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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의 실체를 찾아라"

[시민정치시평] 치유를 넘어 가야할 길

휑하게 뚫린 가슴으로 맞이한 2013년도 벌써 1월을 넘기고 며칠 후면 입춘이다. 매섭던 추위도 어느새 누그러질테고, 만물이 다시 살아나듯 우리도 무너진 가슴을 추스르고 새로운 일상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문재인 후보의 대선 찬조연설에 나섰던 정혜신 박사의 울먹이던 말 그대로 지난 18대 대선은 역시나 '목숨'이었나보다. 대선 직후부터 이틀이 멀다하고 들려오는 노동자와 서민들의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 희망을 말하기도 부질없고, 긍정을 말하기도 부끄러운 날들이 아닌가.

사람 목숨만큼 질긴 것이 없다는데, 왜 우리의 시대에는 이렇게 많은 죽음을 목격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루에 43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 사실 '스스로'라는 말은 허구다. 우리는 이제 '자살'이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아무도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벼랑 끝까지 몰려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원치 않게 내딛은 그 한 발이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뿐임을 이제 우리는 뼈와 심장으로 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지 모르겠다. 민주주의든 노동이든 복지든 녹색이든, 이름과 깃발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어떤 이름이든 어떤 깃발이든 상관없을 것 같은 심정이지만, 이제는 빛바랜 낡은 이름과 깃발 앞에서 할 바도 갈 길도 잊었다. 이 막막함이 다시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누구라도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목숨이 아닌 통계치로 남게 되는 그 자리. 우리는 모두 이렇게 마음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다.

'멘붕'의 기원을 찾아

2012년 내내 유행했던 단어인 '멘붕'은 '멘탈이 붕괴한 상태' 즉 거의 정신착란에 가까운 인지적 혼란의 상태를 일컫는다. 누가 시작해서 퍼뜨린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단어가 4.11 총선 이후에 유행을 타게 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4.11 총선으로 마음이 무너져버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명박정부 내내 차마 보지 못할 일들과 차마 듣지 못할 일들을 거의 매일 보고 들어야 했던 사람들일 거다. 그들은 4.11 총선에서 당연히 이명박의 한나라당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고, 큰 표 차이로 민주진보진영의 승리를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와 달랐다. 이후 이어진 통합진보당 사태, 종북 마녀사냥, 마침내 대선 패배까지. 도대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벌어진 이 충격적인 사건들로 스스로를 진보라 불렀던 사람들은 모두 헤어나기 힘든 '멘붕'의 나락에 빠졌다.

그렇다면, '멘붕'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옹호하고, 역사의 진보를 믿었던 사람들만의 심리적 절망 상태였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절반의 '멘붕'이며 절반의 마음만 회복하면 되는 일이다. 과연 그럴까? 지난 18대 대선은 우리가 기억하는 그 어느 대선보다도 살벌하고, 뜨거운 선거였다. 각 진영의 지지자들은 대선의 향방에 거의 목숨이 걸린 듯 매달렸고, 각자는 자신의 선택이 대한민국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세계적 경제 위기에 대한 불안과 경제적 불평등의 고통에서 자유로운 국민은 없었으며,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정치적 마녀사냥 등으로 대한민국은 1년 내내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공포의 배후에는 국가 권력과 야합한 보수언론의 왜곡, 편파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술책과 농간이란 원래 건강한 마음 앞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다. 나치의 선전대원이었던 괴벨스가 만약 평화의 시기에 태어났다면, 그는 천재는커녕 기껏 삼류 사기꾼의 인생을 살다 갔을 것이다. 그를 탁월한 선동가로 만든 것은 그의 재능이 아니라 거짓인 줄 알면서도 간절히 속기를 열망했던 대중들의 불안과 공포였다.

