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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정부의 '물컵 채우기'? 일본은 강제동원 비석 철거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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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정부의 '물컵 채우기'? 일본은 강제동원 비석 철거로 답했다

[기자의 눈] 윤석열 정부, 일본 우익이 가치 지향점인가

"물컵에 비유하면 물컵에 물이 절반 이상은 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서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해 3월 6일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대법원 배상 판결 이행과 관련해 피고인 일본 기업이 아닌 제3자가 변제하는 방식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입장문'을 발표하며 이같이 밝혔다. 한국 정부가 대법원으로부터 법정 채권을 얻게 된 피해자들의 권리를 없애면서까지 한일관계 개선에 공을 들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물을 채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입장문 발표 후 사흘이 지난 9일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당시 일본 외무상은 일본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에 출석해 "어떤 것도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상'의 강제노동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것들을 강제노동이라고 표현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강제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했다.

이후 16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2018년에 그동안 정부의 입장, 정부의 1965년 협정 해석과 다른 내용의 판결이 (대법원에서) 선고됐다"며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어 정부 해법안 발표 이후 약 한 달이 지난 4월 11일 공개된 일본의 '2023 외교청서'(外交青書)에서는 강제동원 사안과 관련해 일본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빠져 있었다.

청서에는 "한국 정부가 발표한 조치는 2018년 대법원 (징용 배상) 판결에 의해 매우 엄중한 상태에 있던 한일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이번 발표를 계기로 조치의 실행과 함께 한일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분야에서 교류가 강력히 확대돼 나갈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고 적시됐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에 민간 기금을 모금해 피고인 일본 기업 대신 피해자들에게 판결금을 지급하는 것이 정부 해법안이었고 여기에 일본 기업의 참여를 이끌어내겠다고 했지만, 실제 일본 기업이 자금을 투입하지도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 1월 29일 일본 군마현 다카사키(高崎)시 현립 공원 '군마의 숲'에 위치한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가 철거됐다. 해당 추도비는 조선인들에 대한 강제동원 및 노역의 역사를 반성하고 기억한다는 의미로 지난 2004년 시민단체 주관으로 군마현 의회의 동의를 얻어 해당 장소에 건립됐다.

이 추도비는 10년 기한으로 지어졌는데 2014년 6월 철거를 주장해던 일본 우익단체인 '소요카제'(산들바람)가 추도비 철거 청원을 냈고 이를 현 의회가 채택했다. 이후 현 당국은 7월 기간 연장 불허를 결정했고 시민단체가 이에 반발하면서 법원에서의 다툼이 시작됐다.

일본의 우익 단체는 추도비 앞에서 정치적 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설립 조건이었는데 이를 어겼다며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익 단체가 문제 삼은 정치적 행사의 발언은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시민단체와 현 당국 간 법정 다툼은 2022년 일본 최고재판소의 결정으로 마무리됐다. 최고재판소는 현 당국의 손을 들어줬던 2021년 도쿄 고등재판소의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에 군마현은 지난해 4월 철거명령을 내렸고 이날 실제 철거에 돌입하는 행정대집행을 실시했다.

일본의 이같은 행태에 대해 한국 정부는 물컵의 반잔을 채우라고 촉구하기는커녕, 이미 철거가 집행된 추도비를 다시 그 자리에 세울 수는 없으며, 최고재판소 결정에 따라 적절한 부지로 이전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1월 29일 일본 군마현 다카사키시 현립 공원 '군마의 숲'에 있는 조선인 추도비의 철거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연합뉴스

이처럼 박진 장관의 발표 이후 약 1년 간 강제동원 사안을 둘러싸고 전개됐던 과정을 보면 정부는 일본이 물컵의 반을 채우도록 유도하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의 '강제동원 역사 지우기'에 동조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미중 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이전과 다르게 경제와 안보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정부의 정세판단은 일견 타당한 측면이 있고, 그에 따라 일본과 협력을 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이는 동북아 세력 균형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사 문제에서까지 일본의 주장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역사 문제는 역사문제 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한일 간 협력을 해야 할 부분은 협력을 하는 것이 이제까지 한국 정부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를 균형있게 해내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문재인 정부가, 실제 북한에 준 것도 거의 없지만, 북한과 관계 개선을 위해 북한이 원하는 것을 다 퍼주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여기서 문재인을 윤석열, 북한을 일본으로 바꾸면 지난 1년 간 강제동원 사안과 관련해 윤석열 정부가 대처했던 모습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윤석열 정부가 때마다 부르짖는 '가치'가 일본 우익이 지향하는 가치와 같지 않다면,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이 수십년 간 법정 투쟁을 통해 대법원으로부터 얻은 법정 권리를 빼앗을 것이 아니라 일본의 역사 지우기에 반대한다는 명확하고 단호한 입장을 내는 것과 동시에 강제동원 '해법'은 조속히 철회해야 한다. 정부의 공탁은 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고, 피해자들의 승소는 계속 이어지고 있어 해법안이 지속가능하지도 않은 상황이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독도가 분쟁지역이라는 신원식 국방부 장관의 인식까지 공개된 와중에, 러시아와 북한에는 아주 단호하면서 일본과 과거사 사안에서만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면 윤석열 정부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오해하게 된다. '내선일체'(內鮮一體)급의 '흑역사'를 쓰려는 건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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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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