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감독은 연세대 국학연구원 이하나 연구교수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영화의 사회적 역할과 공공적 주제'에 관한 이 편지는 연세대 국학연구원 홈페이지에 지난해 12월 30일 게재됐다(<남영동 1985>와 관련해서는 <여기가 지옥…남영동 대공분실을 고발한다> 참조).
정 감독은 이 편지에서 "어느 영화 전공 강의실에서 있었던 <남영동 1985>에 대한 토론을 주도한 교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날 가장 열띤 토론 주제는 한 학생이 제기한 '영화가 이렇게 정치적이어도 되는 것인가'라는 문제였다고 한다. 그 학생은 <남영동 1985>에 담긴 국가 폭력에 대한 고발을 '정치적'이라고 보고 영화란 오락적이거나 미학적 순수성을 지녀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던 모양이다. 교수가 놀란 것은 그 학생의 논리가 아니라 그 학생의 논리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자신이 전해들은 일화를 소개한 뒤 이 같은 우려를 전했다.
정 감독은 "사르트르가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외친 후, 1960년대 한국 문단에서 벌어지는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치열한 논쟁 과정을 흥미 있게 지켜보며 자랐던 나는 '오늘날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어쩌다가 사회참여적 문화예술에 대해 이렇게 왜곡된 시선을 가지게 됐나' 하는 가슴 저미는 순간이었다"고 토로했다.
▲ 정지영 감독(자료 사진). ⓒ프레시안(최형락) |
"수동적 인간이 돼가는 젊은이들…누가 이들을 순치시켰나"
정 감독은 "비판 의식이 사라지면 창의력이 쇠퇴하고 젊은이들의 창의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정체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 젊은이들은 어느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수동적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정 감독은 "누가 이들을 이토록 순치시켰나. 누가 이들에게 부당한 권력에 시비를 거는 것을 불순한 것으로 느끼게 만들었나. 누가 이들에게 사회의 모순 구조에 눈감게 했나. 그들의 탈정치적 성향을 포스트모던적 성향으로 파악하라는 것이냐"고 지적하며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탈정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줄기차게 교육해 온 반사회참여적, 아니 비사회참여적 성향"이라고 주장했다.
정 감독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 문화예술계에 불어닥친 자본의 논리는 사회비판적 시각의 작품들을 서서히 퇴조시켰다. 우리의 시대정신은 자유, 정의, 진리 같은 것이 아니라 아이엠에프(IMF) 탈출, 소비문화, 고도성장 등이어야 했다. 신자유주의가 외치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우리의 선택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내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로 귀결되고 그 선택이 정의가 아니고 불의라 할지라도 윤리적 정당성을 얻는 데 어려움이 없게 됐다"라며 "(이런 상황에서) 영화의 사회적 역할과 공공적 주제의 실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느냐"고 토로했다.
정 감독은 "정치가는 반드시 대중들의 마음과 생각에 부응해야 하지만 영화감독은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되 그들이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자극을 주어야 환영받는다. 그 새로운 자극에는 당연히 사회참여적 요구도 있을 것"이라며 "그래서 아마도 몇몇 영화 감독들은 여전히 사회참여적 작품 활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감독은 이 편지를 쓰게 된 계기와 관련해 "이하나 피디(이하나 연구교수)의 두 번째 편지를 받은 날이 <남영동 1985>가 무려 300관에서 개봉한 날이었다. 헌데 그 영화가 대중을 설득하지 못한 채 스크린 수를 급격히 줄여가더니 이제 5개관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지나간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고 공감하게 하려 했던 제 의도가 잘 먹히지 않은 셈"이라면서도 "물론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다. IPTV, DVD, 공중파 및 케이블TV 등 2, 3차 매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것이라는 기대가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남영동 1985>는 '세계의 양심수'로 불리며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받았던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쓴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김 전 상임고문은 이 수기를 통해 1985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장의사'로 불렸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던 22일간을 기록했다. 군부독재 시절 대한민국의 '자화상'인 셈이다. 평생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김 전 상임고문은 결국 지난 2011년 12월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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