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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우리 이야기의 출발점"…고려인 후손들, 광주서 뿌리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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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우리 이야기의 출발점"…고려인 후손들, 광주서 뿌리를 찾다

카자흐스탄 독립운동가 후손 등 26명, 48시간 여정 끝에 광주 방문…학생독립운동·5·18 역사 현장서 '눈시울'

"카자흐스탄에서도 독립운동 이야기를 배웠지만, '학생'들이 전면에 나선 운동은 처음 들었어요."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왔는데, 건물의 총탄 자국을 직접 보니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고려인마을에 오니 한국 같기도 하고 카자흐스탄 같기도 해요. 여기가 우리 이야기의 출발점 같습니다."

머나먼 이국땅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 후손들의 눈에 '광주'는 자신들의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역사의 거울이자 또 다른 고향이었다.

홍범도 장군이 잠든 땅, 크즐오르다에서 기차와 비행기, 버스를 갈아타는 48시간의 긴 여정 끝에 지난 18일 광주에 도착한 방문단은 피곤한 기색도 잊은 채 오는 24일까지 예정된 광주 방문 일정을 시작했다. 이들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함성과 5·18민주화운동의 상흔, 그리고 월곡동 고려인마을의 따뜻한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자신들의 '뿌리'를 더듬어 나갔다.

이들은 광주 도착 첫날 곧바로 조선대 치과 등에서 검진을 마치고 광복회 광주지부 사무실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김 이리나 전 크즐오르다 부시장(71)은 "크즐오르다의 국가 기록보관소에서 홍범도 장군의 자료를 찾고 있는데, 그 자료를 꼭 전달하고 싶었다"며 고려인협회가 준비한 기념패와 스크랩한 홍범도 장군의 자료를 전달했다.

▲18일 광복회 광주광역시지부 사무실에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고려인협회와 지부 관계자가 홍범도 장군의 자료집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유가이 빅토리아 부회장, 김 이리나 전 크즐오르다 부시장, 고욱 광복회 광주지부장, 셰가이 이리나 협회 총무.2025.11.18ⓒ프레시안(김보현)

◇ "할아버지 이름 앞에서"…학생독립운동기념관의 '정적'

광주 방문 이틀째인 19일 오전 이들의 첫 방문지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었다. 이정선 광주시교육감과 함께 헌화한 이들은 1929년,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이 불의에 맞서 떨쳐 일어났던 역사의 기록 앞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코르크아타 대학교 2학년생인 김 콘스탄틴군(18) 은 기념관 한쪽 벽면에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김종화' 선생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진도, 생몰연도 없는 이름 석 자였지만 그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김 군은 "혹시 우리 할아버지가 아닐까 싶었다"며 "묘소에서 본 할아버지의 이름과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고 말했다.

기념관 측에 확인한 결과 김 선생은 후손도 없고 자료가 없다고 전했다. 고려인협회 측은 자료를 찾아 김종화 선생과 김 군의 할아버지가 동일인인지 추적해갈 예정이다.

언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계봉우 선생의 후손 투르간바예바 사비나양(16)은 "집에 걸린 할아버지 사진처럼, 이곳의 수많은 사진을 보니 마음이 뭉클해졌다"며 "1년에 한 번 할아버지 묘소에 가는데 늘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9일 광주 서구 학생운동독립기념관에서 헌화를 마친 이정선 광주시교육감과 방문단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2025.11.19ⓒ프레시안(김보현)

◇"'택시운전사'의 현장"…전일빌딩 총탄 자국 앞에서의 '침묵'

오후에 찾은 5·18민주화운동의 상징적 공간, 전일빌딩245에서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헬기 사격으로 남은 수많은 총탄 자국이 고스란히 보존된 10층에 들어서자 학생들은 말을 잃었다.

유가이 빅토리아 크즐오르다 고려인협회 부회장(50)은 "영화 '택시운전사'를 봤지만, 그 현장이 광주인 줄은 몰랐다"며 "건물에 남은 총탄 자국을 직접 보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안중근을 후원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후손인 최 빅토르군(17)도 "우리가 배운 고려인 강제이주 기록과 비슷한 느낌"이라며 국가폭력의 비극에 공감했다.

