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99강은 청주에서 진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한남금북정맥에서 가장 높은 좌구산(657m)에서 발원한 삼기천이 부려놓은 충북 <증평고을>로 갑니다. 증평에서는 조선의 개국공신 배극렴, 연사종, 황희석과, 충절과 학문이 높았던 김득신, 신경행의 유적을 둘러보고, 고려 시대의 불상과 석탑도 감상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99강은 2023년 7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99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증평읍율리(김득신묘/석조관음보살입상)-남차리(청연사/신경행묘)-죽리(양무공사)-남하리(마애불상군/삼층석탑/석조보살입상)-송산리(보강천미루나무숲/김득신문학관)-송산리(석조관음보살입상/배극렴묘)-도안면광덕리(광덕사석조여래입상)-석곡리(연병호항일역사공원/연병호생가)-도당리(정후사)-증평읍사곡리(사곡리말세우물)-서울의 순입니다.
*답사 도중에 점심식사 겸 뒤풀이가 있습니다.
*코로나19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99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증평은 동쪽으로부터 북쪽에 이르는 좌구산, 칠보산, 보광산, 백마산, 두타산 등 500~600m 높이의 산들이 적절한 간격과 거리를 이어가며 병풍처럼 감싸 안아주고 있습니다. 좌구산에서 이어온 삼보산과 두타산에서 흘러내린 이성산이 마주 보면서 그 산들의 앞과 옆으로 논두렁 밭두렁이 수를 놓듯이 들판을 펼쳐 놓고 있으며 북쪽으로 음성, 남쪽으로 청주, 동쪽으로 괴산, 서쪽으로 진천과 맞닿아 있습니다.
증평은 시기별로 진천, 청주, 괴산에 흡수 합병된 역사였습니다.
증평은 고구려 475년에는 금물노군 도서현이었고 통일신라시대는 청연현을 설치, 흑양군(진천)의 영현이 되었으며 고려 940년에는 도서현, 도안현으로 개칭하고 청주목의 속현이 되었습니다. 조선 1405년에는 청연현과 도안현을 청안현으로 합병하여 감무를 두었고 태종 13년 현감을 두고 청주진 관할 하에 두었고요. 1895년 청안현을 청안군으로 하고 그 밑에 읍내면, 동면, 서면, 근서면, 남면, 북면 등 6면을 두었습니다. 일제강점기 1914년 청안군이 괴산군에 흡수 합병되었고 대한민국 1949년에는 증평면이 증평읍으로 승격하였으며 2003년 증평군 행정구역 1읍, 1면, 112리로 확정되었습니다.
읍치가 괴산으로 옮겨져 읍치 구역의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동헌(東軒)은 증평읍 미암리에 시장과 함께 있었고 지금의 삼거리를 금부라 했으며 미암리 2구의 시화 부락에는 각처에서 모여드는 상인들의 말 때문에 역마촌(驛馬村)을 이루었으나 동헌이 괴산으로 옮겨가서 과거 읍치 구역에는 아무런 유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동헌이 괴산으로 옮긴 연유가 기막힙니다. 어느 해 부임한 신임 사또의 부인이 아름다웠고 부부간의 금실도 좋았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사또 부인은 부처 당골에 있는 절을 찾아가 자식을 얻기 위해 불공을 드렸는데 아들이 생기지 않자, 자식을 보겠다는 한결같은 마음 때문인지 스님을 유혹하여 정을 통하였고 이러한 좋지 못한 행동이 길어져 사또가 알게 되었습니다. 사또는 두 사람의 잘못을 무거운 죄로 다스려 온 고을 백성이 보는 앞에서 머리, 몸을 토막 내서 죽이고 충청감사에게 진언하여 동헌을 지금의 괴산군 청안면으로 옮겨가므로 이 고을은 다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고을 일부 동리를 망골이라 하고 죄인을 다스리던 의금부 자리인 현재 삼거리를 옥고개라 합니다.
사곡리 말세우물은 물이 넘쳐 국란을 미리 알렸습니다.
