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마감됐습니다^^
삽상한 초가을,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의 9월 제59강은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이며 남한에서는 드물게 고구려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춘천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59강은 2018년 9월 30일(일요일. 추석연휴를 피해 9월 다섯째 일요일입니다!)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9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청평사지-서면(신숭겸묘역/고구려고분/월송리3층석탑/서상리3층석탑)-신북읍(신매리석실고분/천전리지석묘군)-춘천시(봉의산성/소양정/춘천향교/근화동당간지주/7층석탑)-점심식사 겸 뒤풀이-국립춘천박물관-김정은고택-서울의 순입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59강 답사지인 <춘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명산으로 둘러싸인 춘천분지
춘천의 지형(地形)은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며 형성된 분지(盆地)로 그 중심부에는 춘천 지역의 중요한 수자원인 북한강과 소양강의 두 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춘천의 산지(山地)는 북쪽으로 사명산, 죽엽산, 부용산, 용화산이 오봉산지를 이루고, 서쪽에는 응봉, 촛대봉, 가덕산, 북배산, 계관산, 삼악산이 삼악산지를 이루며, 동남쪽에는 가리산, 대룡산, 연엽산, 구절산이 대룡산지를 이루고, 서남쪽에는 검봉산, 고깔봉, 좌방산이 봉화산지를 비교적 낮게 형성하고 있습니다.
춘천분지 안에는 의암호를 중심으로 북쪽에 우두산, 남쪽에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과 국사봉, 서쪽에는 장군봉이 있습니다.
우두산(牛頭山, 133m)은 넓은 우두벌 평지에 솟아있는 일종의 고립 구릉으로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붙여졌고, 춘천의 옛 이름이 산 이름을 따서 우두라고 한 때도 있습니다. 우두산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우두벌, 동쪽에는 샘밭이 넓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으로 모진강(북한강), 동쪽으로는 소양강이 흐르는데, 산 위에선 그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천하 명당으로, 정상에는 충렬탑과 1938년에 옮겨놓은 조양루가 있고, 우두사란 절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봉의산(鳳儀山, 302m)은 춘천시 중심가 북쪽에 위치한 춘천의 진산으로, 산세가 수려하고 산 정상부에는 봉수대와 고려시대 이전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석성이 있으며, 산 중턱에는 혈거지 및 고분이 발견되어 고대 맥국(貊國)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춘천분지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어서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에 알맞은 곳이어서 고려 고종 때인 1217년 거란이 쳐들어왔을 때, 몽고가 네 번째로 침략했던 1253년, 임진왜란 때,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큰 싸움이 벌어진 격전지입니다.
국사봉(國師峰, 203m)은 1919년 1월에 고종이 승하하자 김영하를 중심으로 고을 사람 2백~3백 명이 정상에 태극단(太極壇)을 쌓고 소나무 아홉 그루를 심은 후 망제(望祭)를 지낸 곳입니다. 국장과 소상, 대상을 치를 때는 고을의 인사들이 통곡하면서 조문(弔文)과 시를 지었는데 그중 열여섯 분의 시가 1993년에 건립한 ‘국사봉망제탑’에 새겨져 있는데 김영하 선생의 시를 소개합니다.
하늘을 부르며 임금께 곡하니 (號天倚斗哭)
오백 년 조선의 역사가 눈물 짓고 (五百餘年淚)
삼천리 온 나라가 눈물 뿌리자 (一灑三千疆)
귀신도 함께 눈물 흘리는구나 (鬼神亦爲淚)
김영하는 75세인 1953년, 춘천의 산천과 초목, 누대(樓臺), 형승(形勝), 풍토, 인물을 기록한 춘천의 인문지리지인 <수춘지(壽春誌)>를 편찬하였습니다.
장군봉(將軍峰)은 대체로 부근에서 장군이 태어났거나, 장군의 묘지나 사당이 있거나, 장군과 연관된 전설이 있는 산봉우리를 일컫는데, 이곳에서 한백록 장군이 태어났고 신숭겸 장군의 묘지와 사당이 있습니다.
또한 장군봉 아래에 있는 서면은 박사마을로 유명한데, 전북 임실군 삼계면 박사골,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과 함께 3대 박사마을로 꼽힙니다. 2천 가구, 4천 명 정도의 인구가 사는 작은 면 단위에 박사가 무려 155명(2018년 5월 현재)이나 배출해 평균 열세 집에 한 집 꼴로 박사가 나왔으니 단위 인구 당 박사 수로는 전국 최고입니다.
