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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문제 해결은 주홍글씨의 제거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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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문제 해결은 주홍글씨의 제거로부터

〈전태일통신 16〉구조의 폭력

노숙인에 대한 시민들과 정부관계자들의 태도 변화를 보면 '동정'의 단계, '동정 쇠약'의 단계, '낙인 부여 및 범죄화'의 단계로 변화해 왔다.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노숙인 문제는 늘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경제위기, 대량실업사태와 맞물려 노숙인의 수가 급증해 사회문제로 급부상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물론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도 노숙인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시기는 1980년을 전후해 국가경제가 위기에 봉착했을 무렵이었다.

1998년 봄, 노숙인들이 급증하면서 종교·시민단체들이 정부보다 앞서 응급구호를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이 시기 언론보도 역시 노숙인들에게 동정적이었다. 일반 시민들이 보기에 노숙인은 동정적으로 비쳐졌고 자극적이며 선정적인 사진과 동영상들이 신문과 텔레비전에 가득 찼다. 이런 대대적인 언론보도와 함께 노숙인를 옹호하는 사회집단(종교 시민단체, NGO)이 출현해 노숙인 보호에 대한 사회적 책임에 입을 모았다. 우리사회 전체가 노숙인에 대한 동정심으로 들끓어 올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하여 노숙인에 대해 주로 쉼터나 무료급식지원 등의 응급서비스 지원을 골자로 하는 정부의 대책이 뒤따른다. 미국의 경우 경제회생에 치중했던 레이건 행정부가 1987년 맥킨니 노숙인지원법을 마지못해 승인한 뒤 노숙인 지원정책에 대한 연방정부의 예산 투입은 1987년 1억8000만 달러에서 1994년 10억8000만 달러로 꾸준히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99년 112억 원이 책정된 이래 매년 비슷한 규모로 예산이 집행되고 있다. 그리고 2004년 7월에는 사회복지사업법령 안에 '노숙자'라는 단어가 삽입돼 정식 사회복지사업의 영역으로 포함됐고 2006년부터는 정부의 예산도 차츰 늘어날 전망이다.

***결국은 정부도, NGO도 손놓게 된 노숙인 문제**

노숙인 문제에 대해 정부가 개입하면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민관부문의 상호의존성 증가로 NGO가 정부의 행정(예산) 지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정부에 대한 NGO의 견제기능이 약화되고 안정성과 예산 사용의 책임성이 강조되면서 노숙인 문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수그러들어 버리고 말앗다.

노숙인 지원사업에서 NGO에 대한 정부의 예산지원은 필요하다. 노숙인 문제의 많은 부분이 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예산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우리 사회의 열악한 기부문화 수준에서 정부의 예산지원과 민간의 기부 비율을 적정하게 맞추는 일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특히 노숙인 지원사업 같은 분야는 민간의 기부가 더욱 안 되는 분야이기도 하다. 예산을 정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다보니 NGO들이 정부의 행정통제로 인해 자율성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심지어는 노숙인 지원 기관장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정부 예산을 많이 따오는 사람이 유능한 것 아니냐는 인식까지 팽배해져 가고 있다.

사실 초창기의 정부 개입은 그 예산 규모가 막대하더라도 기본 전제는 임시적이며 단기적이었다. 노숙인에 대한 지원이란 노숙인의 사정을 조금 나아지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정책입안자들과 시민들은 노숙인 문제가 기대만큼 빨리 줄어들지 않자 초기의 동정심에서 무관심으로, 결국에는 '그들의 게으름이 문제'라는 비난으로 인식을 바꾸게 된다. 노숙인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동정심을 표현했던 사람들이 노숙인 문제가 갈수록 증가하면서 그들을 짜증스러워하고 심지어 분노하기까지 하는 현상을 '동정 쇠약'이라고 한다. 동정쇠약이란, 노숙인 문제가 워낙 광대하니 돕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을 뜻한다.

정부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가며 노숙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막대한 예산 투입에도 불구하고 노숙인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지 않자, 정부 관료들의 태도는 이전과 달리 제재적이고 처벌적인 방식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노숙인들을 범죄시하는 풍조가 만연해지고 그들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노숙하는 것을 막기 시작한다. 외국 같은 경우에는 이전에 허용되던 행위들이 범법행위로 바뀌면서 체포되거나 시설로 유치되는 일이 많아졌고 이는 특히 주요 관광지역을 중심으로 이같은 일이 진행되었다.

