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를 누가 말려? 올해도 우리가 이겼다!"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의 윤김명우 사장이 익살스럽게 외쳤다. 67세의 윤김 사장은 20여 년 전, 퀴어문화축제의 태동기 때부터 광장을 지킨 이른바 '퀴퍼 대모'다. (관련기사 ☞ '퀴어퍼레이드 고인물' 레즈비언 바 사장이 만드는 '공간')
<프레시안>은 1일 을지로 2가 일대에서 펼쳐진 2023년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 현장에서 1년 만에 윤김 사장과 다시 만났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차별행정' 논란이 거셌던 이번 퀴어문화축제를 두고 윤김 사장은 "결국은 우리가 다시 이긴 것"이라며 투지를 불태웠다.
매년 서울광장에서 열리던 축제였지만, 지난 5월 서울시 열린광장운영위원회가 퀴어문화축제 측의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하면서 올해 24회 축제는 광장이 아닌 을지로 일대 도로에서 열렸다. 서울시는 동시 신청된 기독교 단체의 '청년·청소년 회복 콘서트'가 "조례 상 우선순위에 해당"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이후 공개된 열린광장운영위의 회의록에선 "동성애 축제를 허용할 순 없다"는 등의 혐오발언들이 가득했다.
다만 이날 축제를 찾은 참여자들은 "오히려 좋다"라고 외치며 잔디 대신 아스팔트를 딛고 섰다. 20년 넘게 축제 현장을 봐온 윤김 사장은 "이렇게 모범적으로 (축제를) 운영하는데, 이제는 반대파들도 좀 수긍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땡볕 아래에서 밝게 웃었다.
"퀴어들에겐 포기가 없어, 오로지 전진이지."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찾은 김민준 씨는 "서울광장이 축제를 진행하기에는 좀 더 원활한 측면이 있지만, 막상 나와보니 개방감이 느껴지는 도로 위 축제도 나쁘지 않다"라며 "차를 타고 다니는 시민 분들이 우리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지 않겠나, 퀴어 가시화 측면에서 오히려 좋다"고 이번 축제의 소감을 밝혔다.
영남지역 성소수자 지지모임에서 대표를 맡고 있는 민준 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전국 곳곳의 퀴어문화축제 현장을 찾아다녔다. 이날도 아침 일찍부터 서울을 찾은 민준 씨는 "우리 대구지역에선 홍준표 시장이 혐오세력의 편에 서서 퀴어축제 현장을 찾았다"라며 "오세훈 서울시장님은 인권과 평화의 마음으로 여기 방문하면 어떤가" 하고 넉살좋게 웃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달 13일 서울시의회 시정 질의응답에서 퀴어문화축제에 대해 "성소수자가 하는 모든 행사가 약자로서 배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찬성할 수 없다"는 등의 발언을 하며 혐오발언 논란에 휩싸였다. 이 같은 발언은 지난 5월 3일 실시된 제4차 열린광장운영위원회 속기록에서 발견된 혐오발언들과도 궤를 같이한다. 당시 한 위원은 "대한민국 자체가 성소수자를 인정하는 문화로 되면서 청소년들의 건전, 성문화에 대한 인식이라든지 이런 면에서 교육적이지 않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축제 현장을 찾은 써니(활동명)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가는 서울시 행정영역에서 드러난 일련의 혐오사례들을 두고 "세상이 변하는 것도 모르고 이렇게 인권을 모르는 발언을 한다"라며 "이런 분들이 결정권자 위치에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세상은 이들보다 더 빠르고 많이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5년 전 아이의 커밍아웃으로 '성소수자 부모'가 된 써니 씨는 그제야 "우리 사회가 성소수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부모모임에 가입했다. "배운 게 없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 건, 모임에 나와 "성소수자 자녀들의 이야기를 배우고, 더 정확하게 알게 되면서"였다.
써니 씨는 "(아이를) 배우고 이해하게 되면서 오해도 갈등도 없어졌다. 지금은 (자녀와의) 관계도 좋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대학생인 그의 자녀도 이날 현장에서 부스 행사를 진행했다. "결국 (성소수자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 말하며 써니 씨는 우산을 펼쳐보였다. 무지개색 우산이 혐오발언이 써 붙여진 현수막을 가렸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이날 현장엔 다양한 단체들이 참여해 부스행사를 진행했다. 구글, 이케아 등 초국적기업을 비롯해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독일, 영국, 미국 등 한국주재 해외 대사관들, 각 대학과 고등학교 내의 성소수자 지지모임은 물론 천주교, 불교 등 종교단체들도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참여자로 자리를 함께했다.
축제를 찾은 조진선 가톨릭 수도회 성가소비녀회 수녀는 가톨릭 단체의 축제 참여 취지를 묻는 <프레시안>의 질문에 "무슨 취지가 필요한가요?"라고 되물었다. '가톨릭 성소수자 앨라이'로서 현장을 찾은 조진선 수녀였지만, 그는 "누구든 존재 자체로 존엄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힘을 줘야한다는 말도 사실 어폐가 있는 말"이라고 강조했다. 현장 인근에선 보수기독교 단체의 '동성애 반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조 수녀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 존엄을 인정받아야 마땅한 세상"이라며 퀴어문화축제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누구나 존엄한 존재잖아요? 우리는 그걸 기도로 표현하기 위해 여기에 왔어요."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측은 올해 축제의 슬로건인 '피어나라 퀴어나라'의 의미를 두고 "우리가 살고 싶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염원을 담아냈다"고 밝혔다. 광장 잔디 위가 아닌 을지로 거리 위에 피어난 이번 축제의 모습과도 문구의 의미가 겹쳐진다. 차별적인 행정은 소수자들을 광장 밖으로 '밀어'내려 했지만, 퀴어 당사자들의 존엄은 길 위에서 다시 '피어'났다. "그래도 무지개는 뜬다." 지난 5월 서울광장 불허 사건 이후 퀴어 당사자들이 외치고 있는 저항과 전진의 문구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등 성소수자인권단체들은 축제가 한창인 이날 오후에도 서울시청 정문 앞에서 이 문구를 내걸었다. 시청 앞에 모인 이들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드러내고 시민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을 축소하는 서울시의 차별행정을 규탄한다"라며 기자회견과 자유발언, 축복기도회 등을 포함한 4시간가량의 릴레이 집회를 이어갔다.
기자회견에 참여한 심기용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활동가는 "우리가 벗으면 '문란'이고, 다른 시민들이 벗으면 '열정'이고 '축제'인가" 꼬집으며 "이미 성소수자를 문란한 존재로 낙인 찍고 광장을 불허한 서울시, 그리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사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공공성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들에겐 서울광장을 개방할 수 없다'는 발언이 포함된 지난 5월의 열린광장운영위 회의록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열린광장시민위원회에 묻겠습니다. 저는 동성애자입니다. 제가 지금 여기 계신 시민과 우리의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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