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지출이 일본 경제불황을 극복해 나가는 데 필요불가결하다는 공감이 일본 내외에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의 재정적자 규모로 볼 때 재정 정책에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재정적자가 상당한 규모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이 공산주의 경제가 아니라 시장경제라는 점에서 재정적자는 양적인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고려돼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에 관해서는 공산주의자 같은 관점에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 경제 활성화를 위해 재정적자를 이대로 두어도 좋으냐 여부의 판단을 하려면 적자 규모뿐 아니라 그 효용성도 따져봐야 한다.
재정적자의 효용성은 바로 국채의 가격으로 가늠할 수 있다. 만일 일본의 재정적자가 경제에 무리를 주고 있는 것으로 보고 아무도 국채를 사지 않으려 한다면 국채 가격은 낮아지고 수익률이 증가한다. 사람들이 이와 반대로 생각한다면 수익률은 낮아지고 가격은 올라간다.
현재 일본 국채(JGB)는 1.25%의 수익률을 보이고 있다. 일본 장기채권사상 최저 금리 수준이다. 따라서 국채 가격은 현재 사상 최고로 높다. 미국 재무부가 대공황때 발행한 채권의 수익률이 가장 낮았을 때가 지난 41년 11월 1.85%였는데, 당시 미국의 실업률이 9.9%였다. 이에 비해 현재 일본의 실업률은 4.9%다. 이는 현재 일본의 금리가 얼마나 낮은지 잘 보여주는 수치다.
이처럼 초저금리 현상은 바로 사실상 유동성 함정에 빠진 자본시장에서 자금 수요자는 정부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의 모든 펀드 매니저들이 정부의 채권을 사들여 정부에게 돈을 빌려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바로 이런 까닭이다.
국채 가격을 살펴보면 일본국민들은 현재 재정적자가 그리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상황이 정부가 발행하는 장기채권이 14% 이상의 수익률을 보이던 5년전의 이탈리아이나 1980년대초의 미국 상황과는 다른 것이다.
시장의 요구는 일본은 5년전 이탈리아나 15년전 미국이 취한 정책과 정반대로 재정적자를 줄이기보다는 적자를 늘리는 한이 있더라도 재정지출을 지속하라는 것이다.
민간부문에서 부채상환에 열중한다고 해서 시중에 자금이 넘쳐나지도 않거니와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위험은 더욱 없다. 일본에서 대형국책 사업을 할 곳이 남아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현재와 미래의 세금 부담자에게 최저비용으로 공공사업을 벌일 역사적 기회가 될 것이다.
재정지출을 하지 않으면 불황의 늪에 빠져버릴 상황에서 재정정책을 변경할 이유는 더욱더 찾기 힘들다.
물론 재정지출을 무한히 지속할 수는 없다. 버블(거품) 경제 이전인 70~86년 평균치로 일본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회복되는 데 2~3년이 필요할 전망이다. 1천조엔의 국부 손실로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요하는 일본 경제를 감안할 때 앞으로 2~3년만 더 재정지출을 감행한다는 것이 그리 무리한 처방이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경제는 과거의 번영에 안주하거나 개혁을 할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회복불능 상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모든 사람들이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회복을 향한 전환점을 돌고 있다.
일본경제가 무기력증에 빠져있다면, 일본 기업들의 자금흐름에 70조엔에 이르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일본의 기업들은 20조엔의 대출을 해마다 갚는 대신 연간 50조엔을 대출받아 전처럼 공장과 시설에 투자하고 있다.
70년대나 80년대처럼 기업들이 대출과 투자를 활발히 한다면 불황에 빠질 이유가 없다. 일본경제가 무기력증에 빠져있다는 일부의 주장은 실제 일본 경제의 움직임과는 맞지 않는다.
***금융위기에 바람직한 정치적 대처**
물론 일본 경제문제를 논의하면서 일본의 금융 위기와 일본 건설업체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량 채권을 일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그러나 앞에서 논의했듯이 자금 공급보다 수요가 훨씬 빠르게 감소한 상황에서는 이런 주장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엔화 약세와 주식시장 위축이 동시에 일어나 전국적인 신용경색이 발생했던 지난 97~98년도를 제외하고 은행이 대출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이 일본 경제성장에 장애물이 됐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든 은행의 재무가 건전해져도 잠재 대출 수요자들의 재무구조가 좋아지지 않는 한 자금 수요가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금융제도를 개선하는 것은 중요하다. 일본 안팎에서 일본은행들이 대출심사를 보다 강화하고, 필요하다면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대손충당금을 쌓아두는 대신 아예 해당기업을 정리해 버리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구조개혁 차원에 국한한다면 이런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언은 일본의 경제불황이 유동성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미시경제적 입장이다.