서울시가 월드컵 개막을 4개월여 앞두고 최근 발표한 '노숙자 특별보호대책'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태원, 동대문 등 외국인 선호지역 6곳을 노숙금지구역으로 추가하고, 그동안 용산역 광장 등 노숙금지구역 안에서 이뤄졌던 시민·종교단체의 노상 무료급식을 다른 곳이나 실내로 유도한다는 내용이다. 여기까지는 백보 양보해 '손님에게 누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동양 특유의 '접빈 의식'으로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서울서 월드컵경기가 열리는 5월31일, 6월13일, 25일 무렵에는 아예 노숙자를 300명 단위로 묶어 지방 청소년수련원으로 4박 5일간 '특별연수'를 보내겠다는 대책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노숙자는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다.(『국민일보』, 2002.1.24)

물론 서울시의 황당한 발상은 실천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은 그렇게 낮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숙인 문제가 시간이 흐르면서 정책입안자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 잘 보여주는 기사였다.

***'엄한 사랑'으로 노숙인 문제 해결 가능할까?**

1999년대 중후반, 미국 각 주에 생겨난 반노숙인법의 기저에는 '동정쇠약'과 '엄한 사랑(tough love)'의 두 가지 이론이 깔려 있다. 물론 '엄한 사랑'은 미국의 건국 정신과도 맥락이 닿아 있는 가치관이기도 하다. 조지 레이커프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민주당의 '자애로운 어머니' 가치관에 의한 사회정책과 공화당의 '엄한 아버지' 가치관에 의한 사회정책이 항상 대립하고 있다. 공화당의 엄한 아버지 가치관에 의하면 노숙인은 나약, 무능, 게으름, 중독을 상징하는 계층이고 엄한 사랑으로 계도하여 노숙인 스스로가 자신을 도울 수 있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앞서 말한 '엄한 사랑'의 가치관 혹은 태도는 노숙인의 권리보다 지역사회의 권리를 우선하는 입장을 말한다. 이 입장에 따르면 정책입안자들은 노숙인의 시민권보다 대중의 안정에 보다 주안점을 두게 된다.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지역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라면 지역사회 내의 소외된 시민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노숙인 문제를 보면 이들의 시민권보다 지역사회의 권리를 우선시 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회적 낙인**

노숙인들은 노숙생활의 혹독함 이외에 사회로부터 당하는 낙인 때문에 더욱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한다. 이렇듯 환경이 열악한 집단일수록 그 집단이 처한 곤경으로 인해 더욱더 비난받는 경직된 경향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낙인은 신체낙인, 특성낙인, 관습낙인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사회가 노숙인에게 부여하는 낙인은 주로 특성낙인에 해당한다. 드러나는 신체적 결함이나 관습적인 거부감보다는 노숙인에 대해 사람들이 떠올리는 부정적 속성, 즉 고정관념들이 낙인으로 연결된다. 낙인과 비슷한 표현으로 편견이라는 말이 있다. 편견은 타인이 지닌 집단적 속성에 근거하여 그에 대해 주로 부정적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 편견은 사람간 혹은 집단간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노숙인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들은 따지고 보면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있으며 과장된 것이다. 노숙하는 사람들마다 그 성격이 매우 다양한데도 부정적인 고정관념들은 정신질환이나 범죄가능성 등만을 부각시켜 그러한 다양성을 보지 못하게 만들곤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경제적 독립성이다. 경제적 독립성은 시민권을 형성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이러한 경제적 독립성은 '집'을 통해 상징화 된다. 따라서 집이 없는 사람들-노숙인들은 사회적 의존자로서 비시민(non-citizen)으로 전락한다.

또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빈곤을 개인책임성이라는 개념에 포함시켜 공동의 책임성(communal responsibility)을 포기하게 만든다. 미국 공화당의 엄격한 아버지의 가치관 또한 개인의 책임성 강조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는 지역사회 내지 국가의 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가치관이지만 지역사회나 국가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일반시민들에게 노숙인들은 게으른 존재이자 잠재적 범죄 집단이며 궁극적으로는 도시유목사회에서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이런 이유로 노숙인 문제의 근본적인 개선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이런 과정 속에서 경제적으로 독립성을 가지지 못한 노숙인에 대한 낙인이 강화된다. 일반적으로 노숙인은 지역사회라는 울타리 속에 속하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나 있다. 다시 말하면 일탈자라는 낙인이 찍혀 주변부의 삶을 사는 것이다.

노숙인이 안정된 정주공간이자 경제적 독립성, 지역사회 정착 등을 상징하는 집을 확보하는 것을 가로막은 핵심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노숙인에 대한 낙인이다. 그들에 대한 낙인은 노숙상태에서 정규사회에 편입되는 과정 내내 복잡하고도 어려운 장애를 낳게 한다. 또한 이들을 낙인찍는 사회분위기는 문제해결에 대한 사회의 책임성을 약화시키고 경제적 지원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만든다.

