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31일, 경남 거제시의 한 국도. 대우조선해양 통근 버스가 추락・전복됐다. 이 사고로 2명이 숨졌고 다수가 크게 다쳤다. 사고로 숨진 2명은 하청 노동자였다. 공교롭진 않았다. 이 버스 탑승자 중 2명을 제외한 59명이 사내 하청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여름휴가 기간이기에 정규직 노동자 상당수가 2주간 휴가를 받고 출근을 하지 않았다.
당시 박점규 장그래살리기 운동본부 대변인은 "연봉 7000만 원을 받는 정규직이 휴가를 떠난 사이, 이들 급여의 절반만 받는 비정규직은 휴가 없이 일을 하다가 변을 당했다"며 "대한민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2017년 5월 1일에는 삼성중공업에서 크레인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일하던 노동자 6명이 사망했고 2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모두 하청업체 노동자였다. 정규직은 노동절에 일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하청, 즉 비정규직이 채웠었다.
지난 11일, 스물네 살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 작업 중 기계장치에 몸이 끼여 사망했다. 그는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설비점검을 하는 하청 노동자였다. 2인1조로 해야 하는 업무를 혼자 하다 사고를 당했다.
'위험의 외주화'. 이제 흔한 말이지만, 없어지지도 않는 말이다. 힘들고 위험한 일은 비정규직에 몰린다. 신분이 보장되고 심지어 노조라는 방패막까지 가진 정규직은 이런 '위험의 외주화'를 방관한다. 혹은 동조한다. 본인들에 닥칠 수 있는 '위험'이기에 이를 대신해줄 '노동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달되고 전달되면서 사라지지 않은 '위험'
작업장 내 위험 요소가 있으면 제거해야 한다. 공정에 문제가 있다면 개선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혼자 일하는 게 위험하다 판단되면, 인력을 보충해야 한다. 과중한 노동 시간이 문제면 마찬가지로 인력을 보강하거나 업무 시간을 재정비해야 한다. 상식이다. 그런데 사고가 계속되도 이런 상식적 조치는 이뤄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비용, 돈이다. 위험 요소를 제거하거나 개선된 공정 시스템을 도입하면 돈이 든다. 인력 보강도 마찬가지다. 이 돈은 기업이 충당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은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좀 더 손쉽고, 돈을 들이지 않고도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까. '하청-파견'이란 마법의 제도다.
노조가 있는 정규직이 작업장의 위험 관련해 문제를 제기하면 기업은 그들에게 관련 업무를 시키지 않는다. 노조와 싸워서 득 될 게 없기도 하거니와 위험한 작업장에 '하청-파견' 노동자를 보내면 간단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우리도 위험하다'고 항의해 봐야 묵살하면 그만이다. 항의의 강도가 세지면, 그들이 속한 하청업체와 계약을 해지하면 깔끔히 문제가 해결된다. 문제를 제기한 '하청-파견' 노동자들은 '합법적'으로 해고된다.
그렇게 '해고'되는 과정을 지켜본 또 다른 '하청-파견' 노동자들은 어떨까. 참고 일하는 법을 배운다. 위험해도 잘리지 않으려면 참고 일해야 한다. 동료가 일하다 다치거나, 혹은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겨야만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위험 요소가 있지만, 그들에겐 비정규직도 있다. 그렇게 위험은 사업장에서 사라지지 않고 전달된다. 해고의 공포가 그들을 위험으로 몰아낸다. 공포는 기업에 매우 유용하다.
하루 5명이 일하다 죽는 한국, 왜 그럴까
이게 우리 사회가 운영되는 방식이다. 시스템이다. 시스템에서 문제가 드러났다. 그런데 고쳐지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은 법률상으로는 처벌 수위가 높다. 그런데 실제 처벌 수위는 별로 높지 않다. 일하다 노동자가 사망하는 경우, 사업주는 최대 10년형까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벌금형으로 끝난다. 그나마도 하청 노동자가 사망하는 경우, 원청 사용자는 처벌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위험을 줄이고 노동자를 더 고용하는 것보다 벌금 몇 푼 내는 게 저렴하다. 책임 져 주겠다는 하청업체도 있으니 든든하다. 차라리 몇 명 죽는 게 더 싸게 먹힌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이후 우리 사회는 대규모로 구조조정을 했고, 사람을 마구 잘라냈다. 그 빈 공간을 비정규직으로 채워나갔다. 약탈적 자본주의자들은 한국의 산업이 투자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고부가가치로 승부하는 것보다는 인건비 절감이나 산재 사고 위험을 외주화 하는 것을 더 바랐다. 쥐어짜기식 경영이 '선'으로 여겨졌다.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목 놓아 외쳤고, 사람 목숨 값을 떨어뜨려 기업 가치를 높였다.
20년이 흘렀다. 이런 시스템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약탈적 자본주의는 '위험의 외주화'를 더욱 세련되게, 최대한 노출되지 않게 운영하는 기법을 연마했다. 하청-파견 제도는 이제 공고한 자본주의의 경전 처럼 돼 버렸다. 사람들은 무관심했거나, 방관적 시선으로 일관했다. 사법부는 솜방망이를 들었다. '위험의 외주화'는 이제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하루 다섯 명이 일하다 죽는 게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정상적인가. 박정희 시대에 노동자는'산업 역군'으로 불렸다. 그들은 '軍'이었고 작업장은 전쟁터였다. 전사자의 희생은 '무명 용사의 묘'로 기리면 그만이었다. 세상은 진보하지 않았다. 교묘해졌을 뿐이다.
그래도 되는지 묻고 싶다. 일하러 가는 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세상은 왜 안녕한 것처럼 보이는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