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지만, 이 말은 다가오는 미래를 잘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할 수 있는 바가 별로 없다는 '비관론'에 가깝다. 이 글의 독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솔직히 말해 새해 벽두 우리의 심정이 그렇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나?
무엇보다 글로벌 정치경제 환경이 국민국가 '대한민국'을 막다른 길로 몰아붙이는 중이다. 무슨 터무니 없는 거시적 관점이냐고 타박하지 마시라. 어느 국가도 믿을 수 없다는 새로운 세계질서(물론 아직 초입에 지나지 않는다)는 더 강력한 자국 중심주의로, 그리하여 이미 사회적 유전자에 들어있는 '총동원체제'가 끝까지 부활할 가능성이 크다. 가혹한 조건에서 우리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론'이 거의 모든 것을 압도할 것으로 예상한다. 한국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에 관심을 갖는 모든 사회적, 정치적 주체에 직접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
국익과 국력, 이와 거의 동격인 한국 자본과 경제가 최우선 관심사가 될 때, 그리하여 한국 사회의 모든 것을 지배할 때, 이제 겨우 싹이 날까 말까 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과 그 운동은 더 가혹한 조건에 맞닥뜨릴 것이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소식이 들리자 바로 어느 주식이 오를 것인가를 따지는, 이 노골적인 자본주의적 욕망의 공론장이라니. 부인할 수 없이 우리가 처한 동향이자 정세가 아닌가.
전망이 어두우니 걱정스러울 수밖에. 여기서 기후 위기와 지역 불평등,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그 힘과 내재한 힘, 그리고 실천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온통 국민국가의 생존론, 그 방법을 두고 논쟁하는 형편에 국제주의, 탈성장, 체제 전환, 돌봄 정의 같은 것들이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차마 비관할 수 없지만 낙관하기는 더 어렵다.
이제 '이성'으로부터 '의지'로 옮기자. 비관으로부터 전환하는 과정은 생략하지만, 압도적 구조에 직면한 역사적 주체로서 우리는 올해 '저항'을 다시 해석하자고 제안한다. 이때 저항은 대안 제시 또는 대안의 실천과 대비되는 말이다. 의료의 상업화, 영리화 경향에 대한 대안 제시란 예를 들어 공공의료 강화를 주장, 제안, 요구하는 실천을 가리킨다.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참여와 민주주의, 이에 기초한 사회적 실천의 방법이다.
이와 비교해 저항이란 그런 대안을 전제하지 않고 상업화, 영리화한 의료를 비판하거나 이에 참여하지 않는 행동이다. 오해를 무릅쓰고 단순하게 말하면 대안 없는 비판이라고 해도 좋다. 방식은 다양하지만, 기존 구조와 체제에 대한 저항을 포함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저항이라 할 만한 역사적인 예로는, 지역건강보험을 처음 시작했을 때 보험료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많은 농민이 보험료 납부를 거부한 것을 들 수 있다. 의료보험 통합의 출발이 되었던 유명한 사건이다.
왜 대안이 아니라 저항인가? 저항이어야 하는가? 다른 무엇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종류의 대안은 국가권력, 전문가, 기득권, 강대국의 용어이자 담론이다. 대안 중심의 권력관계에서 '대안 없음'은 모든 비판과 문제 제기를 무력하게 만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의 합리성을 웅변한다. 비수도권 비도시 지역 주민의 의료 이용을 보장하는 문제에 수가 인상이나 원격의료 같은 방법 말고 대안이 있느냐는 말을 누가 어떨 때 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지 생각해 보자.
대안을 따지는 것은 국가권력의 통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안이 없으면 현실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비판과 요구를 멈출 수밖에 없다. 영국 대처 총리가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활용한 저 유명한 브랜드가 바로 "다른 대안이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구호가 아니었던가? 기득권을 유지하고 다른 체제의 상상력을 저지함으로써 체제의 안정성을 높이는 정치적 담론의 전략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 관심과 주의가 대안으로 옮겨가면 본래 대안을 요구했던 문제, 사람들의 고통과 요구는 사라진다. 오는 3월부터 시작한다는 지역사회 통합돌봄이 그 좋은 예이다. 주민과 인민의 불편, 고통, 요구는 희미해지고, 담당이 누구니 무슨 서비스 공급자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또 다른 대안 논의만 무성하다. 주민과 그들의 요구는 어디로 갔는가?
2026년 예상되는 총동원체제를 맞아 그에 조응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요구하는 '체제 내' 실천은 필시 그 대안조차 무참한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반도체 산업단지를 만들고 이에 전력을 공급해야 한다는 전제를 그냥 두고는 그 어떤 대안도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이 되기 어렵지 않을까? 공공의대를 신설하고 몇몇 공공병원을 더 짓는 대안 정도로는 지역보건의 모순을 해결하기 어렵다.
저항은 실천 윤리일 뿐 아니라 전략이기도 하다. 그 어떤 조건에서도 저항의 잠재력은 존재하고 때로 더 커진다는 사실에 역설적인 희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의 최우선성, 그것도 자본주의적 발전국가의 재활성화와 이를 위한 총동원체제에서 국가와 인민 사이의 모순은 더 커질 것이 명확하다.
다시 확인하건대 저항은 당연히 사람들과 주민과 인민의 요구에서 출발한다. 현실의 고통과 문제, 희망과 비전에 바탕을 두지 않은 저항이 있을 수 없다. 기본적인 의료와 돌봄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요구가 없으면 국가권력이 주도하는 통합 돌봄 정책에 대한 저항도 형성되지 않는다.
올해 우리의 과제도 여기서 나온다. 토대로부터의 저항을 변화의 힘으로 바꾸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한 가지 실천 대상이 바로 지식과 담론이 아닌가 한다. 지식을 생산하고 확산하며 활용하는 일을 하는 그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질문, 지식의 실천, 지식 노동, 지식 운동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람들과 주민과 인민의 요구, 저항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일, 그리고 요구와 비전을 모아서 저항의 담론을 형성하는 일, 그 담론이 조금이라도 더 퍼질 수 있는 고리를 만드는 일, 그리하여 저항의 힘이 대항 권력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새해 벽두의 다짐이기도 하다.
이 또한 지식의 저항이자 지식 운동의 저항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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