북한강과 소양강의 합수지점
춘천의 하천(河川)은 분지를 중심으로 북동쪽에서 소양강, 북서쪽에서 북한강이 흘러 분지 안에서 합류하여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홍천군과의 경계를 따라 서쪽으로 흐르는 홍천강과 합류하여 북한강을 이룹니다.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북한강 본류와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소양강은 춘천분지의 중심부에서 만나 하류로 흘러가는데, 북한강 유역에는 지촌천, 지암천, 월송천, 금산천 등 작은 물줄기가 유입되고, 소양강 유역에는 추곡천, 부귀천, 지내천, 만천천, 공지천 등의 작은 물줄기가 유입됩니다.
백운산에서 발원한 지촌천은 춘천호로, 북배산에서 발원한 덕두원천은 의암호로, 청평산에서 발원한 청평천은 소양호로, 매봉에서 발원한 공지천은 의암호로, 갑둔치에서 발원한 후평천은 후평평야를 형성하고 소양강으로, 봉화산에서 발원한 서천은 북한강으로 흘러듭니다.
북한강과 소양강 사이에 형성된 우두평야와 샘밭 등은 기름진 충적지이고 댐 건설로 청평호, 춘천호, 의암호, 소양호 등의 호수가 형성되었는데 이에 따라 청평호에 남이섬, 의암호에 위도, 중도, 붕어섬 등 하중도가 발달하였습니다.
▲오봉산에 둘러싸인 청평사지에는 보물 제164호 회전문이 남아 있다.Ⓒ춘천시
춘천은 맥국(貊國)의 고도
춘천의 역사는 맥국(貊國)으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춘천은 옛날 맥국의 고도였고, 신라시대에는 637년(선덕여왕 6) 군주를 두고 우수주라 불렀으며 673년(문무왕 13) 우수주를 수약주로, 757년(경덕왕 16) 삭주로 되었다가 뒤에 광해주로 개편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40년(태조 23) 춘주로 개편하였으며, 995년(성종 14) 단련사를 두어 안변도호부에 예속시켰습니다. 그러나 길이 험난하여 왕래하기가 곤란하였기 때문에 1203년(선종 6) 최충헌이 안양도호부로 승격시켜 안변도호부와 분리하였으나, 같은 해 다시 지춘주사로 강등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3) 현재의 이름인 춘천으로 개편하여 군으로 하였다가 1415년(태종 15)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27년(인조 5) 도호부를 없애고 방어사 및 포토사를 두었다가 1747년(영조 23)에 방어사가 철원으로 옮겨감에 따라 부사 겸 좌영을 두었고, 1755년(영조 31)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64년(영조 40) 다시 도호부가 되었습니다.
1888년(고종 25)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경기에 예속되었고, 당시 춘천유수 민두호가 왕명으로 현재 강원도청 자리에 이궁을 건축하여 조정이 위급할 때 피난처로 정하였습니다. 1895년(고종 32) 종전의 8도를 폐지하고 23개부 설치로 강원도에는 춘천부(13개군)와 강릉부(9개군)로 개편하고, 1896년 23부제가 13도제로 개정되면서 관찰부를 도청으로 개편하였고, 춘천군이 되어 1읍, 10면, 108리를 관할하다가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춘천시로 되었습니다.
춘천에는 청동기시대의 분묘 유적인 지석묘군이 남아 있습니다.
천전리 지석묘군은 신북읍 천전리(샘밭)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분묘 유적으로 소양강변에 한 단 높게 퇴적된 사질토지 위에 고인돌, 돌무지무덤 등의 무덤 군이 강과 나란히 분포되어 있습니다. 고인돌은 모두 4기가 발굴되었는데 2기는 북방식이고 2기는 남방식이며, 고인돌 중 제2호 고인돌은 특이하게 주위에 돌무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유적의 보고
춘천에는 남한에서는 보기 드물게 고구려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방동리 고구려고분은 고구려시대의 옛 봉토무덤으로 2기가 전해지는데 고구려 무덤의 후기 양식이 지방화된 형태로, 춘천지방이 신라가 북상하기 이전인 6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영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무덤 내부는 크고 작은 깬 돌을 포개서 만든 돌방무덤(석실묘)이고, 외부의 봉토는 거의 유실되었습니다.
신매리 석실고분은 고구려 시대의 석실고분으로 1982년 3월 고분이 있는 신매지구 농경지 정리작업 중에 고분의 천장에 놓였던 뚜껑돌〔蓋石〕이 밀려남으로써 알려졌습니다. 규모는 주실의 길이가 190㎝, 너비 138㎝, 최대 높이 130㎝이고 연도는 길이 200㎝, 너비 80㎝, 높이 90㎝로, 고분 내에서는 유물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으나 남녀 두 사람의 뼈가 발견된 합장묘입니다.
