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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의 길' 걸었던 朴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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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의 길' 걸었던 朴대령

10.26 당시 총격은 안 해

지난 79년 10월26일 밤, 궁정동에서 울린 한발의 총성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하나인 박정희와 유신시대를 사라지게 했다.

그로부터 22년이 흐른 지금 당시 주범이던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대해선 역사적 재평가가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사건에 빨려들어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고 박흥주 육군대령에 대해선 아직 그런 움직임이 없다.

박대령은 육사18기 중에서 가장 승진이 빠른 ‘특진그룹’의 선두에 있던 인물로 1962년 소위로 임관한 이후 78년 대령 진급시까지 전후방을 두루 돌며 근무했고 월남전에도 참전했던 전형적 군인이었다.

그는 군인시절 김재규 부관으로 함께 근무한 인연으로 중앙정보부 비서실장에 임명된 후에도 볕이 잘 들지 않던 서울 중구 행당동의 반(反)지하 집에 전세로 살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했다. 10.26사건 다음날 군 수사관들이 조사하러 왔다가 산꼭대기에 위치한 허름한 전셋집을 찾기 힘들어서 고생했다는 일화도 있다.

10.26 당시 정황이나, 사전에 가정에 일체 언질이나 암시가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박대령은 김재규 부장의 박대통령 암살을 미리 인지하거나 사전계획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군인으로서 상명하복에 따라 상관인 김재규의 명령에 복종한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의 주장에 의하면, “재판과정에서 모든 탄환의 발사자가 밝혀졌으나 박대령이 쏜 것으로 밝혀진 탄흔 등이 전혀 없는 것이 그 증거”라 한다. 즉 박대령은 살인이나 확인사살을 하지 않고 자신의 상관인 김재규를 보좌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박대령은 그러나 비록 사전모의 등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역사관이 분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박대령은 사형집행장에서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는 집행관 물음에 기도할 시간을 달라 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 순간 나라와 이 민족을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께서 이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주옵소서.”
목격자의 전언이다. 그는 또 사형집행 순간에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육군 만세!”를 외쳤다 한다.

박 대령이 군인신분으로 비상계엄하의 군법재판에서 단심으로 사형이 확정되고 형이 집행된 후 가족들은 오랜 동안 경제적, 정신적으로 큰 곤란을 겪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과정에 사형집행후 삼엄한 분위기 하에서도 빈소를 지켰던 박대령의 서울고 동기생인 황남규씨 등의 도움이 컸다 한다.

현재 가족들의 마지막 소망은 박대령의 시신을 그의 평생소원대로 국립묘지로 이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요즘 박대령의 육사 18기 동기생들이 주축이 돼 박대령의 명예 회복 차원에서 연금 지급, 국립묘지 이장 등을 위한 모임을 갖고 있으며 헌법소원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주범이던 김재규, 박선호등은 사형 집행 3년 후부터 유가족에게 연금이 지급되면서 ‘상징적 복권’이 이루어졌으나 사형 당시 현역군인 신분이었던 까닭에 유독 박대령만은 군법에 따라 복권과 명예회복이 안 되고 있다.
지난해에 미망인 김묘춘씨는 국방부장관 앞으로 탄원서를 냈으나 아직까지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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