은행의 클린(clean)화는 부채상환 위기를 겪는 기업들이 소수일 때는 가능한 이야기다. 일본처럼 많은 기업들이 부채상환에 어려움에 쳐해있을 때 부실자산의 회수는 끔찍한 연쇄도산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기업이나 은행조차 발목을 잡힐 우려가 크다.
지난 10년간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는 경제상황과 이 기간동안 상업용지 등 실물자산 가격이 최고였을 때에 비해 10분의 1로 폭락한 실상을 감안할 때, 은행들이 대출 기준을 엄격히 하면 대출할 수요자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최근 은행을 감독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세운 금융감독원(FSA)이 보다 엄격한 대출 기준을 강요하자 많은 기업들, 특히 중소기업들은 소비자 금융회사의 고리대출에 의존하고 있다. 초저금리 시대에 중소기업들은 은행 대출 방도가 없어 심각한 신용경색을 겪고 있다는 것은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의 비교**
82년 중남미의 외환 위기로 미국 금융가에 불똥이 떨어졌을 때 폴 볼커가 이끌던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은행들이 서둘러 부실채권을 회수하도록 독촉하기는커녕 오히려 중남미에 자본 투자를 더하도록 유도하고 몇년 부채를 탕감해 주도록 했다.
이 조치로 양측이 재무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조치가 없었다면 중남미 전체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은행들이 곤욕을 치렀던 97년 아시아의 외환 위기같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더욱이 10년쯤 뒤 미국 금융계의 재무구조가 취약해졌을 때 91년에서 93년까지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다시 은행들을 지원하고 나섰다. 6%대인 우대금리와 3%로 내린 연방자금 사이에 3%의 가산금리를 부여한 것이다. 이같은 대응방식은 미국이 일본과 같은 구조적 위기에 대해 경제 전체를 생각한 최선의 방책을 찾아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일본의 금리가 너무 낮아 미국처럼 가산금리를 높게 주는 정책을 쓸 수는 없다. 일본정부로서는 은행의 재무구조 개선을 신속히 강화하기 위해서 직접자본투입을 할 수밖에 없다.
미국 재무성 로렌스 서머스 장관이 일본정부가 15조~ 25조엔이 공적자금을 은행에 투입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문제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부실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은행들이 서두른다면 그만큼 더 많은 자본 투입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실제 자본투입이 이루어진 것은 모두 합쳐 10조엔에 불과하다. 하쿠오 야나기사와 일본금융감독원장은 부실채권을 조속히 회수하도록 은행들에게 요구하면서도 더 이상의 공적자금 투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따른다면 이는 재앙을 자초하는 꼴이다.
전통적 미시경제학으로는 일본이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거시경제적 관점에서 정치적 판단이 따라야 한다. 일본 국내외 언론에서 89년 미국의 저축대부조합(S&L) 처분과 비교하는 보도를 하는 것은 유감스럽다.
일본의 경우와 비교할 때 미국의 케이스는 소규모였다. 민간금융업계 밖으로는 사실상 알려지지 않은 앞의 두가지 케이스가 비교하기에 적절한 것이다.
일본이 미국의 저축대부조합 식의 해결책을 택한다면 그 청산비용은 미국이 들인 1천6백억달러의 10배는 족히 들어갈 것이다. 당시 S&L로 분류된 자산은 미국 자산의 5%에 불과했다. 95%는 건전한 자산이어서 미국신용공사(RTC)에 의해 매각된 자산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그 비율이 거꾸로다. 자산의 유동화에 섣불리 나섰다가는 자산가격이 더 빠르게 떨어질 것이다. 이는 이런 조치와 연관된 모든 인근 부동산의 담보 가치를 하락시킨다. 이는 대출기관들이 더 많은 담보를 요구하게 되는 악순환을 일으킨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구조적 위기에서 전통적인 미시경제학적 처방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말해준다. 금융계의 혼란을 정리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서는 미국 TRC식 처방보다는 중남미의 외환에 대해 미국이 취한 방식처럼 세심한 처방이 따라야 한다.