강원도 춘성 지역에서 고구려형식을 갖춘 모줄임식천장〔抹角式天障〕의 석실분의 규모와 내부가 밝혀진 것은 이 고분이 최초이며 내부의 바닥과 시상대(屍床臺)가 회(灰) 다짐으로 처리된 것도 처음 밝혀졌습니다. 이 고분은 고구려 단실분(單室墳)의 양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음을 볼 때, 축조 시기는 적어도 6세기 중반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으며 지방의 한 호족 무덤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춘천에는 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불교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한송사(寒松寺) 석조보살좌상은 원래 강릉시 한송사 절터에 있던 보살상인데, 1912년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되돌려 받았으며 국보 제12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흰 대리석으로 만든 보살상은 머리에는 매우 특이한 원통형 보관을 쓰고 이마에 커다란 백호 자국이 남아 있고 목에는 커다란 목걸이를 착용하였으며, 양 어깨를 여러 번 휘감은 천의(天衣)는 그 끝자락을 왼쪽 어깨에서 매듭지었는데 이는 다른 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정적인 요소입니다.
강원도 지방문화의 독창성
지금의 강원도 지역은 통일신라시대 이후부터 명주 지방으로 불리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왔던 곳입니다. 고려시대에 와서 이 지역 문화의 독창성은 절정에 이르며 이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높은 원통형 보관을 쓴 불상인데,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 보살상, 강릉 신복사터 보살상 등이 이러한 양식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근화동 당간지주는 꾸밈새라곤 전혀 없이 소박한 모습의 간결한 지주가 2단의 높직한 기단 위에 동서로 마주 서 있습니다. 예전에 이 일대에 꽤 큰 절이 있었다고 하나 절은 자취도 없고 절터에는 석등의 대석으로 짐작되는 복련을 예쁘게 두른 석물이 남아 있습니다. 간대석에 조각된 안상과 연꽃무늬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76호입니다.
춘천 7층석탑은 소양로에 있는 석탑으로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륜부가 손실되었고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많이 파손된 상태이며 연판의 배치가 모서리에 이를수록 약간 기우는 형이지만 힘이 있어 보이는 게 고려시대 연화문 배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물 제77호입니다.
서상리 3층석탑은 달리 양화사지(楊花寺址) 3층석탑으로도 불리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은 2장의 판석으로 지대석을 이루고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돌 하나로 되어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남아 있습니다.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일직선에 가깝게 줄어드는 체감율(遞減率)과 큰 돌을 통째로 다듬어 옥신과 옥개를 하나로 조각한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탑으로 보입니다.
월송리 3층석탑은 조면사지(造麵寺址)로 전해지는 곳에 남아있는 탑으로, 주변에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절터였음을 알려주나 지금은 석탑만이 민가 골목길에 서 있는데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봉의산성, 신라의 주요 거점성
춘천에는 읍치구역의 유적이 적게나마 전해지고 있습니다.
봉의산성(鳳儀山城)은 춘천의 진산(鎭山) 봉의산에 있는 고대 산성으로 삼국시대 신라산성의 축성기법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산성내 건물지에서 6세기 후반경의 신라토기들이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춘천의 우두산성(牛頭山城)과 함께 신라의 춘천 지역 진출 시기에 전략적 주요 거점성으로 운영되었다가 통일기에는 삭주(朔州, 지금의 춘천)의 중심 치소성(治所城)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벽의 길이는 1,240m, 높이는 5∼6m 내외입니다.
위봉문은 1646년(인조 24) 춘천부사로 있던 엄황이 문소각이라는 건물을 지을 때 함께 세운 것으로, 문소각의 내부 출입문이었던 것을 1890년(고종 27) 유수 민두호가 왕명으로 문소각을 확장하여 조정이 위험에 처했을 때 임금의 피난처인 이궁으로 고쳐 지었습니다. 그후 임금이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1619년 문소각에 화재가 발생하여 위봉문과 문루였던 조양루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으며, 위봉문은 이후 현재의 도청 뒤편으로 이전되어 문으로 사용되다가 1972년에 지금의 위치를 옮겼습니다.
조양루(朝陽樓)는 1646년(인조 24)에 춘천부사 엄황이 건립했던 문소각의 문루였는데 1908년(순종 2) 문루만 지금의 우두산으로 이전하였고, 문소각은 1916년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누각은 우두산 꼭대기의 소슬뫼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누마루에 올라서면 춘천호로 흘러드는 소양강의 맑은 물줄기와 함께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 중턱에 자리잡은 소양정이 멀리 바라보입니다.
