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에서 갈라진 와우산 산줄기, 노고산 산줄기, 용산 산줄기가 한강으로 뻗어 중서부 연안에 호수처럼 발달한 서호, 마호, 용호로 입수하는데, 서호에 서강나루, 마호에 마포나루, 용호에 용산나루가 있어 예부터 ‘삼개나루[三浦]’라 불렀습니다.
삼개나루 가는 길은 한양도성의 서소문인 소의문을 나서 만초천을 건너 만리재를 넘어 한강변에 이르러 마포나루 서강나루, 양화진까지 둘러보는 일정입니다.
서울학교 제70강은 2018년 11월 11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숭례문옆 대한상공회의소(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39 상공회의소회관. 02-6050-3114) 정문옆에 모입니다(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서울지하철 2호선 시청역 9번출구 5분거리, 또는 서울지하철 1호선 서울역 3번출구 5분거리입니다.(지도보기)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상공회의소정문옆-한양도성성곽일부-소의문터-순청터-만초천(염천교)-서소문공원(서소문밖사형장)-약현성당-손기정공원-만리재(옛길)-아소정금표-아소정터-점심식사 겸 뒤풀이-담담정터-별영창·읍청루터-마포나루터-토정집터(이지함주거지)-광흥창터/공민왕사당-잠두봉/양화진-망원정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삼개나루 가는 길>에 대해 들어봅니다.
소의문 어디에 있었나?
소의문(昭義門)은 1396년(태조 5) 9월 처음 지었을 때 소덕문이라 하였다가 1744년(영조 20) 문루를 세우면서 이름으로 고쳤는데, 1472년(성종 3) 예종의 비 한씨의 시호가 소덕왕후(昭德王后)라 이를 피해 소의문이라 했다는 통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의문은 한양도성의 서소문으로 일반적인 통행로이면서 남소문인 광희문과 함께 시체를 성 밖으로 옮기는 시구문 역할도 하였습니다.
숭례문에서부터 돈의문(서대문)이 있던 자리까지는 안타깝게도 한양도성의 흔적을 거의 만날 수 없으며 대한상공회의소 옆으로 새롭게 정비된 돌담에서 원래의 성돌 일부를 만나는 것이 전부입니다. 중앙일보 사옥 주차장 인근에서는 그나마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으며 길모퉁이에 ‘소의문터’라는 표지석만 서있을 뿐입니다.
서소문 밖에는 조선시대에 궁궐에 도둑이 들지 못하게 하고 화재를 미리 막기 위해 야간 순찰을 맡아 보던 관아인 순청(巡廳)이 있었습니다. 야간 순찰은 밤 10시경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실시하여, 이를 어기면 체포해서 순청에 구금하여 곤장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세조 때 처음 설치할 때는 좌순청과 우순청을 두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내무아문 산하의 경무청 소관으로 바뀌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순화동이란 지명은 순청이 있는 곳이라 순라골이라 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화천정(和泉町)이라 하여 순라골의 ‘순’과 화천정의 ‘화’ 자를 합쳐 순화동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만초천의 게잡이는 ‘용산팔경’의 하나
만초천(蔓草川)은 인왕산의 서쪽과 목멱산의 남서쪽에서 각각 발원하여 삼각지 인근에서 합쳐진 뒤 한강으로 합류하던 하천으로 넝쿨내, 무악천, 갈월천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산업화 시기까지는 일본식 명칭인 욱천(旭川)으로 개칭되어 불렀으며 특히 만초천의 게잡이는 목은 이색이 지은 <용산팔경> 중의 하나였습니다.
조선시대 만초천에는 일곱 개의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상류로부터 순서대로 소개하겠습니다.
개울물을 건너는 곳에 물이 빠지는 구멍이 연적과도 같게 생겼다는 연적교는 옥천동에, <대동지지>에는 초교라고 기록되어 있는 석교는 교남동 북쪽에, 경교는 경기감영 창고 인근인 서울적십자병원 앞쪽에 있었으며, 경교장의 이름이 이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새로 놓은 돌다리라는 신교는 의주로 1가 남동쪽에, 흙다리[圯] 또는 헌다리라고도 하는 이교는 서소문공원 북쪽에, 달리 염청교·염천교라고도 불리는 염초청교는 중림동 남쪽에, 청파배다리라고도 부르는 주교는 청파동 1가 부근에 있었습니다.
