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킹스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인 로버트 케이건(Robert Kagan)은 2002년 <권력과 나약함>이라는 글을 통해 미국과 유럽을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화성인(미국)과 금성인(유럽)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화성인과 금성인의 대립과 갈등은 지난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절정에 이르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필립 고든(Philip H. Gordon)과 제레미 샤피로(Jeremy Shapiro)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2004년에 출판한 <전쟁 중인 동맹국들>이라는 책을 통해 이라크 전쟁을 놓고 전개된 미국과 유럽의 대립과 갈등 상황을 자세하게 기술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미국과 유럽의 갈등이 2025년에 들어와 폭발하는 양상을 보인다. 지난 미국의 대선 과정에서 유럽은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민주주의와 안보, 그리고 관세와 통상 등을 포함하여 경제 전반에 걸쳐 미국과의 갈등이 불가피함을 감지했다. 이러한 예상과 우려는 2월 14~16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제61차 뮌헨안보회의(MSC: Munich Security Conference)를 계기로 우크라이나 종전 해법을 둘러싸고 미국의 충격적인 발언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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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C에서 쏟아진 미국의 주요 발언
2월 12일 장관 임명 이후 처음으로 브뤼셀 나토 본부를 방문한 미국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은 우크라이나 종전과 관련해서 우크라이나와 유럽 동맹국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발언을 쏟아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없으며, 우크라이나의 2014년 이전으로의 영토 회복에 대해 회의적이고, 종전 이후 우크라이나 영토에 미군이 없는 유럽 중심의 평화유지군이 주둔할 거라는 생각을 밝혔다.
또한 그동안 우크라이나 종전의 밑그림을 그려 왔던 키스 켈로그 우크라이나-러시아 특사는 MSC에서 유럽을 향해 "협상 테이블 배석 여부를 불평할 게 아니라 구체적 제안과 아이디어를 마련하고 방위비를 증액할 것"을 강조했다. 이처럼 미국은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자국의 안보로 여기는 유럽 동맹을 배제하고 러시아를 상대로 우크라이나 종전 회담을 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동맹국 유럽을 당황하게 만드는 미국의 발언은 단지 우크라이나 종전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2월 14일 MSC 연설에서 청중의 기대와는 달리 유럽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내가 유럽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위협은 러시아나 중국, 그 어떤 외부 행위자가 아니라 유럽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민주주의)가, 미국과 공유하는 가치에서 후퇴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배척하는 독일 정치권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와 관련하여 리스토프 호이스겐 MSC 의장은 독일 ZDF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MSC는 "어떤 의미에서는 유럽의 악몽"이었다고 개탄하면서 트럼프의 미국은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MSC를 계기로 미국은 미국대로, 유럽은 유럽대로 우크라이나 종전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2월 17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배제하고 러시아와 양자 회담을 했다. 유럽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으로 파리에서 주요 유럽국가 정상 간에 비공식 긴급회의를 가졌다.
양측의 회담과 논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트럼프 당선 이전 유럽이 예감했던 세 가지 쟁점-안보, 민주주의, 경제-에서의 우려와 마찰, 그리고 대립과 갈등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화성인, 유럽 안보의 유럽화를 추동
MSC를 계기로 탄력을 받은 우크라이나 종전 청사진은 아직 모자이크 수준이지만 불투명한 조각들을 맞추어 간다면, 미국이 생각하는 유럽 안보의 전체적 윤곽을 그릴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럽 동맹국의 방위비 증액과 나토 개혁 등을 통해 유럽 동맹국들이 유럽 안보에서 더 큰 책임과 역할을 맡는 그림이다. 즉,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 동맹국과의 전략적 분업을 통해 유럽 안보의 유럽화를 추동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냉전 시대 미국은 안보를, 유럽은 경제를 책임지는 전략적 분업을 경험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위협과 중국의 영향력 확장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나토의 유럽 동맹국들이 유럽 안보를 책임지고 미국은 중국 봉쇄를 위해 인도-태평양 안보에 집중해야 할 전략 조정의 필요성이 생겼다.
미국과 유럽 동맹국 간의 전략적 분업은 트럼프의 미국이 나토에서 탈퇴하지 않더라도 유럽 안보에 덜 관여하는 것이며,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선택과 집중이라는 대외정책 기조와도 부합한다.
