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에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나서 지도교수께 책을 드릴 때 뭐라고 써야 하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교수님께서는 성명을 쓰고 뒤에 ‘혜존(惠存)’이라고 쓰면 된다고 하셔서 그 후로 계속 책을 내면서 아무 생각 없이 ‘혜존’이라고 써 왔다. 그 후 한참 지나서 ‘혜존’이 일본에서 유래한 표기이니 다른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세간에 돌았다. 사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알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한동안 ‘혜존’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찝찝했는데, 이참에 이에 대한 각종 문헌을 찾아 정리하는 것이 어떨까 하여 고문헌을 뒤져 보았다.
2009. 2. 16 자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에는 “혜존”에 대한 말이 일본말이라는데 써도 되냐는 질문이 올라와 있다. 이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답변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본말이라는 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며 자기의 저서를 남에게 줄 때 받는 사람 이름 옆에 써서 ‘잘 받아주십시오.’란 뜻으로 쓰인다.”라고 마무리를 하였다. 국립국어원의 해석에 의하면 아무 문제가 없으니 그대로 써도 된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이의제기한 사람이 있다. 김봉구라는 사람이
혜존, 惠存>은 ≪한국문집총간≫ 자료에서 20여 곳에 나타나는 말로 <이 책을 받는 것이 은혜로워·‘惠’ 잘 보존 ‘存’하겠다>는 뜻이며 한자로는<受此冊爲感惠故保存以重>라는 예문을 제시하고 있다. 해석하면 우리나라 선비들이 오래전부터 써 왔던 말로써 책을 받는 사람이 ‘귀한 책을 주셨으므로 잘 읽고 보존하겠다’는 뜻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선비들이 주고받던 책이란 <문집>을 말하며 <문집>이란 당사자가 세상을 하직하고 난 뒤 그 후손이나 제자들이 선조의 글을 모아 책으로 엮어 발간하는 것을 말한다고 풀이해주고 있다. 그래서 <문집>은 <사후(死後) 문집>을 두고 이른 말이었다고 한다. 살아있을 때는 문집을 내지 않는 것이 옛 선비들의 전통관례였으며 살아있으면서 문집을 내면 <생문집(生文集)>이라 하여 천한 일로 배척했던 것이 우리 조상들이다. 보통 문집은 책 제목이 없는데 이를 받은 사람이 겉표지에 문집이름을 적고 속표지에는 누구에게서 언제 받았는지를 적은 다음 책을 준 사람 이름 끝에다 <은혜롭게 주시기에[惠] 잘 보존[存]하겠다>는 뜻인 <혜존>이라는 말을 적어 고마움을 나타내던 것이 우리겨레의 “혜존”이었다.(이경임, <나도 “혜존”이라고 사인한 책을 받고 싶다> 재인용)
라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혜존이라는 말은 과거에도 “보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혜존(惠存)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 것은 당나라의 시인 낙빈왕(駱賓王, 640~684)이라는 사람이 쓴 <與博昌父老書박창에 있는 노인(아버지)에게 드리는 글>에
故可治賞當年 相歡卒歲(고가치상당년 상환졸세 : 그때 함께 놀던 시절 그리며 기꺼이 해를 보낼제)
寧復惠存舊好 追思昔游(영부혜존구호 추사석유 : 그때의 기억을 잘 간직하고 옛일을 회상하시기 바랍니다)
와 같이 나와 있다. 그러므로 이미 당나라 때부터 사용하던 어휘다. 일제를 운운하기 이전부터 사용하던 것이니 ‘혜존(惠存)’을 쓴다고 해서 무리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받은 사람이 잘 간직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언어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으니 널리 사용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다만 굳이 잘 간직해달라고 하기 어려울 경우 ‘삽장(揷藏 : 서가에 꽂아 두고 보십시오)’이라고 쓰면 어떨까 한다. 이런 것도 어렵다면 우리말로 ‘드림’이라고 해도 좋다. 그것도 불편하다면 ‘감사의 인사’를 간단하게 적어서 보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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