사곡리 우물은 달리 말세우물이라고도 하는데, 가뭄이 극심하던 1456년(병자년) 여름, 길을 지나던 한 노승이 물을 청하자, 마을에 우물이 없어 저녁 늦게야 물을 한 그릇 떠오니로, 물을 마신 노승이 가엾이 여겨 지팡이로 앞에 있는 고목나무를 가리키며, 이곳에 우물을 파면 겨울엔 따뜻한 물, 여름엔 찬물을 얻을 것이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장마가 와도 넘치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우물이 세 번 넘칠 날이 있어 넘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일어날 것이니, 세 번째 넘치는 날에는 말세가 될 것이니 그때 이 마을을 떠나라 하고는 노승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반신반의 듣고 있던 마을 장정들이 고목나무를 뽑아내고 땅을 파니 노승의 말대로 맑은 물이 솟아올라 마을 우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던 중 1592년 정초에 우물이 처음으로 넘쳐서 그해 임진왜란이 있었고, 두 번째로 1910년 우물이 넘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를 당했고, 그 후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우물이 지면 1m 안까지 물이 불어나 전쟁 발발을 예고했다 합니다. 1996년 5월 마을 사람들이 유래비를 세우고 2007년에는 우물을 원형으로 복원하고 우물이 세 번째 넘치지 않기를 매년 정초에 기원하고 있습니다.
증평의 산들은 사연도 많습니다.
좌구산(座龜山)은 증평군의 최고봉으로 칠보산, 보강산, 백마산, 종지봉, 두타산을 잇는 까막산 줄기의 거봉입니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에 있는 망월산에서 올려다보면 산의 모형이 거북이처럼 생겼다고 자리 좌(座), 거북 구(龜)자를 써서 좌구산이라고 부릅니다. 일명 개 구(狗)자를 써서 좌구산(座狗山)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달리 부르는 연유는 광해군 때 병조 참지를 지냈던 김치가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으로 신병의 위협을 느껴 점술과 천문에 능한 자기가 자기의 관상을 보니 이듬해인 인조반정의 해(1623년)에 죽게 되는지라 관직을 하직하고 좌구산 밑의 율리 마을에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한양의 심기원, 최명길 등과 내통하여 인조반정을 밀의하였습니다.
어느 날 김치에게 심기원이 찾아와 능양군(인조)의 사주와 반정을 일으킬 일자를 점쳐 달라고 하였답니다. 김치가 물치폭포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점을 쳐보니 능양군이 임금될 쾌라, 반정 일자를 천파일(天破日)로 정하여 주고, 반정 밀담을 나눈 뒤 일행이 깊은 잠에 빠졌을 때, 한밤중임에도 동편 좌구산에서 개가 3번이나 크게 짖어대므로 잠에서 깨어 누가 염탐하러 온 것을 알고 그곳을 즉시 피하므로 무사하였다 합니다. 그 후 김치는 이 산을 거북 구(龜)자 좌구산이 아니라 개가 짖음으로 사람을 구하고 반정의 성공을 도와준 명산이니 개 구(狗)자를 쓴 좌구산(座狗山)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두타산(頭陀山)은 연암천과 자양천의 발원지입니다. 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영수사, 원융사, 태화사, 보타사, 법천사, 연화사 등 절과 암자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지명의 유래는 중국의 지리지인 <산해경> ‘해외동경편’에 “칠년홍수 치산치수 단군신팽우(七年洪水 治山治水 檀君臣彭虞)”로 기록되어 있어, 지금으로부터 4,300년 전 단군성조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 오랫동안 장마로 물난리를 겪을 무렵 이 지역도 평해(平海)로 변하니 백성들이 가장 높은 산으로 모여들어 수난을 피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대홍수 때 이 산의 산봉우리가 섬같이 보였다고 하여 머리 두(頭), 섬 타(陀)자를 따서 두타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또한 많은 백성의 생명을 도와준 산이라 하여 일명 가리도(加利島)라 부르기도 합니다.
삼보산(三寶山)은 물, 금광석, 산골의 세 가지 보물이 난다고 삼보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대동여지도>에도 삼보봉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첫째의 보배인 물은 초정리에서 개발한 세계 3대 광천수인 천연 약수와 남하리에서 나오고 있는 탄산 약수입니다. 초정리에서 나오는 광천수로 목욕을 하고 지속적인 복용을 하면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력이 있어 일찍이 세종대왕께서 119일 동안이나 머물면서 피부병을 고쳤습니다. 지금은 청원군에서 초정리 광천수를 개발하여 관광 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 남하리의 탄산 약수는 특히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 하여 진로에서 탄산수로 개발하였습니다.
