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낮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저임금 비율, 비정규직 비율 등 노동의 질 면에서는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열악하다. 노동소득 분배율은 1996년을 정점으로 지속적으로 하락해왔고, 이명박 정부 들어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대기업들은 끊임없이 하청업체나 비정규직을 통해 고용 부담을 전가시키고 있으며, 중소기업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나 임금을 제공할 여력을 잃어가고 있다. 고용을 버린 성장에 집착하는 동안, 성장잠재력이 소진되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은 경제문제를 넘어 미래세대의 희망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사회문제이자 정치문제이다. 일자리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이며 해결책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
1. 신산업육성이 일자리 창출의 해법인가?
경제학자들은 흔히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고 노동생산성이 향상되면 노동투입량은 감소한다고 말한다. 경제구조가 고도화되고 기술이 발달하면 그만큼 노동사용량은 줄어들기 때문에 주력산업의 성장으로는 더 이상 고용을 유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고용을 유발하는 새로운 산업이나 사업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우리 경제가 제조업 중심으로 성장하면 고용 없는 성장이 나타날 수밖에 없고 서비스업이 성장해야 고용도 함께 증가한다는 것이다. 주력 제조업으로는 일자리 창출이 안되니까 금융허브도 만들어야 하고 문화관광산업도 키워야 한다. 재계가 추진하는 신성장동력산업, 신수종사업에 대해 정부의 지원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거짓으로 드러났지만, MB정권이 4대강사업 강행할 때에도 이런 논리를 구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산업을 발굴해 일자리를 만들자는 주장이 비단 MB 정권이나 보수진영뿐 아니라 진보개혁진영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지난 총선때 진보개혁진영에서 내놓은 사회서비스업 육성이나 친환경 에너지 전환사업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공약이 그러하다. 민주통합당에서는 보건의료, 노인건강, 요양, 보육 분야에 35만개, 친환경 녹색 일자리 12만개를 창출하겠다고 했고, 통합진보당에서도 이와 비슷한 공약이 있었다.
에너지전환과 재생에너지 산업 육성으로 일자리를 늘릴 수 있다는 공약은 잘못된 것이다. 에너지 전환을 위해 재생에너지 산업을 육성하면 분명 새 일자리가 생긴다. 그런데 에너지전환으로 비녹색 에너지가 퇴출되면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의 일자리는 사라진다. 새로 창출되는 일자리 수는 크게 부각시킬 뿐, 사라지는 일자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녹색성장이 일자리에 미치는 효과'에 관한 노동연구원의 2010년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기후변화협약에 대응하여 신재생에너지산업을 육성하면 24,000개의 일자리가 늘어난다. 하지만 이는 탄소 에너지 감축으로 유발되는 경제 전체의 산출량 감소로 사라지는 44,000개의 일자리에 턱 없이 모자란다.
이보다는 덜 심각하지만, 사회서비스업 육성으로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공약 역시 오해를 살만하다. 서비스산업 가운데 사회서비업은 인력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업종중의 하나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복지수요는 앞으로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향후 사회서비스업의 일자리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문제는 늘어나는 일자리는 대부분 단순 미숙련 일자리라는 데에 있다.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해서', '보수가 낮아서', '근로환경이 열악해서' 등등의 이유로 청년들이 취직해도 얼마 안가서 대부분 이직하는 직장이 보육, 요양 같은 사회서비스업종이다. 인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산업을 키운다고 해서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이런 나쁜 일자리를 계속 만들자는 것이 진보개혁진영의 대안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서비스업을 육성하되 나쁜 일자리를 만드는 민간위탁 방식을 지양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접근하면, 새 사업을 벌여야지만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으로 국민들을 오해하게 만든다.
필자는 한국 사회가 시급해 해결해야 할 과제중의 하나로 보편적 복지와 에너지 전환을 전면에 부각시키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사회서비스업 육성이나 에너지전환 과제는 점증하는 사회의 복지와 환경수요에 부응하는 것이고, 일자리 창출은 이러한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부수적인 이익일 뿐이다. 사회서비스업 육성이나 친환경 에너지 사업은 그 자체의 고유한 사회적 목적 때문에 육성하는 것이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육성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복지가 필요하고, 환경이 중요하다고 말하자. 하지만 이걸 일자리 창출의 해법으로 포장해서 말하지는 말자.
