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 언니는 손님이 없으면 쉬다 오라고 저를 위층으로 올려 보냈어요. 난 일하러 왔는데, 지시에 따라 쉬고 와야 하는 거죠. 물론 그 '휴식 시간'의 시급은 내 월급에서 빠져나갔죠." (18·여·패스트푸드점)
"점심 식사요? 매일 똑같은 거 먹어요. (매니저가) 우리 같은 알바생들은 와퍼주니어 먹는 거라고. 그러다가 한 6개월 일하고 나니까 치킨버거를 먹을 수 있었어요. 매니저나 점장님은 골라 먹을 수도 있고, 만들어 먹을 수도 있고. 좀 오래된 게 있거든요. 지나서 팔 수 없는 걸 먹거나, 아니면 와퍼주니어를 먹거나." (19·여·패스트푸드점)
'88만 원 세대'가 청년 실업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오늘의 20대를 표현하는 말이라면, 88만 원의 일자리조차 부럽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노동 시장에 나와 여러 '알바'를 전전하지만,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휴식 시간조차 없는 이들은 '청소년 노동자'. 사실상 노동 인권의 사각지대에 몰인 이 청소년들은 스스로를 '밑바닥 노동자'로 불렀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는 27일 오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09 대한민국, 10대 밑바닥 노동의 현실'이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고,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는 전국의 10대 1087명을 대상으로 한 노동인권 실태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는 27일 오전 '청소년 노동자의 노동인권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프레시안 |
장시간 '헐값 노동'의 진실…"휴식? 당연히 없죠"
이날 공개된 청소년들의 '인권 성적표'는 초라했다. 아르바이트에 종사하는 청소년들은 대부분 장시간 노동 속에서 폭언과 폭행, 성폭력에 시달리는 것으로 드러났다.
네트워크가 올해 10월부터 한 달간 전국 1087명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하루 평균 6시간 넘게 일하는 청소년이 481명으로 44.3퍼센트에 달했다. 이날 발제를 맡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부설 민주노무법인 이수정 노무사는 "일반의 인식과 달리 청소년 아르바이트가 장시간·장기간 업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방과 후에 바로 아르바이트 현장으로 달려가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는 청소년들의 건강권과 학습권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근로기준법이 제한하고 있는 야간 노동 또한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근로기준법은 '15세 이상 18세 미만인 자의 근로 시간은 1일에 7시간, 1주일에 40시간을 초과하지 못한다. 다만 당사자 사이의 합의에 따라 1일에 1시간, 1주일에 6시간을 한도로 연장할 수 있다'(69조)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이 같은 규제는 청소년들의 노동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대부분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야간 노동은 매니저나 점장의 일방적인 지시로 이뤄졌다.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이윤지(가명·18·여) 학생은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보통 출근은 5시, 퇴근은 11시다. 그런데 손님이 많으면 새벽 2시까지 일을 하는 날도 많았다"고 말했다.
노동 시간은 길었지만, 휴식 시간은 짧거나 없었다. 휴식 시간이 따로 없다고 대답한 청소년이 62퍼센트에 달했고, 휴식 시간은 있어도 휴게실이 따로 없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고 응답한 청소년도 62.8퍼센트에 이르렀다.
"배달이 없을 때도 절대 못 앉게 해요. 사장님이 본다고 앉지 말라고 하고. 술 채우는 거랑 젓가락 채워놓기 이런 거 시키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요." (18·남·보쌈집 배달)
"휴일이 따로 안 정해져 있어요. 쉬고 싶을 때는 다른 사람을 내가 구해 와야 돼요. 못 구하면 못 쉬죠." (18·남·치킨집 배달)
청소년 34%, 최저임금 못 받아…시간 도둑질, '꺾기' 관행도 여전
2009년 법정 최저임금인 4000원을 밑도는 시급을 받았다고 응답한 비율도 34퍼센트에 달했다. 이윤지 학생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인 현재까지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고 있는데, 현재 시급은 3800원 정도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노동부가 2009년 여름방학 동안 전국 807개 사업장을 근로 감독한 결과 '최저임금 이하를 지급한 사례가 28건으로 1.3퍼센트'라고 발표한 결과와 큰 차이를 보였다.