이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에서 유럽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할 것이다. 또한 나토 내에서 유럽 안보 기둥의 강화를 강조하면서 미국의 안보 공약과 유럽 안보 기둥 간의 적절한 균형을 도모해 나갈 것이다. 즉, 트럼프 행정부의 유럽 안보 정책의 큰 흐름은 나토 탈퇴보다는 유럽주둔 미군 감축과 나토에서 유럽 안보 기둥을 강화하는 등 유럽 안보의 유럽화를 추동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나토에서 유럽 안보 기둥의 강화는 유럽 안보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쇠퇴를 동반할 수 있어 그 대안으로 미국은 나토 핵전력에 대한 책임 강화를 추진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안보 분업 구상을 통해 미국이 유럽의 자연스러운 동맹국이자 안보 보장자라는 인식과 믿음에서 벗어나는 과도기적 변화 과정이 전개될 것이다.
금성인, 국방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
미국 우선주의에서 출발한 트럼프 행정부의 우크라이나 종전 해법의 윤곽이 유럽 동맹국에 시사하는 바는 이제는 유럽 안보에 대한 책임은 미국보다는 유럽 동맹국의 몫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으로부터 질책 아닌 질책과 모욕감을 받은 유럽은 이제 유럽 스스로가 유럽의 안보를 지켜야 한다는 당혹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트럼프의 나토 개혁 등 외부의 압력 등으로 유럽이 자국의 안보를 돌보아야 한다는 자각과 유럽 안보 기둥 강화에 관한 논의는 유럽의 국방 계획과 투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사실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강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국방비 증액과 국방력 강화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트럼프 당선 대비에 따라 서서히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오기는 했다. 지난해 유럽의 국방비 지출은 실질 기준으로 11.7% 증가한 4570억 달러를 기록해 10년 연속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유럽의 방위비 증액은 꾸준하게 증가해왔다. 특히, 폴란드의 국방 예산은 큰 폭으로 증가했다. 2022년 세계 20위에서 2024년에는 세계 15번째로 국방비 지출이 큰 국가가 되었다.
2025년에 들어와 유럽은 러시아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한 국방력 강화에 큰 노력을 쏟고 있다. 유럽연합의 국방비 공동 자금 조달 논의의 중심적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폴란드의 외무부 장관은 2월 6일 브뤼셀에서 열린 비공식 유럽 지도자 회의에서 유럽의 국방력 증강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재무장 은행을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폰데라이언(Von der Leyen)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이제 국방이 유럽연합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임을 암시했다. 특히, 쿠빌류스(Kubilius) 유럽연합 국방 우주 담당 집행위원은 빅뱅 수준에 버금가는 국방 접근법을 강조하면서 3월 19일까지 유럽방위백서를 발표할 예정이며, 이 백서를 통해 유럽이 세계 무대에서 즉각적인 군사적 비상사태와 장기적 안보 도전에 대비할 수 있는 조치를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우크라이나 전쟁과 트럼프 행정부 등장을 계기로 유럽은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하기 위한 현실적 노력을 강구하고 있다. 물론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과 나토 내에서 유럽 안보 기둥의 완전한 구축은 자체 핵우산 능력을 확보해야만 가능하나 현재 및 향후 이의 달성 여부는 매우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로 핵 억제력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과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한국 안보, 전략적 자율성 키워야
미국 우선주의에서 출발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한반도 안보 구상도 유럽의 경우처럼 한국의 안보정책과 한미동맹에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주한미군 주둔 비용 관련 한국의 분담금 대폭 증액, 한국의 국방비 증액을 통한 국군의 재래식 전력 증강 , 유엔사의 활성화, 주한미군의 감축과 역할 변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한미동맹의 지역 동맹으로의 전환 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버거울 정도다.
다가올 트럼프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우리가 방어적이고 안보적 우려감을 드러내는 것은 아마도 알게 모르게 우리 내면에 쌓여버린 동맹 의존심리가 너무 커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유럽 안보 구상을 거울삼아 우리는 전략적 자율성을 키워나가면서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해 나갈 수 있는 균형과 융합의 미래지향적 사고를 갖출 필요가 있다. 북핵이 고도화되고 북‧러 동맹이 강화되는 엄중한 한반도 안보 현실에서 동맹을 강화하고 동맹에 의존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볼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동맹 강화의 내용에 우리의 전략적 자율성을 키워나갈 수 있는 정책 공간을 확보하면서 동맹에 대한 의존심리를 지양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정책이 철저하게 자국 우선주의와 거래적 동맹관에 따라 추진되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 우리는 안보적 자율성을 강화할 수 있는 방향에서 미래지향적 한미동맹 비전을 새롭게 마련할 준비를 보다 철저히 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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