조선 태종 때에는 이 물줄기를 이용하여 용산강까지 들어오는 배를 남대문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군사 1만 명을 동원하여 운하를 건설하려는 논의도 있었으나 조선 창건 후 많은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어 더 이상의 진척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었습니다.
만초천 변에는 마포에서 들어오는 수산물을 주로 거래하던 난장인 칠패시장이 생겨났고, 세곡을 관리하던 선혜청 자리에서 시작된 남대문 조시(朝市)는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으로 발전하였는데, ‘칠패’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을 경비하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삼군문 중 금위영이 담당하던 구역의 일곱 번째 구간이라 그리 불렀습니다.
풍수설 따라 사형장은 도성의 서쪽에
조선시대는 풍수설에 따라 서쪽은 숙살지기(肅殺之氣)가 있다고 보아 대부분의 사형장을 서쪽에 두었는데 양화진(마포구 합정동), 당고개(용산구 신계동, 문배동), 와현(용산구 한강로), 새남터(용산구 이촌동), 서소문 밖(중구 의주로 2가) 등은 모두 서쪽에 있으며 그것도 대체로 서소문을 기준으로 10리 안팎에 있습니다.
특히 서소문 밖이 사형장으로 주목받은 이유는 도성과 붙어있는 데다 인근에 칠패시장이 있어서 본보기의 형장으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인데, 이곳에서는 사형도 집행되었지만 이미 죽은 시신을 조리돌리는 추형을 하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이 사사 당했고 허균도 이곳에서 처형되었으며 홍경래는 관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뒤 그 자리에서 참형을 당했으나 수급이 이곳에 3일간 내걸리고 다시 전국 8도로 보내졌으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김개남은 1895년 1월 전주장대에서 참수 당했으나 수급이 서소문 밖 사거리에 3일간 현수됐다가 농민운동이 일어난 지방에 본보기로 조리돌렸습니다.
1800년대 중반 이후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절에는 새남터 성지, 절두산 성지 등과 더불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으로, 특히 새남터 성지에서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들이 다수 처형된 것과 달리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평신도들이 주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서 103성인 중 44인이 처형되었습니다.
서소문공원은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이 있어 지난번 교황 방한 때 바티칸으로부터 천주교 성지로 인정받아 서울시가 예산을 들여 천주교 순교성지로 탈바꿈하는 공사를 한창 진행 중인데, 이곳은 천주교인을 박해하기 이전인 조선 초기부터 죄인을 참수하는 형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이곳에서 참수된 천주교인과 비교인의 비율이 천주교인 22%, 사회변혁 처형자 36%, 나머지 42%는 일반사범이었습니다.
약현성당, 우리나라 성당 건축의 표본
약현성당은 한국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절충형으로 명동성당보다 6년 먼저 지어졌으며 우리나라 성당 건축의 표본이 되는 건축사적 의미가 매우 높은 건축물입니다.
1892년 9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로 건물이 완성되어 1893년 4월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으며, 1921년에는 남녀를 구분하던 내부 칸막이를 헐어내고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하였고 1976년 원형에 충실한 외벽 수리와 문짝 교체를 하였으며 1998년 화재 후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곳에 성당을 세운 것은 중국 북경에 들어가 서양인 신부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의 집이 이곳과 인접한 곳에 있었고, 신유(1801년), 기해(1839년), 병인(1866년)년의 천주교 수난 때에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가까운 서소문 밖 참수 터에서 순교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손기정공원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를 기념하기 위하여 손기정의 모교인 양정중고교 터에 1987년 9월 18일 조성되었습니다. 손기정 선수가 우승 후 히틀러로부터 받아온 월계수는 잘 자라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고 손기정 기념비, 손기정 동상, 양정중고교 교지 기념비도 건립되어 있습니다.
만리창은 공물로 거두어들인 쌀, 베, 돈의 출납을 맡았던 선혜청의 별창으로 본래 진휼을 실시하던 곳으로 해서와 호남을 구관(句管)하였는데, 선혜청은 1608년(선조 41)에 설립되어 1753년(영조 29) 균역청까지 병합하였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습니다. 지금은 표석만이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역 4번출구 밖 용마루고개 횡단보도에 남아 있습니다.