이수정 노무사는 노동부 근로감독 결과와 실제 실태가 차이를 보이는 이유에 대해 "근로 감독 과정에서 청소년 노동자를 직접 조사하지 않고, 사업주를 대상으로 실태 파악이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노무사는 또 "근로 감독 대상 사업장이 대체로 임금 대장과 근로계약서를 갖추고 있는 등, 감독 자체가 용이한 사업장 위주로 진행된다"며 "청소년 노동자들이 정작 가장 많이 일하고 있는 10인 미만의 사업장에 대한 근로감독은 잘 진행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임금을 적게 주기 위한 부당노동행위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청소년들을 주로 고용하는 패스트푸드점의 경우, 손님이 많지 않은 시간에 임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로 휴식을 부여하는, 이른바 '꺾기' 관행이 빈번했다.
"사람이 조금 많을 때는 30분 정도 쉬고, 없거나 한가할 때는 1시간 정도 쉬고…. 매니저님이 30분 쉬고 와라, 1시간 쉬고 와라, 이런 식으로 말씀하세요. 휴식 시간은 돈을 안줘요. 같은 건물 안에 똑같이 있는 건데 대기하는 시간도 시급으로 쳐주지, 그렇게 생각했죠." (18·여·패스트푸드점)
다양한 형태의 '임금 갈취' 사례도 있었다. 이윤지 학생은 "예전에 주유소에서 일할 때 시급이 3800원이었는데, 하루 마감을 할 때마다 잔고가 비거나 계산을 잘못하면 그걸 다 월급에서 깎았다"고 말했다.
역시 주유소에서 일하는 한 학생은 "한번은 마감 때 계산하다 보니까 17만 원이 비었다. 누가 사고친 것인지도 몰랐는데, 결국 일하는 사람들 월급에서 각각 5만6000원 씩 깎았다"고 증언했다.
인권 '사각지대' 내몰린 청소년 노동자…"사장 성희롱에 아무 말 못했다"
인권 침해 문제도 심각했다. 사업주나 관리자로부터 폭행을 당하거나 욕설을 당한 사례가 빈번했고, 심지어는 성폭행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조사 결과, 청소년 10명 중 약 3명은 아르바이트 중 폭언·폭행·성폭력 등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언어 폭력을 당한 청소년이 235명(21.6%)으로 가장 많았다. 폭행은 46명(4.2%), 성희롱·성폭력은 29명(2.7%)으로 조사됐다. 가해자는 주로 사업주, 상사, 고객 등이었다.
이날 자신의 사무보조 아르바이트 경험을 소개한 박은희(가명·18·여) 학생은 "사장이 주급을 주기로 한 날 다리를 더듬어도 뭐라고 항의하지 못했다"며 "사장이 '안아달라', '남자 경험 없냐', '애인 해주면 안 되겠냐. 주급을 두 배로 올려 주겠다'라고 말해서 그날로 일을 그만뒀다. 너무 무서웠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고 증언했다.
식당에서 홀서빙 일을 하는 한 학생(여·18)은 "하루는 손님이 고기에 비계가 많다고 항의를 했다. '너 같으면 먹을 수 있냐, 먹어 봐라'라고 해서 결국 죄송하다고 하고 그 고기를 먹었다. 먹어보라니까 먹어야 했다"고 말했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배경내 활동가는 "청소년들이 주로 서비스 업종에서 일하다 보니, 손님 기분을 맞춰주는 감정 노동이 요구되고, 아울러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반말이나 욕설 같은 언어적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남은 음식 먹으라고?… "우리가 쓰레기 처리반인가"
한편, 이수정 노무사는 "근무 중 식사 문제를 조사해 본 결과, 13.6퍼센트는 팔고 남은 재고로 식사를 지급하고,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지급하는 경우(1.4퍼센트)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청소년의 건강 유지를 위해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고 설명했다. 청소년들의 답변에 따르면, 1끼 식대로 1000원에서 1200원 사이를 주거나 1000원 이하 제품을 골라서 먹게 하는 경우, 급료에서 식대를 빼고 주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날 하인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실업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은 청소년 노동인권 개선을 위해 △사업주 중심이 아닌, 청소년이 중심이 되는 근로감독을 실시할 것 △근로감독 대상 업종을 확대하고 상시적인 근로감독을 실시할 것 △5인 미만 사업에 대한 근로기준법을 전면 적용할 것 △학교 현장에서 노동인권 교육 및 안전·보건 교육을 실시할 것 등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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