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0여 년 전부터 야학을 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는 학교를 다니다가 못 다닌 젊은 친구들이 많았지만 요즘은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이 많이 오십니다. 이상하게 아저씨들이나 할아버지는 별로 없습니다.
수많은 사연들과 에피소드들이 매일 생겨나는 곳이 우리 야학입니다. 초등부에는 글을 몰라 여태 까막눈으로 살아 오시다가 며느리한테 글을 모른다는 것이 발각되면 며느리한테 무시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집안에서 아무도 몰래 우리 야학에 오시는 70을 바라보는 할머니도 계십니다. 저희도 항상 며느리한테 안 들키도록 여러 가지 배려를 합니다. 이 할머니는 끝까지 며느리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쓰셨습니다.
가끔은 직장에서 돌아와서 피곤하지만 저를 기다리고 있는 이런 아줌마들을 생각하면 새롭게 힘을 내서 야학으로 가곤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먹고살만 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먹고만 살면 되는 게 아닌 듯 합니다. 문화적으로 소외되고 배움으로부터 격리되어 세월 속에 묻혀진 세대들에게 다시 배움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진정 사람 사는 공동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뜻밖에도 아직 우리나라에는 이처럼 적지 않은 문맹자와 배움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좀 더 이런 분들에게 배려가 있어야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 좀 더 따뜻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야학에서 글을 배우신 두 분 아주머니의 글을 소개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이렇게 훌륭하게 표현하실 수 있는 분들이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겠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글을 쓰신 분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띄어쓰기와 맞춤법만 교정을 보았지 나머지는 대부분 다 아주머니들의 솜씨입니다.
하나. 〈목욕탕 아줌마의 비밀〉
나는 목욕탕에서 매점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목욕탕에 오는 아줌마들한테 이것저것 팔면서 가끔 맛사지를 해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맛사지도 해줍니다.
5년 전 5월 어느날. 텔레비전에서 야학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바로 그곳에 전화를 했습니다. 상록배움터라는 이름의 야학에서 바로 뒷날 와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를 나오고 그 후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오십이 다 된 이 나이에 다시 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려고 하니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직장에서 마감시간이 안 되었는데 나 혼자만 나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리미리 이것저것 정리를 해놓고 사장님께 이야기를 했더니 다행히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비록 저녁에 다니는 야학이지만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는 기분은 정말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학교에 다니면 철부지 학생이 되는가 봅니다.
야학에 가보니 저와 비슷한 아줌마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분위기도 무척 좋고 선생님들도 훌륭하셨습니다. 하지만 막상 수업이 시작되니 애가 탔습니다. 왜냐하면 배우는 과목 모두가 생소하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수업시간을 빼지 않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야말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슨 일이 있어도 빼놓지 않고 다녔습니다. 세월이 가니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얼마간 알아들을 수가 있었읍니다만 아무리 다녀도 수학시간만 되면 머리가 아프고 앞이 캄캄했습니다. 수학시간이 겁나고 열심히 가르쳐주시는 선생님들한테 미안하고 좌우지간 그 시간에는 머리를 처들지 못하고 그저 열심히 쓰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어느날부터는 수학도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1년 뒤 어렵게 중학교 과정 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중학교 검정고시만 붙으면 그만 두자 하던 것이 이번에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아줌마가 고등학교 나왔다고 하면 하늘처럼 우러러 보였던 지난날이 생각났습니다. 나라고 못할 거 뭐 있나 싶어 고등학교 과정에 도전하기로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과정은 중학교 과정보다 열 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다녔습니다. 그저 이날 이때까지 남보다 부지런하고 남들한테 나쁜 일 안 하고 성실 하나로 아이들 키우면서 살아 온 저의 힘은, 알아듣든 모르든 그저 열심히 학교에 다니는 게 공부였습니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시험에 들어 하나둘 다 떠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이까짓 꺼 때려치울까 생각을 하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그동안 졸음을 참으며 공부했던 것이 너무나 아까웠습니다.
9번이나 시험을 봤는데도 계속 떨어졌습니다. 야속하기도 하고 눈물도 나기도 하고 왜 이렇게 열심히 쫒아다니는 데도 공부를 못하고 시험에 붙질 못하는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긴 세월을 죽 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땐가 갑자기 선생님들 말씀이 이해가 되고 머릿속에 조금씩 뭔가가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10번째 시험보는 날, 왠지 이번에는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시험 보러 갈 때마다 옆사람들한테 저는 애 낳으러 간다고 합니다. 진짜 애 낳는 거하고 똑같은 고통이 옵니다 이것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겁니다. 시험 발표 날 드디어 저는 고등학교 졸업 합격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부라는 것이 죽을 때까지 해도 못하는 것이라고 선생님들이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더 욕심이 나서 나도 다른 사람들한테 내가 배운 것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저희 야학에는 초등부가 있어서 글을 모르는 아줌마들이 여러 명 다닙니다. 거기도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저도 가끔 초등부 아줌마들의 글자 연습을 봐줍니다. 그러면서 항상 그 아줌마들한테 내 얘기를 해줍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라고.
학교 못 다닌 것에 포원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상록배움터가 있어서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둘. 〈선생님들께〉
존경스러운 선생님들 !
전 두 아들을 둔 엄마입니다. 사실은 아이들에게 좀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에서 엄마로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 놈이 자기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가 이러이러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하는 겁니다. 어디 자랑거리가 없어서 자기 엄마가 이제야 이런 공부를 하고 있다고 감히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식 친구 놈이 "어머님 검정고시 공부하신다면서요. 대단하십니다!" 이러지 않겠습니까? 난 눈물이 나고 당황스러웠지만 창피한 것도 잊고 솔직히 얘기해 준 아들 놈이 고마워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아 선생님들에게 미안한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지요. 그런데 마음과 생각뿐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하니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습니다. 매일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였습니다.
나이 들어 늙어갈수록 배우고 읽어서 아름다운 할머니로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내 욕심만 채우지 않고 정직하고 정이 많은 늙은이로 남들한테 기억되고 싶습니다.
이번에 십 년 만에 고등학교 과정까지 합격하게 되어 다시 한번 선생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이런 고마운 생각들 오래오래 간직하시고 좋은 일 더더욱 많이 해주시길 바랍니다. 올해 저의 환갑 선물로 이보다 좋은 것은 없는 듯 합니다
말재주도 글재주도 없는 제자가 감사의 뜻으로 이 편지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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