'고용없는 성장'의 문제는 일자리 수의 부족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고용 없는 성장이 사회서비스업 육성이나 친환경 산업 육성으로 일자리 수를 늘린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일자리 수에만 집착하면, 주력성장산업에서 나타나는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유발하는 대기업의 '나홀로 성장', '자본친화적 성장'을 '고용친화적 성장', '노동친화적 성장'으로 바꾸는 일을 소홀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일자리 문제를 일자리가 부족하니까 만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이런 함정에 빠지기 쉽다. 나쁜 일자리는 주변에 흔하다. 문제는 괜찮은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자리의 수보다는 일자리의 질이 더 큰 문제다. 성장에도 불구하고 왜 괜찮은 일자리는 계속 부족한가?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제대로 된 답을 구할 수 있다.
2. 고용없는 성장, 일자리 문제의 핵심은?
우리나라 노동시장은 일자리의 질 면에서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다. 노동시장은 대기업, 중기업, 소기업, 그리고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계층화되어 있고 계층별 임금격차는 세계에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다. 사업계가 대기업에서 1, 2, 3차 하청업체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먹이사슬로 연결된 것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도 먹이사슬의 고리에 얽혀 있다. 중소기업 임금과 비정규직 임금은 대기업 임금과 정규직 임금의 절반 수준이다. 격차가 이 상태로 굳어지면 21세기 새로운 신분사회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계층화된 노동시장에서 상층부의 좋은 일자리에서 하층부의 나쁜 일자리까지 서열이 매겨져 있고, 위쪽 좋은 일자리 수는 작고 아래쪽의 나쁜 일자리는 많은 피라밋 구조다. 이런 노동시장구조 속에서 경제가 성장해도 좋은 일자리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나쁜 일자리만 늘어나는 것이 일자리 문제의 핵심이다.
주력성장산업에서는 일자리 창출 여력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말도 잘못된 것이다. 경제구조가 고도화되면 저숙련 생산직 노동수요는 줄어들지만 그 대신 고숙련지식노동에 대한 수요는 늘어난다. 게다가 주력성장산업과 국내 관련부문간의 산업연관관계가 잘 구축되면 파생노동수요가 크게 발생한다. 제조업과 서비스 산업간의 연계는 꾸준히 확대되어왔다. 한국은행이 발간한 2007년도 「산업연관표」를 보면, 우리 경제는 서비스 산출의 11.7%가 제조 과정에 투입되고 제조업 산출의 8.2%가 다시 서비스업에 투입되는 연관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런 연관구조 속에서 제조업의 성장으로 서비스업의 고용이 유발되고 일자리의 수는 늘어났다. 제조업 성장에 힘입어 물류, 유통, 소프트웨어 산업도 성장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성장한 서비스산업에서 그동안 만들어진 일자리의 질이 좋지 않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 산업은 소재부품 부문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가공조립형 산업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글로벌화로 수입 부품이나 중간재가 계속 늘어났다. 여기에 대기업의 부담을 중소기업에 전가하는 고질적인 병폐로 인해 일자리가 제대로 만들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하청단가결정 관행을 보면, 대기업은 중소기업이 실제 지급하는 임금보다 낮은 임(금)률을 적용하고 계약기간중 인건비 상승은 단가인상요인으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차이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이 비정규직을 늘리거나 외주를 확대할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 사이에 인건비를 줄이는 '아래로 향한 질주'(race to the bottom)가 벌어지고 임금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그러니까 주력산업이 성장해도 일자리의 수가 늘어나지 않는 게 문제라기보다는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 게 문제다. 일자리 이야기가 나오면, 흔히들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나 대학졸업자의 눈높이 불일치를 탓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구조 속에서 들어가 있는 주체들이 취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일 뿐이다. '대기업들의 나홀로 성장'과 '나쁜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계층화된 노동시장구조가 일자리 문제의 핵심이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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