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말께 일이다. 미국 갑부들이 가장 애독하는 잡지인 포브스가 ‘5천억달러 헤지펀드의 우둔함’이란 자극적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었다. 헤지펀드에 돈을 맡겼다가 손해 본 갑부와 유명인사들의 원성이 자자하자, 이들을 대신해 포브스가 칼을 뽑아들고 나선 것이다. 이 기사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바바라 스트라이샌드, 로버트 포리첼리 상원의원, 비안카 재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 모두가 헤지펀드에 투자했다가 돈을 잃었다는 것이다.”
포브스의 예기치 못한 공세에 헤지펀드들이 화들짝 놀랐다. 미국 갑부층에 대한 포브스의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할 때 가만히 손놓고 있다가는 고객들의 무더기 이탈이 우려되기 때문이었다. 헤지펀드들은 기사가 나온 지 며칠 뒤인 7월30일 반격에 나섰다.
***악어와 악어새의 전쟁**
미국계 대형 헤지펀드인 트레몬트사의 자회사인 트레몬트 어드바이저를 이끌고 있는 산드라 L. 만즈케 회장이 헤지펀드들의 대표해 역시 트레몬트의 자회사인 인터넷 뉴스사이트 헤지월드에 장문의 반박문을 실었다. 반박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됐다.
“돈 마론, 레오나르드 스턴, 레온 쿠퍼만, 리처드 블랙, 레온 레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들은 모두 헤지펀드에서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볼만한 장군멍군이다. 몇몇 운이 없어 돈 잃은 소수의 이야기만 듣고서 헤지펀드 전체를 매도하지 말라는 반격이었다. 한번 불붙은 포브스와 헤지펀드 사이의 전쟁은 앞으로 상당 기간 계속될 전망이다. 포브스가 앞으로도 계속해 시리즈로 헤지펀드의 허상을 파헤치겠다고 선언한 탓이다.
미국 갑부와 헤지펀드는 그동안 끈끈한 밀월을 즐겨온 ‘악어와 악어새’였다. 이들이 안면을 붉히며 진흙탕속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만 10년간 호황을 누려온 미국의 ‘파티’가 끝나면서 미국경제를 필두로 세계경제가 동반불황 국면으로 빠져들면서 이들 사이의 영원할 것 같던 밀월이 끝났다. 워낙 국제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지자 헤지펀드에 돈을 맡겼다가 원금까지 까먹은 갑부와 유명인사들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헤지펀드는 그동안 자신에게 돈을 맡긴 고객의 이름을 철저히 숨겨왔다. 이른바 고객의 비밀을 무덤속까지 갖고 간다는 마피아식 ‘비밀 엄수’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전투구가 시작되자 상황은 바뀌었다. 앞다퉈 내노라 하는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한치 양보없는 소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의 연간 탈세액만 7백억달러**
모르긴 몰라도 이전투구 과정에 본의 아니게 이름이 거명된 인사들은 펄쩍 뛸 듯싶다. 헤지펀드들은 99명이하로 구성된 펀드의 경우는 미국증권거래소(SEC)에 거래내역을 신고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망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해 카리브해 등의 조세회피지(Tax Heaven)에 법인을 설립하고서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한 해 동안에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고 있는 세금만 무려 7백억달러에 이른다는 게 미국 정부의 추산이다. 거의 우리나라 한 해 예산에 근접하는 엄청난 세금 탈루액이다.
때문에 헤지펀드에 돈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비록 법적으로는 문제될 것은 없으나, “소득이 있는 곳에 반드시 세금이 따라다닌다”는 미국에서는 결코 떳떳한 투자행위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미국의 거물급 상원의원에서부터 연예인, 소설가, 엔지니어, 펀드매니저에 이르기까지 내노라 하는 인사들이 이름이 줄줄이 거론되고 있으나 당사자들은 펄쩍 뛸 수밖에. 아마도 금명간 문제의 헤지펀드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거는 이들도 나올 전망이다.
***미국의 내노라하는 명사, 예외없이 헤지펀드 투자**
이름이 밝혀진 헤지펀드 투자가들이 어떤 이들인지 하나씩 살펴보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bara Streisand).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는 미국의 간판급 엔터테이너이다. 영화배우로서는 두 번이나 아카데미상을 수상했고, 가수로서는 숱한 빅히트 앨범을 내면서 그래미상을 수상한 미국의 만능 연예인이다. 영화제작자로도 유명하다.
로버트 토리첼리(Robert Torricelli). 미국 뉴저지주의 민주당 상원의원이다. 31세의 젊은 나이로 82년에 뉴저지주 하원의원에 당선돼 연임을 계속하다가 96년에 상원의원에 당선된 거물급 정치인으로 현재 금융위원회 등에서 일하고 있다.
비안카 재거(Bianca Jagger). 락 음악의 황제라 불리는 믹 재거(Mick Jagger)의 전처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미국 플레이보이들의 타깃이 되고 있다.
레오나드 스턴. '매드 라이브러리스' 시리즈로 유명한 미국의 대표적 밀리온셀러 작가로 영화판권료만 1억5천~2억5천만달러를 받고 있다.
레온 쿠퍼만(Leon Cooperman). 골드만삭스 투자운영의 회장이었다가 자산규모 40억달러의 대형 헤지펀드인 오메가펀드를 창시했던 월가의 큰 손으로 유명하다.
리처드 블랙(Richard Black). 영국 캠브리지대 출신으로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유럽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천재 엔지니어이다.
레온 레비(Leon Levy). 오펜하이머 뮤추얼펀드 회장 겸 오디세이 파트너즈의 창립자로 유명한 월가의 간판급 투자가이다.
***1인당 평균 5백만달러씩 투자**
이번에 이름이 밝혀진 유명인사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게 월가의 전언이다. 정치권에서부터 엔터테인먼트업계, 벤처업계, 투자업계의 내노라 하는 미국 및 유럽의 거물들이 사실상 일확천금을 노리며 헤지펀드에 돈을 맡기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지난 90년만 해도 150억달러에 불과하던 헤지펀드 자산이 현재 7천억달러로 폭증한 것도 이들 큰 손의 참여 없이는 애시당초 불가능했던 일이다.
2천6백여개의 헤지펀드를 대상으로 한 헤지월드의 최근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 헤지펀드의 평균 규모는 5억달러에 달하고 있다. 한 헤지펀드에 최대 99명만 가입이 가능하니, 1인당 평균 5백만달러를 투자했다는 말이 된다. 우리 돈으로 따지면 1인당 70억원 이상을 맡기고 있는 셈이다.
지난 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와 98년의 미국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LTCM) 파산이래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여론이 높다. 그러나 미국은 단호히 반대한다. 입법기관인 상원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해 내노라 하는 유명스타, 경영자, 매니저들이 대거 헤지펀드에 돈을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그 속내를 알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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