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는 지난해 창사 이래 가장 긴 파업으로 방송의 제작과 운영 역량 그리고 신뢰에 큰 상처를 입었다. 구성원들은 의욕과 열정을 잃고 내부적으로 반목과 갈등, 대립에 휩싸여 조직적 역량은 쇠잔해진 상태다. 공영성은 사라지고 보도 및 프로그램의 수준과 완성도는 퇴행했다.
공정방송을 요구하던 방송인들은 해직과 징계 등으로 제작 현장에서 쫓겨났다. 수모와 실망감으로 방송사를 떠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제작진은 분열과 상처로 인해 제작과 창작의욕을 잃었으며 방송프로그램은 시청자들로부터 외면을 받는다. '뉴스데스크'는 궁여지책으로 시간대를 옮겼지만 추락한 위상을 반영하는 듯 시청률이 바닥을 기고 있다. 잇달아 터지는 크고 작은 방송 사고는 방송사의 혼란과 무기력을 보여준다.
신뢰의 조직 문화는 공영방송 공공성의 보루
비판적인 구성원들을 견제하고 대체할 요량으로 계약직이나 시용직을 많이 뽑았지만, 오랫동안 방송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역량은 결코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업무에 익숙해지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할지 모르지만 한계가 있다. 방송 프로그램은 개인의 역량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단결력과 자긍심의 근원이자 일체감이 만들어내는 신뢰와 조직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신뢰의 조직 문화는 구성원 사이에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열정과 자율성을 만들어내고 방송의 독립성을 지키고자 노력하게 하는 원천이다. 이를 통해 공영방송의 중요한 가치를 공유하고 자부심과 긍지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공영방송이 외부의 어떠한 압력과 유혹에도 흔들리거나 타협하지 않고 공공성을 구현함으로써 국민과 시청자의 신뢰를 만들어내는 구조다.
조직 문화의 붕괴는 곧바로 한국 사회의 중요한 사회적·문화적 자산인 공영방송사 <MBC>의 위상을 추락시켰다. 이 자산은 엄혹한 세월을 견디며 온갖 탄압에도 꿋꿋이 지키고 가꾸어온 것이다. 신뢰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고 돈만 들인다고 만들어지지도 않는 소중한 가치다. 그것이 안에서 허물어져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처가 깊어진 것이다.
이는 공영방송의 양대 축 중 하나가 무너짐을 의미한다. 그동안 때로는 <KBS>가, 때로는 <MBC>가 서로 공영성을 견인했다. 두 방송사는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민주적 여론 형성을 위한 공론장을 만들고 문화와 교양을 풍성하게 하는 터전 노릇을 해왔다. "악화가 양화를 쫓아낸다"는 그레샴(T. Gresham)의 법칙은 방송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MBC> 공영성의 약화는 우리 사회의 방송 공공성에 대한 기대 수준 저하와 <KBS>나 <SBS>의 공적 역할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방송의 정치적 독립은 공정한 방송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다. <MBC>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는 것이 적절하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경영진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임되었다면 임기를 보장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그것은 위임된 직무를 충실하게 했고 남은 기간에도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될 때에나 해당된다. 공영방송은 공정한 보도, 품격 있는 교양, 건강한 오락을 제공하도록 국민이 위탁한 방송사다. 주인인 국민이 위탁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고장 난 공영방송 MBC를 빠른 시간 안에 정상화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것을 고치는 것이 국민이 선출한 정부가 할 일이다.
▲공영방송사 장악 논란은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이어졌다.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대부분의 국민은 새 정부에서 언론 장악 문제로 촛불이 타오르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MBC> 문제 해결의 열쇠는 정부 손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6월 노조가 파업을 풀면 책임지고 <MBC>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새 정부가 출범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진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아직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심각한 상처를 입고 추락하는 공영방송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김재철 사장은 감사원에 의해 고발당한 상태고, 김재우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은 논문 표절 건으로 이사들의 퇴임 요구에 직면해 있다. 조직 구성원으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받지 못하는 수장이 조직을 제대로 이끌 순 없다. 사태 해결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방문진조차 정상적인 업무가 마비되어 있는 상태다. 주주총회 개최나 임원 선임 등 쌓여 있는 업무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정치는 소통과 협의를 통해서 문제를 풀고 합의를 이뤄가는 과정이다.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라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논의를 통해 현재의 꽉 막힌 상태를 풀 수 있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방문진이 매듭을 푸는 고리가 될 수 있다. 방문진이 <MBC> 경영에 대한 관리 및 감독 업무를 행하도록 법에 명시되어 있음에도 방문진 이사회는 해결 방안 마련은 고사하고 진지한 논의조차 못하고 있다.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정치권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방통위에 임면권이 있긴 하지만, 이사들은 분명 국민과 시청자의 대리인이다. 국민의 뜻에 따라 신뢰 받는 공영방송으로 <MBC>를 바로 세우는 책무가 주어졌다. 현재 회의를 열지도 못하고 있는 이사회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난마(亂麻)처럼 얽힌 <MBC> 현안의 실타래를 푸는 첫 단추는 즉시 이사장을 신망 있는 사람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MBC>의 골든 타임은 재깍재깍 지나가고 있다. 공영방송으로서 위상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이 날로 커진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마지막 기회마저 놓친다면 그 책임은 새로 시작된 정부가 짊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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