사 또한 없어 즉위년(1720)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는데 이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 속에서 신축, 임인옥사를 야기하였고 마침내 1724년(경종 4)에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니 춘추 37세였고 재위 4년이었습니다.
선의왕후는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영돈녕부사 어유구의 딸로 1718년 세자빈이었던 단의왕후 심씨가 병으로 죽자 같은 해 15세로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가 경종의 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으나 소생 없이 26세에 승하하였습니다.
의릉은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가 자리잡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능 주변에 중앙정보부의 축구장을 만드는 바람에 많이 훼손되었으나 ‘중앙정보부’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세곡동 대모산 아래로 이전하면서 다시 원상 복구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으며 한쪽 귀퉁이에 그 당시 중앙정보부 강당 건물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홍릉수목원 앞 삼거리 일대를 홍릉이라 부르고 예의 홍릉갈비로 유명한 지역이 되었습니다만 지금은 아무리 찾아봐도 홍릉은 없습니다.
홍릉(洪陵)은 원래 고종 비인 명성황후의 능으로 1895년 시해 당한 후 일제의 간섭으로 능을 조성하지 못하고 있다가 1897년에 비로소 이곳에 모셔 홍릉이라 하였고 고종이 승하한 1919년 금곡으로 이장해 고종과 합장하였으며 순종과 그의 비 순명황후(純明孝皇后) 그리고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능인 유릉(裕陵)이 그곳에 들어서면서 지금은 홍유릉(洪裕陵)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민씨 정권을 세우고 개국 정책을 주도하는 등 왕실 정치에 간여하며 대원군의 친명, 친일정책 등에 반대하고 정치의 실권을 잡기 위하여 정쟁을 벌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충주, 장호원 등으로 피신 중 청나라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밀어내고 민씨 정권을 재수립하였습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으로 민씨 일파가 실각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나 1894년 대원군의 재등장으로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러시아와 결탁하여 일본세력의 추방을 기도하다가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고로가 보낸 자객에 의하여 건청궁 곤녕각 옥호루에서 시해당한 후 시체는 거적에 말려 건청궁 옆 녹산(鹿山)에서 석유불에 소각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명성황후는 일제의 사주로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가 복호(復號)되어 1897년 명성(明成)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그해 11월 국장을 치른 후 이곳에 묻혀 25년간 홍릉이라 불리며 관리되어 오다가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남양주 금곡으로 천장하여 고종과 합장하였으며 지금은 홍릉수목원 안에 능 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남아 있습니다.
홍릉 터 남쪽에는 고종의 계비 엄비의 묘소가 있는 영휘원과 영친왕의 맏아들 진의 묘소인 숭인원이 있으며 영휘원 북쪽으로는 세종대왕기념관이 있습니다. 홍릉 터 나머지에는 1960년대부터 과학연구기관이 들어섰는데, 한국 유일의 식물표본지구인 임업연구원을 비롯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국방연구원(KIDA)이 있습니다.
영휘원과 숭인원
영휘원(永徽園)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사친인 순헌 귀비 엄씨의 원소(園所)로서 엄귀비는 1854년 11월 증찬정(贈贊政) 엄진삼의 장녀로 태어나 8세에 경복궁에 들어가 명성황후 민씨의 시위상궁이 되었다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아관파천 때 고종을 모시며 후궁이 되어 1897년 영친왕 이은을 출산하여 귀인에 봉해졌고, 1901년 비에 진봉되고, 1903년에는 황비에 책봉되었습니다.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참여하는 등 근대 여성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1911년 7월에 사망하자 8월에 안장하고 원호(園號)를 영휘라고 하였으며, 위패는 덕수궁 영복당(永福堂)에 봉안되었다가 칠궁(七宮)으로 이안(移安)하였습니다.