스스로 조소한다-아소정
아소정은 흥선대원군이 말년을 보낸 별장입니다. 청군에 의존하여 세력을 찾은 명성황후에 의해 운현궁에서 유폐생활을 하던 중 1895년 4월 아끼던 손자 준용이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강화 교동으로 유배형을 받게 되자 분노하여 성안의 운현궁을 떠나 성 밖 별장인 이곳에 머물며 ‘스스로 조소한다(我笑)’는 뜻으로 당호를 아소정이라 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아소정 입구에 표석을 세워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였는데, 부대부인 민씨도 이곳에서 죽었고 1902년 2월 대원군도 아소정에서 서거하자 이곳에서 장사를 지내고 묘소와 사당을 만들었다가 1910년 파주로 이장하였습니다. 1917년 손자 이준용마저 죽자 아소정 자리에 무덤을 만들었다가 1936년 선산인 파주로 이전하였고 다시 남양주로 이장하였습니다.
담담정(淡淡亭)은 조선 초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로, 이곳에 서적 1만 권을 쌓아두고 문관들을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며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안평대군의 세력 확대가 불안하여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황보인을 죽여 정권을 잡고 안평대군까지 처형한 뒤 담담정은 안평대군과 절친이었지만 노선을 달리하여 세조의 공신이 된 신숙주에게 하사하였습니다. 그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별장이 되었다가 정자가 헐린 터에는 마포장을 지었으며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귀국하여 조선호텔에서 며칠 묵다가 한민당이 주선하여 당시 서울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던 장진영의 집으로 옮깁니다. 장진영은 약 150평의 건물 3채 중 1채만을 쓰고, 안채인 54평과 또 다른 1채를 빌려주었는데 이곳을 돈암동 인근에 있다고 하여 돈암장이라 불렀으며 이곳에서 2년 정도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이승만과 미군정간의 불화설이 나돌자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하여 할 수 없이 마포 쪽으로 옮겨 담담정 터에 지은 마포장에 살게 되었는데, 이승만의 세력이 커지자 우익들은 돈을 모아 낙산 아래 이화장을 지어 이승만에게 기증하여 1948년 경무대로 이사할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담담정 터가 신숙주의 것이었고 이화장도 ‘신대’(申臺)라고 불리는 신숙주의 손자 신광한의 집터였습니다.
이승소와 강희맹이 차운한 <담담정십이영(淡淡亭十二詠>은 담담정에서 누릴 수 있는 12곳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마포의 밤비[麻浦夜雨], 밤섬의 저녁안개[栗島晴嵐], 관악산의 봄구름[冠岳春雲], 양화나루의 가을달[楊花秋月], 서호의 배 그림자[西湖帆影], 남교의 기러기 울음소리[南郊雁聲], 여의도의 고운 풀[仍火芳草], 희우정의 저녁햇살[喜雨斜陽], 용산의 고기잡이 불[龍山漁火], 잠두봉의 어사용[蠶嶺樵歌], 눈 내린 반석에서의 낚시[盤磯釣雪], 옹기골의 새벽연기[瓮村薪煙]입니다.
별영창은 훈련도감의 군병들 급료를 지급하는 곳이며, 읍청루는 소속된 별영창고에 딸린 누각입니다. 강가에 있어 명승지로 정조 원년에 지었는데 여기에 와서 놀다가 읊은 정조의 읍청루 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읍청루는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세관감시소가 되고 이어 총세무사이던 영국인 브라운의 별장이 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 별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개화의 물결과 더불어 용산강의 수운도 현대화하여 인천과 용산간의 수상운송이 활발해지자 용산은 한때 외국상사 특히 청일 상인들의 경쟁무대가 되었으며 이때 읍청루에 세관이 설치되었습니다.
삼개나루는 용산나루, 마포나루, 서강나루
삼개나루는 용산나루(용호), 마포나루(마호), 서강나루(서호)를 일컫는데 용산나루와 서강나루는 광흥창, 별영창 등 정부의 창고가 있어 주로 조세곡이 들어오는 반면 마포나루는 사상(私商)인 객주가 자리 잡으면서 일반상업용 곡물과 어물이 드나들던 곳입니다. 물산의 중간집산지이기에 객주가 많았고 상인과 뱃사람이 몰려들어 색주가 번성했으며, 뱃길의 안녕을 빌기 위한 당주(당집)가 많이 들어섰습니다.
