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가까운 도주와 은거를 중단한 기리시마 사토시는 자신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하 무장전선)의 일원이었음을 자처한 지 수 일 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의 주요 언론들은 검증이나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은 채, 일본 미디어의 적대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를 그대로 전달했다. 기리시마의 출현과 죽음을 계기로 반세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 한국 사회에서 다시금 주목받으면서 '무장전선'의 사상과 실천이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지난 6월 8일, 리영희재단이 기획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특별상영회는 100여 석의 좌석이 가득 메워진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기리시마는 50년에 이르는 도망 생활에서 "조력자는 없었다"고 말했다. 기리시마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고립감이 어떤 것이었을지 감히 상상이 가서 닿기 어렵고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도망이 살아남은 이들에게, 특히 지금-여기를 살아내는 한국 사회에 건네는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일지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 보고 싶다.
한국 사회에서 미등록 비국민들을 단속-구금-추방하기 위한 출입국관리법의 근거 중 하나는 '도주의 우려'다. 도주의 우려는 한국의 법무부가 비국민을 향해 '합법적으로' 그리고 '자의적으로' 단속-구금-추방이라는 연쇄적인 국가폭력을 자행할 수 있는 이유로서 기능해 왔다.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체류 기간을 연장받지 못해서 결국 미등록 상태가 되어 추방을 피해 도망 생활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불법화된' 이들을 조력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도망이라는 행위가 통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실천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출입국관리법에 새겨진 '도주의 우려'는 도망자의 소재나 그가 맺고 있는 관계를 국가가 일일이 파악할 수 없게 되어 관리할 수 없는 존재들이 생겨난다는 것에 대한 통치 권력의 두려움을 담고 있다. 도망의 낭만화를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기리시마의 출현을 계기로 도망하는 자들과 함께 통치-불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하나의 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되었다.
도망자와 함께한다는 것은 도망하는 삶이 안주하는 삶을 향해 던지는 물음들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도망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당신들의 아파트, 백화점, 도로, 지하철역… 모두 우리가 지었다. 당신들의 식탁 위에 올라가는 물고기도, 채소들도 우리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가 한꺼번에 간병 일을 그만두면 병원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필요로 하면서도, 왜 우리를 잡아들이고 가두고 쫓아내는 것에 열을 올리나?" 이러한 문제 제기는 다름아닌 법과 시민사회에 기대어 온 안온한 국민의 일상을 떠받치기 위해 비국민을 노동력으로 끊임없이 유입하고 추방하는, 즉 배제와 포섭의 기제를 동시에 작동시키면서 비국민들의 '단기순환 노동'으로 지탱되는 한국 사회의 존재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은 50여 년 전 무장전선이 식민기업을 문제 삼으며 일본 사회를 향해 던진 물음과도 긴밀히 이어져 있다.
'호응'하는 주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기리시마가 속해 있던 '전갈'의 대표적 투쟁은 '늑대', '대지의 엄니'와 함께 한 '기소다니(木曽谷)-테멩고르(Temengor)'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에 기소타니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서 중국인과 조선인에게 혹독한 노동을 강요하고, 1975년 당시에도 말라야 연방에서 전범 기업 하자마구미(間組)가 수주한 댐 건설에 대항해 선주민과 농민들의 게릴라 투쟁에 ‘호응’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또한 과거 전범 기업의 수탈이 현재진행형의 문제이며, 지금-당장 멈추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드러낸 작전이었다. 1974년에 지하 출판된 <하라하라도케이(腹腹時計)>에도 다음과 같은 늑대부대의 선언이 실려 있다.
"우리는 아이누 인민, 오키나와 인민, 조선 인민, 대만 인민의 반일투쟁에 호응하여 그들의 투쟁에 합류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집요하게 전개하는 늑대다."
후지이 다케시는 이러한 '호응'에 주목하여 무장전선이 일제 타도의 주체를 일본의 외부 동아시아에서 찾고, 자신들이 거기에 합류했다는 것, 즉 무장전선이 주체이지만 중심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반일 투쟁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고 무장전선은 이에 호응하여 동참한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해석은 당시 일본의 신좌파가 추구했던 ‘일본혁명’이 일본 노동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세우는 것과는 다른 층위로 일제 타도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임금 인상이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일제 본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식민지 인민으로부터 수탈과 희생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무장전선은 이를 다름 아닌 일제를 강화하는 반혁명적인 노동운동으로 간주했다.