***노숙인의 자활의지에 치명적인 적 : 사회적 편견**

노숙인에 대한 지역사회의 부정적 태도는 노숙인 자활에 몇 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우선 무엇보다도 노숙인의 사회적 관계를 제한한다. '노숙인'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집단적인 낙인은 그들에 대한 많은 고정관념들을 편견과 차별로 발전시킨다. 더불어 자신들을 문제집단으로 규정하는 사회의 시선을 피해 기존의 사회관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한 사람이 노숙인으로 전락하는 과정은 가족, 친구, 기타 지역사회의 안전망들을 단계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과정이다. 여기에 사회적 낙인이 덧붙여지면 그나마 지속되던 관계조차 스스로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사회안전망과 결연관계가 해체되면 노숙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지원과 정보가 감소한다. 이 때문에 노숙인들은 주류사회로부터 이탈이 가속화된다. 노숙인들은 대개 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생활하려고 한다. 어느 노숙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결국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날들이 많았는데, 사람들이 많은 서울역을 피해 남산자락을 헤매기도 했다. 혹시 아는 사람들이라도 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산자락을 헤맬 때는 그렇게 서러울 수 없었다. 사람들을 피해 밤에만 서울역에 내려가서 잠을 자고 아침이 오면 서둘러 서울역을 빠져나와서 다시 산 속에서 있고, 무슨 무장공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범법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치 내 자신이 밤에만 움직이는 박쥐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노숙인 P씨)

또한 노숙인들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은 경제활동의 기회를 제한시킨다. 일단 일탈자로 낙인찍히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지고 갈수록 비정규직이나 단순노동으로 구직활동이 협소해진다. 직업이 불안정한 사람들은 대부분 동시에 주거가 불안하여 또 노숙인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큰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렇듯 노숙인이 취업기회를 갖는다는 게 쉽지 않은 현실이다. 어쩌다 일자리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노숙자'라는 낙인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적응 못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물론 취업을 못하는 것도, 취업된 뒤 적응을 못하는 것도 보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서는 노숙인 당사자의 개인적인 결함이나 문제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낙인 이론을 통해 이 문제를 바라보면 취업의 어려움이나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의 밑바탕에는 노숙인에 대한 낙인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식당에서 일을 시작한 9월 이후 모든 것이 좋았는데, 한 가지 걸리는 문제는 내가 희망의집-노숙인 쉼터-에 있었다는 걸 식당주인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하는 거였다. 사람들이 노숙자가 머무는 희망의 집을 안 좋게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취직을 할 때 주소를 묻는 질문에는 나도 모르게 당황하게 되고, 미처 밝히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고민하는 때가 많다. (…) 내 상황을 알게 된 주인은 겉으로는 별 문제 없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예민한 탓일까. 나는 그 뒤로 주인이 나를 곱지 않게 본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느낌만이 아니었다. 손님이 배로 늘었건만 주인은 설렁탕 국물 맛이 이상하다며 나를 볶기 시작했다. (…) 어디에 가나 이런 편견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막상 일을 하러 나가면 기분이 처져서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노숙인 K씨)

노숙인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그들의 자활을 돕는 각종 정책과 프로그램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참여율을 떨어뜨린다. IMF구제금융 직후만 하더라도 이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아픔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여 무료급식, 자원봉사, 후원 등 민간의 관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관심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각종 정책과 프로그램이 민간의 반대에 부딪혀서 무산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예로 들자면, 2004년 노숙인 지원단체인 작은손길이 거리노숙인 이용시설인 드롭인센터(drop in center: 노숙인들이 세탁과 목욕을 할 수 있고 하루 숙식을 할 수 있는 시설)를 개소하려고 몇 개월 동안 노력했으나 많은 건물 주인들이 세입자들을 핑계 삼아 임대해주지 않았다. 7, 8개월 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신설동 지역에 드롭인센터를 개소하게 되었다. 우리의 현실은 지역사회에서 노숙인 지원단체나 시설이 자리 잡는 것이 너무 어렵다.

***'구조의 폭력' 어떻게 벗을까?**

끝으로 노숙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의 가장 큰 폐해는 이들이 '노숙자'라는 이름에 따라붙는 부정적인 속성을 정체성인 양 받아들이고, 이로 인해 노숙이 만성화된다는 것이다. 노숙인들은 노숙을 시작하면서 가족, 친구 등의 사회안전망이 해체되는 경험을 거친다. 이 해체 과정은 기존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잃게 되고, 다른 노숙인들과 결연관계를 재형성하거나 아예 고립된 상태로 만성화되는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진다. 노숙이 만성화된 노숙인일수록 많은 노숙인들을 친구로 삼고 있다. 이렇듯 '노숙문화'로 빠져드는 과정 자체가 노숙의 만성화를 의미한다.

노숙인에 대한 낙인은 그들의 정체성과 사회참여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노숙으로부터 탈출을 가로 막는다. 이런 점에서 낙인(stigma)은 구조의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하루 빨리 이 낙인을 벗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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