마포나루는 조선시대 한강의 대표적인 나루터로, 해상교통의 내륙항의 요충지로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곡물과 서해안에서 생산된 소금, 생선, 새우, 젓갈 등이 많이 거래되었는데 도성의 소금, 생선,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되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선들이 한강을 거슬러 이곳에 와서 장사를 하게 되자 나루터에는 창고를 지어놓고 위탁판매하거나 중개하는 객주, 여각 등이 생겨났습니다. 경강상인들의 활발한 상업 활동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마포나루와 인천을 왕래하는 증기선이 운항되기도 하였습니다.
마포는 용산강 하류에 있는 포구로서 부근에는 소금배가 자주 왕래하여 이를 매매하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염리동이 생겼고 용강동 일대에는 젓갈류와 소금 등의 보관에 필요한 옹기를 구웠던 옹리가 있었으며 이런 연유로 독막, 동막으로도 불렀습니다. 마포의 하류인 서강에는 조선시대에 전라, 충청, 경기의 조운선이 서해를 통해 이곳에 집결하였습니다.
마포사람들은 매년 5월 단오 이전에 마포나루의 안녕과 번영은 물론 마포나루를 드나드는 선박들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굿을 했는데, 육지에서 하는 나루굿(대동제)과 배 안에서 하는 배굿(용왕굿)으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며 가까이에 있는 밤섬에 사는 주민들도 부군님, 삼불제석님, 군웅님 등의 신을 모시고 밤섬과 나루터의 안녕을 기원하였습니다.
밤섬부군당은 1968년 밤섬 폭파와 더불어 밤섬 주민들이 지금의 와우산 기슭으로 이주할 때, 창전동에 새로 지은 것으로 지금도 매년 음력 1월2일 동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시현되고 있는 창전동 부군당제는 옛날 마포나루 굿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으나 전통적인 마포나루 굿은 한국전쟁 중에 사라졌으며 옛 굿의 부활과 재현을 기원하는 주민들에 의해 1991년 6월부터 해마다 실시하고 있습니다.
서강나루는 삼남지방과 서해안으로부터 곡물과 어물이 들어오던 나루터로 달리 서호(西湖)라고도 하였는데, 나루라기보다는 세곡선의 선착장이었습니다. 황해도, 전라도, 충청남도, 경기도의 세곡을 운반하는 조선(漕船)이 모두 이곳에 모였기에 세곡을 잠시 보관하기 위하여 광흥창과 풍저창의 강창(江倉)이 설치되었습니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한양도읍 건설을 마치고 지은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에서 이곳의 풍광을 <서강조박(西江漕泊)>이란 시로 읊었습니다.
四方輻湊西江(사방복주서강) 사방의 선박들 서강으로 밀려들어
拖以龍驤萬斛(타이용양만곡) 우뚝 솟은 큰 배에서 1만 섬은 풀어놓네.
請看紅腐千倉(청간홍부천창) 창고마다 쌓인 쌀을 그대여 한번 보소
爲政在於足食(위정재어족식) 나라 살림은 식량이 넉넉하면 그만이라네.
와우산 남동쪽 서강 연안에 있었던 광흥창
광흥창은 고려 충렬왕 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한 백관의 녹봉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및 그 관할하의 창고로 한양 천도 후 전국 각지의 조운선이 조세 곡을 싣고 집결하는 와우산 남동쪽 서강 연안에 두었습니다.
서강은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하류의 조운이 모이는 곳으로 이곳에 모인 세곡을 상수동의 점검청(點檢廳), 신정동의 공세청(供稅廳)을 거쳐 보원천을 거슬러 올라와 광흥창에 입고시켰는데 이런 이유로 이곳에 많은 관리와 가솔들이 모여 살아 ‘서강서반(西江西班)’이란 말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광흥창은 1405년(태종 5) 풍저창, 공정고, 제용사 등과 함께 호조의 속사로 편제되었으며 풍저창과 함께 국가재정운영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조선 건국 직후부터 삼사의 회계 출납 대상이었고 사헌부의 감찰을 받았습니다. 1467년(세조 12) 본창(本倉)과 강창(江倉)이 따로 설치되었던 것을 본창을 강창에 합치고, 당상관의 녹봉을 강창에서 지급하게 하였으며 1470년(성종 1) 강창의 규모가 작아 강창을 혁파하고 광흥창에 통합시켰습니다.
녹봉은 초기에는 매년 1월, 4월, 7월, 10월의 네 차례 지급하였으나 1701년(숙종 28)부터는 매월 지급하였는데 1721년(경종 1) 개정된 월봉에 따르면 정1품은 쌀 2섬8말과 콩 1섬5말, 종9품은 쌀 10말과 콩 5말의 차등을 두었으며,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발급한 지급의뢰서를 가지고 관원이 직접 창고에서 받아갔으나 1896년(고종 33)에 폐지되었습니다.