일제 본국의 노동자와 시민을 식민지 인민과 적대하는 제국주의자이자 침략자로 규정했던 무장전선의 시각은 당시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호응하는 주체'라는 무장전선 스스로의 자리매김에는 식민지 조선과 대만, 오키나와와 홋카이도에 대한 지배와 착취를 문제 삼지 않는 일본혁명이나 선주민에 대한 수탈과 억압 위에서 가능했던 청교도혁명과 같은 혁명들이 무엇을 놓쳐왔는지 되묻는 힘이 깃들어 있다.
무장전선, 특히 늑대부대원들의 반일사상이 형성된 계기 또한 '호응'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1970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으로부터 33년째 되던 날, '일제의 아시아 재침략을 저지하는 인민 대집회'에서 주최 세력 중 하나인 화교청년투쟁위원회는 일본 신좌파들 역시 피억압 민족들에 대해 자각적이지 않는 한 억압자와 다름없다며 통렬한 비판을 가했던 일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여러 신좌파 조직들이 자아비판을 했고, 그 해 호세대학을 자퇴한 다이도지 마사시, 아라이 마리코 등도 8월부터 연구모임을 꾸려 일본의 조선침략사 등을 학습하기 시작했다. 이 때 박경식이 쓴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도 교재로 쓰였다고 한다. 연구모임이 꾸려진 시기는 화교청년투쟁위원회가 이의를 제기한 지 한 달 뒤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화교청년투쟁위원회나 식민지 조선의 역사에 호응하며 타도하려 했던 일제는 무엇이었을까? 무장전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법적 혹은 제도적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정부 요인 등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제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식민 기업의 역사, 그리고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현재를 고민하며 공격 대상을 선정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상징적인' 일제와의 대결을 넘어 실제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침략을 멈추기 위한 '구체적인' 대결이었던 것이다.
연구모임이 꾸려진 이후 1974년의 미쓰비시 폭파 사건 이전에 연이어 발생한 여러 폭파 사건의 표적이 된 장소와 시설에도 간과할 수 없는 호응의 내력이 있다. 1971년에 폭파된 흥아관음상은 난징대학살의 장본인으로 알려진 마쓰이 이와네 육군대장이 세운 관음보살상이었고, 같은 날 폭파된 순국칠사비는 마쓰이를 비롯한 A급 전범 일곱 명을 기리는 비석이었으며, 1972년에 폭파된 소지사 납골당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살다 죽은 5천여 명의 식민자 일본인이 모셔져 있었다. 같은 해 폭파된 풍설의 군상은 홋카이도 '개척' 백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동상이며, 같은 날 폭파된 북방문화연구시설은 악명이 자자했던 홋카이도대학의 아이누문화 연구소다. 이러한 표적들에 대한 폭파 공격 또한 홋카이도 침략과 조선 등 여러 식민지에 '호응하는 주체'로서 무장전선이 일으킨 직접행동으로 말해질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호응'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연루된 한국의 무기수출 산업을 규탄하며 매주 토요일마다 항의 시위를 하는 한국의 반전 활동가들의 모습이나, 스미토모 상사 등 일본에 본사를 둔 다국적기업이 방글라데시에 마타바리 석탄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에 대해 일본의 기후정의 활동가들이 대항 운동을 조직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무기 수출을 멈추지 않는 한국 기업에 지속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한국의 활동가들, 비용을 주변부로 외주화하는 탄소 자본의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일본 청년들의 모습에서, 댐 건설에 저항한 말레이 선주민과 이에 '호응'하여 싸웠던 50년 전 무장전선이 미래의 동료들에게 보낸 투병통신(投瓶通信)의 메시지가 뒤늦게, 가까스로 당도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리영희재단의 특별상영회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인 관객들이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매개로 여러 질문을 던지면서, 50년 전에 보내진 메시지에 응답하려는 공동의 의지와 함께 동시대적인 사건들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감옥 안팎의 공투(共鬪), 사형폐지운동
영화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특히 무장전선이 일제히 검거된 후에도 감옥의 안팎에서 함께 싸워낸 활동의 하나로서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사형이 확정된 이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이들이 함께 기획하고 모색해 온 사형폐지운동이다. 혈연으로 이어진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었던 다이도지 마사시의 어머니 다이도지 사치코, 마사시의 면회를 위해 호적상 여동생이 된 다이도지 지하루도 사형폐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이도지 마사시와 동료들의 운동은 1975년 5월 19일 일시 검거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에 대한 반성과 통찰, 고뇌, 갈등, 격렬한 내부 비판을 거쳐 옥중에서도 운동을 전개했다. 원고인 분리 재판을 거부하며 공동 재판을 주장했고, 이 과정에서 이들은 일본의 사법 폭력을 경험했다. 긴 인내의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감옥 바깥의 지원과 격려, 그리고 운동을 함께 해주는 수많은 동료, 가족들의 덕택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이, 다이도지 마사시 개인뿐 아니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사형폐지운동뿐 아니라 처우 개선을 위한 옥중 투쟁은 그들의 운동이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곳에서 전개되어 왔으며, 언제나 사법/국가 폭력에 약자인 이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뜻한다. 사형폐지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되겠다. (다이도지 지하루)
2004년에 세상을 떠난 사치코가 남긴 유산으로 '사형폐지를 위한 다이도지 사치코 기금'이 조성되었고, 사형수들의 그림, 에세이, 하이쿠 등을 전시하는 '사형수 표현전(展)'이 2005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열려왔다. 일본에서는 재심으로 무죄가 나오지 않는 이상, 일단 사형이 확정되면 가석방이나 감형이 없기 때문에 감옥 밖으로 영영 나올 수 없거나 죽어서야 비로소 나올 수 있다. '사형수 표현전'은 사회와 완전히 차단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사형수와 시민들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흔드는, 만날 수 없는 이들의 소통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실험적인 의미가 있지만, 연속 살인, 독극물 살인, 묻지마 살인, 장애인 시설 살상 등 일본 사회에 충격을 준 중대 사건의 범인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어서, 피해자나 유족으로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등 여전히 논쟁적인 부분도 남아 있다.