학생들은 5·18 민주화운동 헬기 사격을 다룬 애니메이션과 당시 금남로의 모습을 재현한 VR 영상 앞에서도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았다. 국가 폭력의 흔적을 '직접 목격한다'는 경험은 그들에게 새로운 언어로 다가가는 듯했다.

▲19일 광주 동구 전일빌딩245에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고려인협회 방문단이 해설을 듣고 있다.2025.11.19ⓒ프레시안(김보현)

◇"우리 집밥 같아요"…월곡동 고려인마을에서의 '웃음꽃'

가장 많은 감정의 교류가 있었던 곳은 20일 기아 오토랜드 광주공장을 방문한 후 찾은 월곡동 고려인마을이었다.

9년 전 카자흐스탄에서 귀국한 김병학 월곡고려인문화관장이 직접 문화관 안내를 맡아 이들을 반겼다. 학생들은 "할아버지가 혹시 이런 마을에서 살았을까?"라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고 고려인마을 관계자들과는 자연스럽게 러시아어로 말을 섞었다.

학생들은 고려인마을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화가 문 빅토르의 작업실, 고려인마을 방송국, 홍범도 장군 흉상 조각상 앞까지 이어진 도보 투어는 그 자체로 '자기 역사 찾기'였다.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 등이 정성껏 차려준 중앙아시아식 한국 음식을 본 학생들은 "집밥 같다"며 웃음꽃을 피웠다.

이후 숭의과학기술고를 방문,'고려인 반' 학생들과 진로교육 체험을 하고 광주문화재단 전통문화관을 방문해 한복 체험을 하며 일정을 마쳤다.

▲20일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에서 신조야 대표(오른쪽 가운데)와 방문단 학생들이 식사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다.2025.11.20ⓒ프레시안(김보현)

◇크즐오르다에서 광주까지 조각난 역사를 잇다

크즐오르다에서 광주까지 이어진 48시간의 여정은 그들에게 단순한 방문이 아니었다. 광주는 그들에게 '근원을 확인하는 장소'였고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홍범도 장군과 고려인 강제이주의 기억, 1929년 학생독립운동의 외침, 1980년 5월의 총탄 자국, 그리고 현재 광주에 자리 잡은 고려인마을의 따뜻한 일상까지. 멀리 떨어져 있던 조각난 역사들이 광주에서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한 방문단 관계자는 "광주는 우리에게 또 다른 역사를 가르쳐줬고 그 역사가 우리 자신을 다시 보게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20일 광주 고려인마을의 홍범도 장군 흉상 앞에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고려인협회 방문단, 광복회 광주지부, 마을해설사 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2025.11.20ⓒ프레시안(김보현)

◇"광주교육청 결단, 내년부터 정례화 기대"

이번 행사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광복회 광주지부와 광주시청, 광주시교육청이 공동으로 추진했으며, 이정선 교육감의 결단으로 교육청 예산이 특별 편성돼 성사될 수 있었다.

고욱 광복회 광주지부장은 "지난 6월 카자흐스탄 방문에서 고려인협회의 요청으로 추진하게 됐다"면서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방문 행사를 내년부터 정례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정선 광주교육감은 "후손들이 민족의 뿌리와 정체성을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연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탐방은 주최 기관을 비롯해 강윤진 보훈부 차관, 기아오토랜드 광주공장,농협은행, 광주신세계백화점, 조선대학교 치과대학병원, 서울화이트치과, 사)따뜻한동행, 김동우 사)희망을나누는사람들 부회장, 신흥수 광덕고 이사장,김현철 중앙여고,금파고 이사장. 김보곤 DK산업회장,양승빈 호원 부사장, 고영철 광주문화신협 이사장, 한용식 주안통신 대표, 고병돈 광복회서구지회장 등의 후원으로 성사됐다.

고려인 학생들은 이날 광덕고와 시청을 방문하고, 오는 22일 서울로 상경해 서대문형무소, 임시정부기념관, 현충원, 경복궁 방문 등 광복회 본회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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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현

광주전남취재본부 김보현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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