자본과 권력의 힘에 맞서는 공정하고 참된 언론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모두가 선정적이고 얄팍한 연예 기사만을 선호하고, 발 밑의 위험을 보기 보다는 천상의 무지개만을 보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공정한 언론의 공정한 보도에 귀 기울이려는 공정한 마음들이 사라지고 없다면, 모든 옳은 말들은 공중의 공허한 메아리로 흩어지고 말 것이다.

심리학자들 사이에는 제법 유명한 말로 "뱀의 뇌에 말을 걸지 말라"는 문구가 있다. 이 말은 공포와 생존의 본능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설득의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정하고 열린 마음들이 사라진 뱀의 뇌(생존과 공격 본능의 뇌 - 삼부 뇌(The triune brain) 이론으로 인간의 뇌가 진화적으로 다른 시기에 형성된 3 개의 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이론이다. 원시적인 파충류의 뇌, 좀 더 진화된 포유류의 뇌, 그리고 영장류의 뇌가 그것이다. 파충류의 뇌(뱀의 뇌)는 가장 안쪽에 있으며, 투쟁, 도피 반응을 관장한다.)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파시즘의 폭력과 권위주의다. 지금 우리 시대를 파시즘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비유이며, 단어와 개념의 남용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파시즘의 시대 대신 쓸 수 있는 다른 말은 '암울한 시대 Dark Times'다.

'암울한 시대' 또는 '어두운 시대'로 번역되는 이 말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 1956)의 '후손들에게' (1934-38)에 등장하는 시구다. 브레히트가 살았던 '암울한 시대'는 나치의 파시즘 세상이었다. 이 시의 첫 부분만 인용해보자.

1.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없는 이마는
무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웃는 사람은
끔찍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을 따름이다.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곧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한 침묵을 내포하므로
거의 범죄나 다름없으니,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저기 천천히 길을 건너가는 사람은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이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물론, 나는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믿어 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나의 행운이 다하면, 나도 그만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먹고 마셔라! 네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라!
그러나 내가 먹는 것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물이 목마른 자에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느냐?
그런데도 나는 먹고 마신다.

나도 현명해지고 싶다.
옛날 책에는 무엇이 현명한 것인지 씌어져 있다.
세상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덧없는 세월을
두려움없이 보내고
또한 폭력없이 보내고
악을 선으로 갚고
자기의 소망을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망각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을 나는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베르톨트 브레히트 <후손들에게> 中


나치를 피해 덴마크로 망명 중이던 당시 브레히트의 심정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심정과 조금도 다르지가 않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래! 우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한나 아렌트, 에리히 프롬이 살았던 그 '암울한 시대'를 다시 살고 있는 것이구나. 거의 80년 전에 쓰여진 이 시의 시대와 지금 우리의 시대가 그 엄청난 시공간을 사이에 두고도 이처럼 닮은꼴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세계로부터, 사회로부터,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간 단절의 시대를 살고 있는 개인들의 불안감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시대, 국가도 사회도 공동체도 개인들을 돌보지 않는 시대, 개인들은 모두 살벌한 경쟁과 적자생존의 시장으로 내몰리고, 각자는 오로지 자신의 교환가치만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시대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산업혁명이 만든 시장의 질서에 저항하는 사회의 자기보존의 요구가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부르는 힘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무에게도 의존할 수 없고, 저마다 자신의 절벽에 떠밀려 버둥거리는 개인의 불안이 바로 독일의 나치를 부르고, 한국의 박정희를 되살려낸 것이 아닐까.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와 책임의 불안한 얼음판을 벗어나 폭력과 권위주의의 질서 안에서 안식과 위안을 찾는 대중들의 심리를 도덕적 비난이 아닌 인간적인 취약함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묘사하고 있다. 홀로 선 개인의 불안을 피해 위계의 질서를 찾아 떠나는 대중의 집단적 행렬, 그 행렬을 더 큰 공포로 지켜보는 절망이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 '멘붕'의 실체인 것이다.