마사시의 여동생이 되어 지금까지 사형폐지운동을 하고 있는 지하루는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중형이나 사형을 선고하고 형을 집행한다고 해서 그러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게 되거나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이런 사건들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사회구조적 논의가 절실하다."라는 문제의식 하에 사형폐지운동을 이어왔다고 한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사형이 집행되고 있는 나라는 일본, 중국, 북한이고, 한국은 1997년 이후로 사형집행을 하지 않은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사형은 국가가 국민을 향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것을 법으로 정해 놓고도, 동시에 "죽여라", "죽어라" 라는 명령을 국민에게 강제하는 합법적인 국가폭력이자 국가에 의한 살인이라는 점에서 적군을 "죽여라." 전장에서 용감하게 "죽어라."라고 명령하는 전쟁을 꼭 빼닮았다. 그리고 이러한 합법적인 국가폭력에 대항하려는 행위, 예를 들면 불법화된 존재들의 도망을 돕거나 은신처를 제공하거나, 병역과 전쟁을 거부하는 등의 행위는 법과 시민사회의 안온함 바깥에서 실행될 수밖에 없는 비합법투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 마련이다.
사형수 자신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사형폐지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 일쑤이고 그러한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지만, 무장전선의 사형수들과 그들의 지원자들은 살아남아서 자신의 과오를 성찰하는 것뿐만 아니라, 살아남아야만, 이어지는 삶 속에서만, 고립된 운동을 넘어서는 연결 속에서만, 마지막까지 제대로 싸워낼 수 있기 때문에 사형폐지를 주장하는 것 아닐까.
여자들의 작지만 구체적인 승리, 티셔츠소송
1984년, 처음 마사시를 면회한 지하루는 2017년에 그가 다발성 골수암으로 구치소 안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 년에 걸친 관계를 이어갔다. 지하루는 애초에 무장전선과는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았고, 미쓰비시 폭파 사건이 감행되었던 1974년 당시에는 고등학생이었다. 마사시의 면회를 결심했을 때는 평범한 사무직에 종사하던 20대였는데, 우연한 기회로 마사시가 쓴 옥중서간집 <明けの星を見上げて(새벽별을 올려다보며)>를 읽고 난 후, 다니던 회사의 여름휴가를 이용해 상경해서 처음으로 마사시를 만나러 갔다고 한다. 1987년, 마사시의 사형이 확정된 후로는 가족과 변호사 이외에는 면회도 서신도 불가능해진 상황이 되었고, 지하루는 호적상의 여동생이 되어 면회를 이어가면서 옥중에 있는 마사시와 옥외의 사회를 잇는 장(場)으로서 교류지 <기타코부시(キタコブシ)>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마사시가 사망할 때까지 178호가 발행되었다.
