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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대통령의 '삼계탕 오찬'이 떠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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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대통령의 '삼계탕 오찬'이 떠오른 이유

[이봉현의 신뢰경제]<8>朴대통령과 재벌 총수 첫 회동에 부쳐

육감(六感)은 인간의 오관을 넘어선 감각을 말한다. 기시감(旣視感)도 육감일 텐데, 처음 대하는 상황인데 전에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을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28일 10대 재벌그룹의 총수들과 만난다는 소식에 '기시감'이 든 것은 노무현 정부 때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고 재벌 회장을 청와대 식당이 아니라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토속촌'이란 삼계탕집으로 불렀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 초였는데 바싹바싹 붙어 앉아 뜨거운 것을 먹느라 총수들은 진땀을 흘렸다. 재벌과 거리를 두고 총수들에게도 할 말을 하는 대통령은 점심 먹는 모습도 달랐다.
▲ 2003년 6월, 노무현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과 '삼계탕 오찬' 회동 모습. ⓒ연합뉴스

대통령을 만나고 온 총수들의 행보도 빨라졌다. 이건희 삼성회장은 그룹 간부들을 불러들여 투자 계획을 챙겼다. 투자와 고용확대를 부탁한 노무현 대통령의 말발이 확 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좀 달랐다. 재계는 자신들이 만들어 신정부 초기부터 밀어붙인 '2만 달러 국민소득' 정책을 드디어 노무현 정부가 국정 과제로 채택한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대통령과 총수의 삼계탕 회동은 이를 확정짓는 자리였다. 당선자 시절부터 5개월 정도 지속된 신정부와 재계의 갈등에서 재계의 손이 올라간 것이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은 재벌과의 관계에서 좀 다른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 그는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통령이 되겠다" 거나 "재벌을 개혁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당선자 시절 노동단체를 방문한 자리에서는 "우리 사회는 힘의 균형점이 지나치게 재계에 쏠려 있는데 이는 시정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금산 분리와 같은 재벌 개혁 정책을 입안했다. 요즘 나오는 대중소기업 상생이나 공정 경쟁 같은 경제민주화의 원형이 다 거기 있었다.

재벌을 비롯한 재계의 위기감은 꽤 컸던 것 같다. 그래서 당시 전경련의 김 아무개 상무는 <뉴욕타임즈>와의 회견에서 "새 정부의 정책기조가 사회주의인 것 같다"는 실언을 해 큰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손 놓고 있을 재계는 아니어서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작성한 <국민소득 2만 달러로 가는 길> 이란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하며 국정과제로 채택하라고 끈질기게 졸랐다. 이 보고서가 담고 있는 정책의 기조는 형평이나 공정이 아니라 개방을 통한 성장이었다. 즉 지구화 시대에 투자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게 성장비결이며 이를 위해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세율을 내리며, 산업평화를 이루고, 투자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자는 제안을 담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버텼다. 적어도 몇 달은 그럭저럭 개혁 기조를 끌고 가는 듯 했다. 그런데 전 정권의 유산인 카드사태가 터지고 경기가 푹 가라앉았다. 더불어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도 뚝뚝 떨어졌다. 3월에 71% 이던 지지율이 5월엔 57%, 7월엔 40%로 내려갔다. 경제가 계속 이 모양이면 이듬해 총선은 필패였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재벌 총수에게 손을 벌리기로 했다. 6월에 삼계탕을 먹으며 변화를 확인하고 8월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재계의 성장요구를 제대로 대접해 국정의제로 공표를 하게 된다. 이후 정부의 정책 기조는 개혁이나 형평에서 성장으로 확연히 돌아선다. 노무현 정부가 '왼쪽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했다' 거나 '악한 사람들은 아닌데 영리하지 못했다'는 평을 들으며 실패의 길로 접어든 것은 아마도 이때부터 일 것이다.

그래서 총수와의 회동은 시작이 아니라 마무리다. 이미 갈등 상황은 정리가 되었기에 만남이 가능한 것이다. 양자의 갈등이 총수의 항복으로 마무리되는 일은 별로 없다. 정부가 투자확대와 고용증대를 애걸하려면 뭔가를 줘야 한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과의 회동 전 전경련을 비롯한 재계는 경제민주화의 핵심을 담은 상법개정안에 강력히 반발했다. 다른 많은 경제민주화 조처들처럼 상법개정안도 약화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미 박 대통령은 경제민주화 조처는 그만 하면 됐다는 의중을 드러낸 바 있다.

경제민주화나 복지를 둘러싼 그 많은 논의와 시도들이 미봉되거나 무산되고 매번 재벌 총수에게 투자를 애걸하는 일로 끝나게 되는 것을 보는 심정은 허탈하다. 이번에도 시늉은 하겠지만 재벌이 대통령 부탁을 받아 투자할 리가 없고, 고용을 늘릴 까닭도 없다. 그런데도 경제를 다루는 우리의 상상력은 익숙한 패턴을 반복한다. 마가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입에 달고 다니던 "대안은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모두가 신자유주의를 역겨워하고 손가락질 한다. 하지만 시장개방, 민영화, 재정균형, 작은 정부, 복지축소, 기업 기 살리기 같은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여전히 건재하다. 무언가 문제가 있지만 여전히 똑같은 운영원리에 몸을 맡긴 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유를 나름 해명하는 책도 나왔다 (콜린 크라우치, <이상하게 죽지 않는 신자유주의(Strange Non-death of Neoliberalism)>, 2011). 이미 수십년간 우리의 경제, 사회생활을 조절하고 규제해 오던 원리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대안적 상상력은 아직 미약하다. 우리는 앞으로 오래 익숙한 패턴을 반복하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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