치유를 넘어, 체화된 민주주의(embodied democracy)로

멘붕이라는 말이 2012년의 대표 단어였다면, 2013년의 서두를 장식하는 단어는 힐링, 즉 치유다. 비타협적 투쟁과 선명한 이념의 깃발이 차지하던 자리에 치유가 등장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집합적 문제해결에서 투쟁과 이념이 아직도 유용한 무기인지에 대한 질문과는 무관하게, 맥없이 무너져 버린 가슴의 상처는 치유 받아야 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어야 한다.

치유의 대표적인 방법은 위로와 공감이다. 위로와 공감은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서로 간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소통이고 언어다. 하지만 저마다의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고 위로와 공감의 마음을 나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도 대한민국의 거리와 고공은 투쟁의 절규로 가득하다. '함께 살자'고 내걸린 현수막 아래 추위보다 매서운 고독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 같아서는 언제까지라도 그들의 곁에 머물며 치유의 실천을 함께 하고 싶다. 하지만 일상의 압력을 뒤로 하고 강정으로, 평택으로, 밀양으로, 부산으로 달려가는 것은 언제까지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나마도 시간을 내어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의 수도 많지가 않다. 생존의 위협은 잔혹하게 목줄을 죄어 오고, 자신의 불안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일상의 자리를 벗어난 치유의 실천은 점점 힘을 잃어갈 것이고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가 아니라 새로운 투쟁일지도 모른다. 거리나 고공에서 외롭게 외치는 비타협적 투쟁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 굳건히 뿌리내린 연대의 투쟁이어야 한다. 고공의 투쟁은 짧지만, 땅 위에 선 일상의 투쟁은 길다. 절박하게 버티어야 할 5년, 그리고 또 5년, 50년, 100년의 더 긴 세월동안 다시는 암울한 시대가 반복되지 않을 탄탄한 삶의 기틀을 만들어야 한다. 한 번의 선거로, 일부 소수의 편법과 왜곡으로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굳건한 마음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실패를 목격하였다. 그것은 우리 시대 '멘붕'의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는 '민주주의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공감과 존중에 의해 완성되는 실험적 지성의 사회적 체현(social embodiment)'라고 정의하였다 (민주주의와 교육, 1916). 이러한 민주주의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마음들 사이에서는 자랄 수 없다.

흔히들 민주주의를 제도와 절차로만 이해하지만, 제도와 절차로서의 민주주의는 형식일 뿐이다. 그 형식을 주조하고, 그 형식 속에 담겨지는 것은 민주주의의 마음이다. 성찰과 합리적 이성과 공감적 포용,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고 민주주의적 삶의 양식을 채우는 내용이다. 신자유주의적 시장의 질서가 만든 불평등의 폭력과 개인에 대한 위협, 파시즘의 권위적 질서가 가져올 자유의 억압, 이 모든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대안은 바로 일상의 자리에 굳건히 뿌리박은 연대의 실천과 협조적 지성이다.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유태인 사상가 아렌트와 프롬이 후세에 남긴 교훈도 바로 그것이었다. 성찰하는 지성과 사랑의 기술, 그것은 성숙과 지혜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지식과 명령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 뿌리 내리고 자라는 몸을 가진 마음(embodied mind)이다. 삶과 앎과 놀이가 유기적인 하나가 되고, 노동과 배움과 나눔이 서로 속에 얽히고 착근되는(embedded) 세상, 삶의 현장에서 협조적 지성을 키우고 함께 즐겁게 살아가는 세상, 그것이 바로 서로에 대해 열려 있고, 서로를 최고의 가치로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세상이다.

일상에 뿌리박은 민주적 실천의 구체적인 형식과 방법에 대해서는, 더 긴 말과 사유와 실천이 필요하겠지만 다음의 기회를 기다리며, 브레히트의 <후손들에게> 마지막 구절로 두서없는 글을 갈무리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었지만
우리 스스로가 친절하지 못했단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정도까지 되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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