영화 속에서 지하루가 "(마사시를) 우러러보는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지하루는 우먼리브운동의 영향으로 사회에 대한 수많은 의문을 연상의 여성들과 나누며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과 생각에 대한 도리를 배웠다고 한다. 1970년에 시작된 우먼리브운동(Women’s Liberation Movement)은 전공투를 계승한 여러 운동 중의 하나로, '리브'는 '리버레이션'의 앞 글자다. 전공투의 바리케이트 안에서도 존재했던 여성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 성적 대상화에 대해 여성들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등장한 운동이다. 바리케이드 안에서조차 밥하고 설거지하는 것은 대체로 여성이었고, 경찰들과 싸울 때도 그들은 뒤로 물러서 있어야 했다. 우먼리브는 함께 싸우고 있으면서도 함께 싸울 수 없었던 경험에서 비롯된 여성운동인 동시에, 전공투 운동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새로운 감각들 덕분에 생겨난 운동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 우먼리브 운동을 했던 여성해방학생전선은 '우리가 바로 전공투의 계승자'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2024년 봄, 지하루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교토에 찾아갔을 때 들었던 여러 에피소드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티셔츠 소송'으로 불리는 재판투쟁이다. 감옥 바깥의 지원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티셔츠에 써서 무장전선 멤버들에게 전달하려 했던 시도에 대한 도쿄 구치소 측의 저지에 항의하며 제기된 소송이었다. 이 소송은 감옥 안에 있는 사형수와 감옥 바깥에 있는 지원자들이 공동원고가 되어,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판사 앞에서 직접 자신들의 의견을 진술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변호사들이 법적인 상식에 기대어 작성한 소장과는 달리, 이들이 써내려 간 탄원서와 글은 기존의 법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후쿠오카 지방법원에 접수되었지만, 마스나가 도시아키와 마사시가 수감되어 있던 도쿄 구치소 측에서호송 과정에서의 경비 문제 등을 이유로 들며 이들을 법정에 내보내 주지 않았다.
여성 지원자들은 궁리 끝에 마사시와 마스나가의 인형을 사람 크기로 만들어서 후쿠오카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의 원고석에 앉히고, 인형들과 함께 공동원고가 되어 법정에 서는 재기발랄함을 보였다. 이들의 기발한 상상력과 언변 덕분이었는지, 담당 판사는 마사시와 마스나가 두 사람의 진술을 듣기 위해서 직접 교섭을 통해 도쿄 구치소에 임시법정을 세워달라고 요청했고, 일반인들의 방청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결국 도쿄 구치소 안에서 임시법정이 꾸려져 1심에서 일부 승소라는 놀라운 성과를 이끌어 냈다.
티셔츠소송의 승소 판결 확정 이후, 전국의 구치소에서 사형이 확정된 이들에게 현금과 우표를 차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여성 지원자들은 재판이 끝난 후 반드시 옥외 보고회를 마련하여 법정에서 있었던 일과 재판 내용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기획했다. 법정과 감옥의 안팎에서, 법의 언어가 아닌 자신들의 언어로 이러한 이야기의 장(場), 말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티셔츠 소송은 큰 의미가 있다. 지하루는 이를 가리켜 "작지만 구체적인 승리"라고 말한바 있다.
지하루는 <기타코부시>를 발행하는 활동을 하면서도 이 교류지가 마사시의 근황을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활동이 무엇인지 친구들에게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는 남성 운동가를 옥바라지하는 여성 지원자라는 전형성에서 비껴난, 다른 층위의 활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지하루는 우먼리브운동에서 그랬듯이, 여성이 아닌 '여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자'는 몸에서 나오는 표현이고, 그렇기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여자들의 운동인 페미니즘 또한 학문의 대상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지하루의 말을 들으면서, 생활투쟁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것의 중요함을 생각하게 된다.
무장전선 부대원들이 일제히 검거된 1975년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된 지원운동은 당파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은 이들이 다수 속해 있었다는 특이점을 갖는다. 일용직 노동자, 사무직, 공무원, 아티스트, 라면가게 주인, 스트리퍼 등이 지원운동에 뛰어들었다. 지식인들 중심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몸을 움직여 스스로 사상을 구축하고 전선을 이어가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겐 전위당과 대표자 대신 각자의 소박한 현장과 나름의 언어가 있었다.
지금까지 무장전선을 지원해온 여자들 또한 조력자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활동으로서 이어온 교류지 <기타코부시>의 발간과 티셔츠소송과 같은 작지만 구체적인 승리의 사례를 통해 무장전선의 곁에서 새로운 전선(戰線/前線)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투쟁이 길어 올린 공동의 현장에서 유독 빛났던 힘, 상상력을 지금-여기를 살아내는 앎과 삶의 단서로서 놓치지 않고 싶다.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 동물, 난민, 여성, 가해자성을 키워드로 대학 바깥에서 연구하고 활동하면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한국 상영과 공론장 기획에 힘을 쏟고 있다. 김미례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열 개의 우물>제작에 공동PD로 참여하였다. 최근의 공저로는 <수용 격리 박탈-동아시아 수용소와 난민>(서해문집, 2024), <군대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서해문집, 2023), <動物のまなざしのもとで>(勁草書房, 2022), <난민 난민화되는 삶>(갈무리, 2020), <동아시아 혁명의 밤에 한국학의 현재를 묻다>(논형, 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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