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의 방한 행보가 관심이다. 21일 한미 워킹그룹 회의에서 몇 가지 합의가 이뤄졌다. 26일 남북 철도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과 남북 유해 발굴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된다. 1년 넘게 봉인됐던 국제기구를 통한 800만 달러 규모의 대북 인도적 지원 문제도 "유엔 제재 대상이 아니"라는 쪽으로 검토키로 했다. 이로써 대북 제재 저촉 여부로 불투명했던 남북 관계 분야에 일부 숨통이 트였다.
비건 대표의 방한 목적이 대북 유화 메시지 전달에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10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 이후 북미 협상이 중단된 속에도 미국은 대화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공개적 메시지다. 아울러 미국 측의 협상 의지를 믿고 대화에 나오라는 북한을 향한 메시지다.
폼페이오 장관도 이날 미국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이 내년 초 열리기를 희망한다"고 지원사격 했다.
미국이 제안하는 협상 수순은 실무회담→고위급회담→2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나아가는 '바텀업' 방식으로 보인다. 비건 대표는 "우리는 북한 측 파트너와 다음 단계의 논의를 하기를 기대한다"면서 "그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의 정상회담에 대한 구체적 사항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톱다운' 방식을 선호한다. 비건 대표가 여러 차례 회담을 요청했음에도 북측 카운터파트인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 1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배경에 미국 관료들의 개입이 있다고 보는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만이 현재의 교착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상대라는 인식이 강하다. 북한이 제시한 영변 핵시설 폐기 등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는 미국의 제재 완화 및 체제안전 보장 조치가 전제되지 않으면 현 시점에서의 북미 대화가 무용하다는 항변 성격의 침묵이다.
전날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논평을 통해 "우리는 제재 따위가 무섭거나 아파서가 아니라 그것이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한 미국의 진정성을 판별하는 시금석이기 때문에 문제시하는 것"이라며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종식과 부당한 제재 해제 등 사실상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라"고 촉구했다.
이런 입장을 견지해온 북한이 비건 대표가 보인 유화 제스츄어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선 회의적 전망이 많다. 다만 북한으로서도 먼저 판을 깨기에는 부담이 적지 않은 만큼, 면밀하게 미국의 의도를 분석하는 과정을 거칠 것으로 예상된다.
대체로 내년 초가 분수령이 될 것이란 데에 의견이 일치한다.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은 비건 대표와 면담한 뒤 "한미는 금년도 지금부터 시작해 내년 초까지가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있어 중요한 시기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했다.
연내 성사가 무산된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 북미 정상회담, 교황 방북 등 굵직한 외교 이벤트들의 예상 시간표도 내년 초에 몰려있다. 다만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의 선순환을 의미하는 이 행사들이 순탄하게 진행될지 여부는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를 통해 공식화될 북한의 태도에 달렸다.
일각에선 최근 유난히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북한 매체들 동향을 근거로, 북미 정상 간 빅딜 담판이 성사될 때까지 북한이 버티기에 돌입할 것이란 관측이 있다. 2020년 재선에 올인해야 할 트럼프 대통령의 일정에 견줘, '시간 게임'에서 북한이 불리할 게 없다는 것이다.
반면 북한이 지난 4월 '핵·경제 병진노선'을 대체한 새 전략노선으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채택한 만큼, 경제적 성과를 내야 할 김정은 위원장 역시 내년 초를 허송세월하기에는 부담이 있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경제 분야 성과를 위한 대전제인 대북 제제 완화를 얻어내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건 비핵화 협상을 실질적으로 진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북미 줄다리기의 결과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하는 가운데,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북미 간에 여러 논의가 진행되는 것으로 안다. 기다려보자"고 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에 대해서도 "평양 선언에서 '가까운 시일 내'로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약속은 지켜질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는 "남북 정상회담이나 북미 정상회담 중 어떤 회담이 먼저 열려야 한다는 입장은 없다"며 "선순환적으로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순서는 관계없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교착 국면이 지속되는 듯 보여도 남북‧북미 사이에 물밑 접촉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으로, 청와대는 내년 초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의 선순환 회로가 재가동 될 수 있다는 낙관적 기대에 방점을 찍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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