소양정(昭陽亭)은 봉의산 기슭에 있는 삼국시대의 정자로, 원래는 지금보다 아래쪽인 소양강 남안에 있었으나 잦은 홍수로 유실되어 위로 올렸으며, 소양강과 봉의산 사이의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지형이라 이요루(二樂樓)라 부르던 것을 순종 때 부사 윤왕국이 소양정이라 고쳐 불렀습니다.
춘천향교는 조선 초기에 창설된 교육기관으로 전학후묘의 배치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배향공간에는 대성전과 동무와 서무를 설치하였고 교육공간에는 명륜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 및 장수루를 설치하였습니다.
김정은 고택은 영서 중부지방의 전통적인 기와집으로 ㄱ자 모양의 안채와 ㄴ자 모양의 행랑채가 합하여 전체적으로 ㄷ자형을 이루고, 이곳의 지형이 솥의 발과 흡사하여 그 부락이름을 따서 ‘솥바리 큰기와집’이라고도 불립니다.
안채는 팔작지붕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건넌방, 우측으로 윗방, 안방과 부엌이 직각으로 꺾여서 배치되어 있고, 특이하게도 대청과 건넛방 앞쪽에 일반가옥에서는 드물게 3개의 팔각초석 위에 원형의 나무기둥을 세우고 함석으로 지붕 끝에 잇대어 햇빛가리개를 설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양식을 취하는 건물은 강원도에서 이곳과 강릉 선교장의 열화당뿐입니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묘에 얽힌 사연
춘천에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묘와 현종의 장인 김청풍 부원군묘, 임진왜란 때 장군 한백록묘 그리고 의병장 유인석묘가 있습니다.
신숭겸묘역은 한국 4대 명당지의 하나로 손꼽히는데, 사당인 장절사(壯節祠)와 신도비가 있으며 비문은 김조순이 짓고 신위가 썼으며 좌의정 서매수가 전(篆)하였고, 그외 4동의 재실(齋室)과 최근에 건립한 기념관이 있습니다.
신숭겸은 본관은 평산으로 평산신씨의 시조이며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나 후에 춘천으로 이주하였습니다. 918년에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개국벽상공신(高麗開國壁上功臣)이 되었습니다.
묘역에 봉분 3기(基)가 있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신숭겸은 대구 공산(公山)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하여 왕건이 위험에 처하자 왕건 옷으로 갈아입고 수레를 타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는데, 후백제군은 그가 왕건인 줄 알고 그의 머리를 베어갔으므로 왕건이 그의 두상(頭像)을 금으로 제작하여 시신에 붙여 매장하였다고 하며, 당시 도굴의 위험에 대비하여 봉분을 세 개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김청풍부원군묘역은 김육의 아들이며 현종의 장인인 충익공 김우명의 묘역으로, 이곳에는 외손이 되는 숙종의 친필 묘비가 있고 망주석, 문인석 한 쌍식과 석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으며, 도내에서 일반인 묘로는 유일하게 둥근 돌(월석)이 박힌 묘 담장이 둘러져 있습니다.
한백록의 묘는 최근에 세운 비석과 상석, 망주석 등이 있고 묘의 왼쪽에는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는데 1657년(효종 8)에 세운 이 묘갈은 두 동강난 것을 다시 붙여 세운 것입니다. 묘의 입구 쪽에 신도비가 있고 정문(旌門)은 묘역에서 서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사당과 함께 있습니다. 한백록은 임진왜란 때 옥포해전과 합포해전 등에서 활약하였으나 미조항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유인석묘역은 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장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묘를 중심으로 의암기념관, 영정각과 충효지, 정자, 추모광장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말의 위정척사론자이며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은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났으며 당대의 거유인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김평묵과 유중교로부터 존화양이사상(尊華攘夷思想)을 익혔습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운동을 시작하여 크게 활약하였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모두 흩어지게 되어 1908년 해외로 망명한 후 1910년 6월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 의군(義軍)을 결성하여 도총재로 추대되었습니다.
오봉산에 둘러싸인 청평사지
청평사지는 뒤에는 오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앞에는 계곡이 흐르는데 973년(광종 24) 승려 영현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원래 이름은 백암선원으로 이후 보현원, 문수원으로 불려오다가 조선 명종 때 보우대사가 절을 크게 중건하고 이름을 청평사라 개칭하였습니다. 절터에는 회전문(보물 제164호), 고려시대의 3층석탑(일명 공주탑), 환적당 승탑 외 2기의 승탑이 있고, 오도송이라 불리는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계단이나 축대 등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9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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