숭인원(崇仁園)은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원손(元孫) 이진(李晉)의 원소(園所)로서 진은 1921년 8월에 태어나 그 이듬해 5월에 1년도 채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두 원의 묘역시설로는 곡장(曲牆), 상설(象設), 혼유석(魂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문인석, 무인석, 석마, 홍살문, 정자각, 비각, 제실(祭室), 우물(靈泉), 사초지(莎草地) 등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으며 북쪽 언덕에 자리잡은 세종대왕기념관 뜰에는 구 영릉(舊英陵)에서 수습해온 세종대왕신도비와 능호석(陵護石)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연화사(蓮華寺)는 1499(연산군 5)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되었습니다. 1993년 자음(慈音)이 지은 <천장산연화사삼성각상량문>에 따르면,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화장(蓮華藏) 세계여서 연화사라 하기도 하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으므로 연화사(蓮花寺)라 했다고 합니다.
1504년(연산군 10)에 윤씨의 회묘(懷墓)를 회릉(懷陵)으로 승격시켜 석물을 조성하였고 1724년 경종이 죽자 그 이듬해에 회릉 근처에 의릉(懿陵)을 만들고 연화사를 원찰로 삼았는데 회릉은 1969년 서삼릉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청량사(淸凉寺)는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1117년(고려 예종 12) 예종이 불교 거사였던 이자현(李資賢)을 불러 이 절에 머물게 하였다고 합니다. 원래는 홍릉 영휘원(永徽園)이 엣 절 터였는데 1897년 명성황후의 홍릉을 만들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만해 한용운이 잠시 머물렀고 1939년 7월 12일에는 한용운 선생의 회갑연이 이곳에서 조촐하게 열렸다고 합니다. 같은 시기에 불교계 학자인 박한영(朴漢永) 스님도 이 절에서 기거했으며 극락전의 현판과 주련(柱聯)은 모두 박한영 스님의 글씨입니다.
떡전고개는 서울시립대학교가 있는 전농동에서 청량리정신병원이 있는 청량리 쪽으로 넘어 가는 고개로서 지금은 철로가 가로지르고 있어 '떡전교' 또는 '떡전다리'라 불리는, 철도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하지만 예전에는 이 부근에 떡을 만들어 파는 떡집이 많아 사람들이 그곳을 떡점[餠店]거리, 또는 떡전고개라 불렀습니다.
떡전고개는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경기북부, 강원도, 그리고 함경도에서 한양으로 올 때 도성에서 약 시오리 거리에 있는 이곳에 이르러서는 배고픔도 달래고 옷매무새도 고치면서 잠시 쉬었다 가거나 하루 밤을 묵어가기도 했던 곳입니다.
배봉산 자락의 영우원 터·휘경원 터
배봉산(拜峰山) 자락에는 영우원((永祐園)과 휘경원(徽慶園) 터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우원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이며,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였던 수빈 박씨의 묘소입니다.
배봉산의 이름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정조가 평생에 못 다한 불효를 한다며 날마다 부친의 묘소를 향해 배례하게 되면서 산 이름을 ‘배봉산‘으로 불렸다는 설과, 이곳 산기슭에 영우원과 휘경원 등 왕실의 묘원이 마련되면서 길손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기 때문에 배봉(拜峰)으로 불렸다는 설과, 산의 형상이 도성을 향하여 절하는 형세를 띄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영우원은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묘로서 원래는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나 정조가 임금에 오르고 영우원이라 고쳐 부르다가 1789년(정조 13)에 화성(華城)으로 이장한 후에는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899년(광무 3)에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면서 ‘융릉(隆陵)’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묘인데 수빈 박씨는 1770년(영조 46)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박준원의 3녀로 태어나, 1787년(정조 11)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선옹주를 낳고 수빈에 책봉되었으며, 1790년(정조 14) 순조를 출산한 후 1822년(순조 22)에 사망하여 1823년에 배봉산 아래 묻혔습니다.
그러다가 1855년(철종 6)에 순조의 능인 인릉(仁陵)을 천장하면서 휘경원도 같은 진접읍의 내각리에 있는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元宗)의 생모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순강원(順康園) 옆으로 옮겼는데, 풍수지리상 적당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다시 진접읍의 부평리로 이장하였고 위패는 칠궁 안에 있는 경우궁(景祐宮)에 봉안되었으며, 휘경원 터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고 휘경동이라는 지명으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보온차림, 모자, 선글라스, 장갑, 스틱, 무릎보호대, 버프(얼굴가리개),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참가비,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서울학교'를 찾으시면 2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이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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