토정이 한강변에 흙집 짓고 후학 가르치던 곳
토정 집터는 이지함이 한강변에 흙집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정종의 증손 이정랑의 딸과 1573년 결혼하여 장인의 집이 있던 마포에 신혼살림을 차리면서 이곳에 터를 잡습니다.
이지함은 본관이 한산. 호는 수산(水山), 토정(土亭). 시호 문강(文康)입니다.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숙부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에게 글을 배우다가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에도 해박하였습니다.
토정은 서경덕, 조식, 이이, 성혼, 정철, 이황, 정렴, 박지화, 남사고 등과 스승으로, 학우로, 교류하였는데, 제자 조헌이 토정의 예지능력을 사대부들에게 인식시켜 사대부 추천으로 포천과 아산의 군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1573년 6품직을 제수 받아 포천현감이 되었으나 다음 해 사직하였고 1578년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토정의 제자는 송익필, 서기. 서치무, 김순종과 20대 신진사류인 이항복, 한준겸, 민인백, 이덕형 등이 있으며 그 중 송익필 문하에 김장생, 김집이 있습니다. 토정에 대한 평가는 대단하였는데 율곡 이이는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 했고 조식은 도연명의 시에 나오는 “동방의 한 선비”로 칭송했으며 우암 송시열은 토정을 이이, 성혼과 함께 3명의 스승 중 1명으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일생이 순탄치 못했는데 맏아들 산두는 요절, 둘째 산휘는 지함의 시묘살이를 하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셋째 산룡은 12살 때 역질로 사망, 후취소생 산겸은 조헌의 휘하에서 의병장을 지냈으나 선조의 의병견제에 역모혐의로 옥사하였습니다.
토정은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아산의 인산서원, 보은의 화암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문집으로는 <토정유고>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민왕사당은 조선 초 서강 일대에 양곡 보관창고를 지으려 할 때 동네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이곳에 당을 짓고 매년 제사 지낼 것을 계시한 데 따라 그를 기리는 사당을 지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당 건물은 전면이 3칸인 데 비해 2칸인 것이 특징으로 사당 안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 최영 장군, 왕자, 공주, 옹주의 초상을 모셨습니다.
천주교 성지 된 잠두봉 또는 절두산
잠두봉은 양화나루 옆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로 모양이 누에의 머리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달리 용두봉로 불렀습니다.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 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으로 풍광이 아름다워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유람선을 띄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양화나루는 한양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도로 가는 중요한 길이었으며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고, 전국에서 세곡이 조운선에 실려 올라오는 항구로서 농산물의 유통을 담당하는 곳이었으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한강을 거슬러 온 프랑스함대에 대적하기 위해 방어기지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병인박해 당시 흥선대원군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움과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이곳에서 참수형에 처했는데 이때부터 달리 절두산(切頭山)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당시 대원군은 천주교도들의 처형지가 이전에는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행해졌지만 병인양요 이후에는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강력히 나타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순교정신을 현양하가 위해 이 지역을 매입하여 성지로 조성하였고, 병인박해 100주년이 되던 1967년 성당과 박물관이 준공되었습니다. 성당 내에는 한국순교성인 27위의 유해와 무명 순교자 1위의 유해가 모셔진 성인 유해실이 있습니다.
망원정(望遠亭)은 1424년(세종 6) 태종의 2남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별서로 지은 것인데 이듬해 세종이 농정을 살피러 왔다가 이곳에 들렀을 때 마침 단비가 내려 희우정(喜雨亭)이라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1484년(성종 15)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소유로 바뀌면서 희우정을 대폭 수리하고 ‘경치를 멀리 내다볼 수 있다’는 뜻에서 망원정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성종은 정기적으로 농정을 살피거나 명사들과 시와 술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이용했고 명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장으로 이용하였습니다. 1506년(연산군 12) 1천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수려정(秀麗亭)으로 개칭하였으나 그해 9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공사는 중단되고 다시 망원정으로 복칭되어 원래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서쪽에 있는 망원정은 동쪽에 있는 화양정과 함께 농사상황을 살피는 곳이기도 하고 한강에서 진행되는 군사훈련, 수전(水戰)을 관람하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장갑,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참가비,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서울학교'를 찾으시면 11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이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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