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추행을 인정받기 위해선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폭행·협박'이 필요하다는, 성폭력 판단에 있어서의 '최협의설'이 대법원 판례로 뒤집혔다. 피해상황 당시 피해자가 폭행 또는 협박을 당했거나 항거불능 상태여야만 추행사실을 인정하던 기존의 판례는 '유형력의 행사' 혹은 '피해자의 공포심' 등을 기준으로 40년만에 새롭게 정립됐다.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4촌 친족관계의 피해자를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에 대해 "피고인의 행위가 피해자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에 해당하지 않는다"라며 성폭력처벌법 위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유죄 취지로 서울고법에 파기이송했다.
A씨는 지난 2014년 자신의 방 안에서 당시 15세였던 본인의 사촌동생 피해자에게 "(본인의 신체부위를) 만져줄 수 있느냐" 물으며 피해자의 손을 자신의 성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피해자가 이를 거부하며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한 번만 안아줄 수 있느냐"라며 피해자를 양팔로 끌어안고 침대에 쓰러트려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A씨는 "가슴을 만져도 되느냐"라며 피해자의 신체부위를 만지는 등 추행했다. A씨는 피해자가 "이러면 안 된다"라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음에도 그를 뒤따라가 피해자를 끌어안는 등 강제로 추행하기도 했다. 이때 A씨가 피해자에게 건넨 "만져달라", "만져도 되느냐"는 등의 말이 원심 무죄판결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되며 "피고인은 피해자에 대하여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을 가했다"라며 징역 3년의 유죄를 선고했지만, 2심 재판부는 A씨가 당시 피해자에게 건넨 말들이 "객관적으로 피해자에게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말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A씨가 이 같은 말을 하면서 피해자를 추행할 때 "피해자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2심 재판부가 설명한 무죄판결의 취지였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기습적인 상황과 가해자의 방 안이라는 장소의 특수성, 추행행위를 예고하는 가해자의 발언 등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위력'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셈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강제로 껴안거나 침대에 눕혀지는 등의 유형력을 행사당하고도 성폭력 피해를 인정받지 못했다.
강간, 추행 등 성폭력에 대해 '폭행이나 협박', 혹은 '항거불능' 상태가 증명돼야만 피해 사실을 인정하는 이 같은 판례는 여성계로부터 "실재하는 피해를 누락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형법상 강제추행죄는 강제추행의 정의를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하는 행위로 이르고 있다. 법리를 '최대한 협소하게' 해석하는 법원의 관습으로 인해 가시적인 폭행, 협박이 부재한 사건의 피해자들은 강제추행을 '강제'라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에 내몰려왔다.
일종의 보완규정인 준강간·준강제추행죄(제299조)가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 준강간 및 준강제추행으로 규정하고 있긴 하지만 이 또한 입법공백을 제대로 매우지는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2018년 발간한 <젠더 폭력 관련 법체계 개선방안>에서 "강간죄의 폭행·협박이 성폭력범죄의 기본적인 유형이므로, 이와 동일한 법정형이 규정된 준강간죄의 경우 심신미약의 상태를 제외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로 협소하게 규정된다"라며 준강간죄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형법 299조에 함께 묶여있는 준강간과 준강제추행은 그 판단기준이 동일하다.
재판부의 판단을 통해 형법상의 불완전함이 극복되는 경우도 있지만, 2012년 대법원이 "강제추행죄는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해 사람을 추행하는 범죄다. 폭행이나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하는 등 지금까지의 판례는 통상 '최협의설'을 기준으로 내려져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내려진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강제추행의 요건 자체를 완화해 실질적인 '입법보완'의 사례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날 재판부는 "(법리, 사회적 변화에 따라)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는 다시 정의될 필요가 있다"라며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은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로 강력할 것이 요구되지 아니하고, 상대방의 신체에 대하여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일반적으로 보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특히 법원은 "이 사건의 쟁점은 이른바 폭행·협박 선행형의 강제추행죄에서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를 위와 같이 제한 해석한 종래의 판례 법리를 유지할 것인지 여부"라며 "추행의 수단이 되는 폭행 또는 협박에 대해 피해자의 항거가 곤란할 정도일 것을 요구하는 종래의 판례 법리를 폐기한다"고 확실시했다.
"강제추행죄의 범죄구성요건과 보호법익, 종래의 판례 법리의 문제점, 성폭력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 판례 법리와 재판 실무의 변화에 따라 해석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성 등에 비추어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는 다시 정의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법원의 이번 결정 취지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정도에 관하여 대법원이 1983년도부터 상대방에 대하여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하여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고 한 종래의 판례(83도399) 법리를 40여년 만에 변경한 것"이라며 "현재의 재판 실무와 종래의 판례 법리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형평과 정의에 합당한 형사재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대법원은 이번 판결이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을 법문언 그대로 해석하자는 취지"라며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자는 취지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폭행 또는 협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쟁점일 뿐, 폭행 또는 협박이 아니라 '피해자의 동의여부'를 강제추행 인정의 기준으로 삼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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