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학창시절에는 착한 학생이었다. 사실 그 시절에 착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마는 학교에서 집으로, 집에서 학교로 다니는 길 외에는 샛길로 빠진 경험이 별로 없다. 당시 성남은 청계천에서 밀려나온 철거민들이 주로 살고 있어서 마을은 온통 지저분했고, 초기에는 상수도도 공동수도 하나, 화장실도 공동화장실 하나 등등 사람살기에는 결코 바람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니 가끔 등·하굣길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착한 학생들을 힘들게 하고 용돈을 챙기는 일도 종종 있었다. 큰 도시에 사람은 많고 학교는 별로 없어 버스를 타거나, 새벽에 일어나 걸어가야 했다. 당시 원주민의 후예 중에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결국 중간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날건달(?)이었지만 필자에게는 삥(?)을 뜯거나 힘들게 하지 않았다. 필자가 성적이 좋은 편에 들어서 그랬는지, 등굣길에 자주 만나서 함께 등교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 친구는 전교생이 부담스러워하는 아이였는데도 불구하고 필자에게는 늘 호감으로 대했다. 하루는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해서 간 적이 있었는데, 움막보다 조금 넓은 판잣집이었다. 그때 그 녀석의 어머니가 “어쩐 일이니, 해찰하지 않고 곧장 집에 들어오게?”하시는 것이었다. 평소에 해찰하지 않은 필자는 ‘해찰’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그 녀석의 행동으로 보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해찰은 순우리말이다. “1. 마음에 썩 들지 아니하여 물건을 부질없이 이것저것 집적거려 해침 2.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함”이라는 단어인데, 그 당시에는 무슨 뜻인 줄 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했었다. 조선시대에는 황해도 관찰사도 ‘해찰’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요즘도 해찰하고 다니는 녀석들이 많은데, 이런 아름다운 우리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움이 많다. 예문을 보자.
옷가게에 마음에 드는 옷이 없어서 해찰만 하다 왔어.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공연히 해찰만 부린다.
하굣길에 아이들이 책가방을 든 채 길거리에서 해찰하고 있다.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요즘은 “곧장 집에 와~!”라고 표현하는 주부들이 더 많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아서 해찰하기 딱 좋은 나이다. 하교하다 보면 시나브로 뭔가에 끌리듯이 다른 것에 관심이 쏠리고 해찰하게 마련이다. ‘시나브로(모르는 사이에 조금씩)’라는 말도 상당히 고급스러운 우리말인데 잊혀가고 있다. 지방에 내려가면 방언으로는 많이 들을 수 있다. ‘시나므로, 수나수나(순아순아), 시나미, 시남없이, 서나서나’ 등이 모두 ‘시나브로’에 해당하는 방언들이다.
가을이 되니 시나브로 길가에 낙엽이 쌓이기 시작하는구나!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시나브로 없어지고, 가을비만 주룩주룩 내립니다.
와 같이 문장 속에서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는 우리말이다. 굳이 조선시대 문인들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말이 외국어에 밀려나는 것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요즘은 영어나 불어를 섞어 써야 유식해 보이는 모양이다.
한류가 세계를 주름잡고 있고, 한국어 또한 한류의 한 분야가 되었다. 외국인들이 우리말의 소중함을 인정하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착한 BTS(방탄소년단)가 “소복소복”이라고 노랫말에서 알려주니, 세계인들이 사전을 찾아보는 것이 아닌가? 노랫말에 아름다운 우리말을 많이 살려주기를 바란다. 사랑해요! 나의 방탄소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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