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에서 연주를 하다 보면 관객들의 분위기가 바뀌는 순간이 있다. 긴장감 넘치는 첫 장단 시작 이후 선율이 몇 번 들리고나면 객석에 앉은 관객의 표정이 아주 자연스럽게 풀린다. 처음에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있던 분들도 어느새 어깨를 내려놓고, 손을 가볍게 모으고, 눈빛에서 긴장이 빠져나간다.
연주는 아직 초반임에도 공간 전체가 천천히 안정되는 느낌이 전해진다. 국악이 가진 힘은 어쩌면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억지로 감정을 움직이기보다,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던 리듬을 되찾게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국악은 먼 옛날부터 이어져오는 예술이면서도 현대인의 바쁜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를 정리하는 데 놀라울 만큼 효과적이다. 익숙함과 절제, 단순한 구조 속의 깊은 변화, 반복에서 오는 안정감은 오늘날의 속도감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높아졌던 마음의 온도를 낮추고 사고의 속도를 조절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오늘은 국악이 어떻게 ‘마음의 휴식’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어떤 음악적 요소들이 그 평온을 만들어내는지 살펴보려 한다.
정악이 주는 느슨한 안정감에 대하여
‘정악(正樂)’이라는 명칭은 낯설고 어렵게 들리지만, 실제로 음악을 들어보면 의외로 단순한 구조가 만들어내는 안정감이 먼저 느껴진다. 대표적으로 <수연장지곡(壽延長之曲,밑도드리)>을 비롯한 도드리 계열의 음악을 추천한다.
도드리는 환입(還入)의 우리말로 “되돌아간다”는 뜻을 가지는데, 일정한 흐름이 반복되지만 반복 속에서 아주 작고 섬세한 변화가 드러난다. 매 장(章)의 호흡은 일정하면서도 단조롭지 않고 기교를 과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깊은 감각적 흐름을 이어간다. 이런 구조는 듣는 이에게 예상 가능한 안정감을 제공한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여유로운 속도로 사람의 심장이 뛰는 속도와 비슷하게 음악이 진행된다.
또한 반복되는 선율로 다음에 어떤 선율이 이어질지 대략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긴장을 풀 수 있고, 반복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마음의 속도도 낮아진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은 ‘힐링’이라는 단어를 과하게 쓰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된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예술과 건강에 관해 분석한 종합 보고서에서도 음악이 안정감을 주는 핵심 요소로 ‘예측 가능한 흐름, 과도하지 않은 자극, 낮은 음압(볼륨)’ 등을 꼽는다. 정악은 이미 이러한 조건을 자연스럽게 갖추고 있다.
장단이 단정하고 음들의 간격이 넉넉하며 선율 위아래의 움직임이 부드럽다. 듣는 이가 특별히 무엇을 집중해서 따라가지 않아도 음악 자체가 몸의 속도를 조절해 주는 느낌이 있다. 이는 현대의 심리·치료 연구에서 권고하는 ‘편안한 음악 환경’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도서관이나 서재에서 조용히 틀어놓아도 방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공간이 한층 더 정돈된 분위기로 변한다.
민요와 장단, ‘함께 부르며 편안해지는 경험’
국악의 편안함은 정적인 감상뿐 아니라 흥겨운 민요와 민속장단에서도 발생한다. 현대의 많은 음악치유 프로그램에서 주목하는 요소는 ‘참여감’이다. 혼자 듣는 음악이 만들 수 없는 정서적 변화는 함께 부르기나 장단 맞추기에서 비롯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예는 민요의 후렴 구조이다. “아리랑 아리랑…” 한 소절은 단순한 멜로디임에도 거의 모든 세대가 기억하고 따라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생기는 안정감은 단순한 향수나 전통성의 문제가 아니라 ‘안다’는 감각이 주는 예측 가능성 때문이다.
실제 연구에서도 민요 중심의 프로그램이 노년층의 인지 기능, 지남력, 언어 기능 개선에 일정한 도움이 되었다고 보고한다. 리듬을 손으로 치고, 간단한 후렴을 함께 읊조리는 행위가 뇌의 활성에 영향을 주면서 정서적 긴장도 낮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여의 ‘문턱이 낮다’는 점이다. 전문적인 기교가 필요하지 않고, 장단도 점점 가벼운 패턴부터 시작할 수 있다. 두드리는 박 한 번으로도 음악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고 이는 타인과의 동시성(being in sync)을 경험하게 한다.
이 동시성은 현대 심리학에서도 정서적 안정과 긍정적 사회적 감정 형성에 기여하는 요소로 주목된다.
이를 무대에서 직접 체감하는 순간이 있다. 짧은 후렴을 객석과 함께 부르거나, 손뼉 장단을 유도할 때, 관객의 표정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공연장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정돈된다. 이러한 ‘함께하는 음악’이 지닌 힘은, 국악이 가진 또 다른 힐링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국악에 기대해도 좋은 것들
하루 종일 이어폰, 동영상, 쇼츠, 알림음 사이에서 살다 보면 ‘소리 없는 순간’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국악이 가진 자연을 닮은 음색과 절제된 흐름, 미세한 변화가 가진 미학은 바쁜 삶을 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국악은 과거를 보존하기 위한 음악뿐 아니라, 지금의 나를 정리하는 데 필요한 가장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볼륨을 조금 낮추고 길이를 짧게 하고 반복을 천천히 느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다른 감정 상태에 도달해 있다. 집에서, 도서관에서, 혹은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찾아오는 순간, 국악은 과하지 않은 방식으로 마음의 자리를 다시 정돈해 준다.
빠르게 움직이는 일상 속에서 마음의 작은 틈을 내어 주는 것, 그것이 오늘의 우리가 국악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평온과 작은 힐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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