***완전고용 상태가 아니라면 건설회사 부도 방치해선 안돼**
지급불능 상태의 건설회사들을 청산하는 문제가 일본 구조개혁의 첫단추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완전고용상태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완전고용상태에서 새로운 분야가 나타나면 비생산적인 부분은 위축되고 인력과 자원이 이동한다.
그러나 완전고용과 일본은 거리가 멀다. 새로운 사업을 펼치는데 무슨 장애물이 있는가. 건설업계도 업체 수가 지난 몇 년간 증가한 것을 볼 때 건설업계에도 진입장벽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건설업체들을 파산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실업률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남은 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을 높일 뿐이다.
따라서 부실 건설업체 청산은 구조개혁이란 명분에 걸맞지 않다. 실업자가 비생산적이라는 전제를 한다면 실업률이 증가할수록 재정부담은 더 늘어나고 일본전체의 생산성은 더욱 떨어질 것이다.
***구조개혁의 진정한 필요성**
재정적자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들은 적자로 인해 금리가 치솟아 경제회복을 방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저금리 현상이 자금 수요의 감소에 따른 것이고, 게다가 재무성의 신용자금국이 직접적인 채권구매활동을 하지 않기로 하고 일본의 대외부채에 대해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는다는 소식에도 일본국채 시장은 지금까지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 일시적인 외부충격으로 금리가 아무리 올라도 자금 수요가 없으면 제자리를 찾아간다. 금리의 이런 성질이 내재돼 있다.
저금리가 계속된 것으로 볼 때 앞으로 일본 경제가 고금리로 위기를 겪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금리가 오르지 않아서 문제가 될 것이다. 중장기적으로 민간부문의 저축보다 자금 수요가 낮은 것이 위기가 될 것이다.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좋아지면 기업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자금 수요가 회복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29년 이후 미국의 예를 보면 금리는 오르기보다는 내려갈 가능성이 더 크다.29년이전의 평균 금리를 회복하는데 미국의 경우 30년이 걸렸다. 뉴딜 정책으로 재정지출을 늘리고 세계2차대전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산업활성화 요인조차 금리를 29년 전 수준으로 되돌리지 못했다. 금융당국이 금리를 억제한 요인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다.
30년대 혹독한 경험으로 미국 기업들은 현금흐름 범위내에서 자본 투자를 해왔다. 일본에서 기업들이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면 금융당국은 국채를 사들여야 할 것이다. 이미 일본에서는 ‘현금흐름경영’을 조언하는 책들이 넘쳐난다. 일본식으로 표현하자면 ‘돈 빌리지 않고 기업 경영하기’다.
60년전 미국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요즘 일본의 대부분 기업들은 현금흐름 범위내에서 자본 투자를 한다. 금리가 올라준다면 대책은 보다 분명하다. 적자를 줄이면 된다. 그러나 저금리가 계속되면 대책이 거의 없다.
일본처럼 저축률이 높은 나라는 ‘현금흐름 경영’을 하지 않도록 유도해야 한다. 자금 수요를 일으키려면 투자기회가 기업의 현금흐름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많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정부는 규제완화와 시장지향적인 조치들을 강력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구조개혁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금리가 오를까봐 걱정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어서 불행히도 지금까지의 구조개혁은 미진했다. 하지만 재정적자가 급증하고 있어도 금리는 계속 내려가고 있다. 막연히 금리가 오를 것이라고 두려워 해서는 일본의 경제불황을 극복할 수 없다. 재정지출과 구조개혁의 양날개 작전만이 일본이 처한 특수한 불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을 위한 교훈**
마지막으로 일본의 경험이 미국에게 어떤 시사점을 던지는가. 미국 경제가 나스닥 붕괴 이후 4조달러의 국부가 손실된 후유증으로 유동성 함정에 빠져가고 있다면 지금까지 논의한 모든 것이 미국의 현명한 정책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기업들이 이윤 극대화에서 부채를 최소화는 쪽으로 움직이는 순간, 모든 통화정책은 효력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공공지출의 역할이 30년대 이후 무시되어 왔지만 다른 모든 수단이 통하지 않을 때 그 중요성이 다시 부각될 것이다. 세금감면 등의 다른 조치도 일반 상황이라면 더욱 효율적이겠지만 유동성 함정에 빠진 상황에서는 납세자에게 큰 희생을 치르게 하는 것이다. 미국의 경제정책자들은 이런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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