두 번째의 보배는 금입니다. 삼보산에는 금광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으나 안동 김씨 종산으로 조상들의 묘소가 많고 자연환경의 파괴를 우려하여 안동 김씨 문중에서 금 채굴을 금하고 있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금 채굴을 못하도록 개를 잡아서 개 피를 온산에 뿌려서 금을 도굴하여도 그 금이 사금으로 변하게 되어 경제적 가치가 없어 채굴하지 않는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의 보물은 산골입니다. 산골은 광물질로 뼈가 골절되었을 때 접골재로 쓰이며 풍치로 인한 통증이 있을 때 담배에 섞어서 피우면 치료되는 무기물입니다. 이 산골은 우리나라 몇 곳에서만 생산되는 한방 치료재로 내수읍 호명리에서 산골을 채굴하고 있습니다.
망월산(望月山)은 궁중요리를 검사하는 사옹원 별좌 봉여해가 1457년 사육신들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자 수양대군을 살해하기 위하여 칼을 차고 어전으로 가던 중 의금부에 붙잡혀 죽게 되므로 그 친족들이 화를 면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 봉씨 일부가 증평읍 봉천리로 피난 와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하음 봉씨들이 망월산 정상에서 조석으로 한양을 향해 폐위된 임금에 대한 예로서 충절을 표하고 흩어진 친족들의 안위와 고향인 강화도를 향해 조상들을 기리기 위해 기원하는 곳입니다.
왕기봉(王起峰)은, 구전에 의하면 왕기봉에서 왕이 일어나고 국사봉은 나라의 일을 보는 곳이며, 진천군 진암리의 구정벌은 아홉 정승이 살게 되는 곳이고, 우군리에는 나라의 우군(右軍)이 있는 곳이고, 송산리 뒷산인 대봉산에는 장군들이 은거하며 나라의 좌군(左軍)이 있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병풍 모양의 두타산 정상의 능선 줄기에서 남쪽으로 향한 크고 작은 여러 산줄기의 형상들 모두가 왕기봉을 향해 감싸 모아주는 형국이고, 왕기봉에서 앞들을 보면 동쪽의 연암천과 남쪽의 장래천서 물이 합수되어 보강천을 이루어 들어오는 형상이라 왕기봉 기슭에서 왕이나 그와 같은 큰 인물이 태어날 수 있는 명당이라고 했습니다.
물줄기는 삼기천, 자양천, 연암천, 보강천이 흐릅니다.
삼기천(三岐天)은 좌구산에서 발원하여 사곡교에서 보강천과 합류하기까지 길이 16km, 증평에서 가장 긴 하천으로 수질이 좋고 주변 경관이 수려하여 옛날부터 삼기천의 물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예와 학문에 밝고 이를 숭상하여온 인재가 많이 살았습니다. <대동지지>와 <증보문헌비고>에는 증자천(曾子川)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증자천으로 명명된 유래는 천변의 마을에 충절과 학문이 높은 조은 신경행, 지략과 예지력이 깊은 심곡 김치, 문장가이며 시인인 백곡 김득신 등의 인물들이 살았거나, 활동하여 온 곳이어서, 공자의 제자 중에 학문과 효행이 지극한 증자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현재 삼기천의 상류인 율리에는 심곡 김치와 백곡 김득신의 묘소가 있고, 물 따라 내려오다 보면 남차리(숯고개)에는 신경행 묘소가 있습니다.
보강천(寶崗川)은 증평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 흐르는 하천으로, 사리면 백마산과 보광산서 발원한 부석천과 도안면 두타산에서 발원한 연암천이 합류한 도안면 삼거리에서 청원군 북이면 석성리에 흐르고 있는 미호천과 합류까지의 길이 13km의 하천입니다. 이전의 이름은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반탄천(潘灘川)이라 불렸습니다.
자양천(紫陽川)은 두타산과 대봉산, 이성산에서 발원하여 자양리와 미륵댕이를 지나 보강천과 합류하기까지 길이 약 6km의 하천으로 삼기천, 연암천과 함께 증평의 3대 하천 중의 하나로서 미암골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천의 상류인 자양리 마을에는 따뜻한 물이 매장되어 있어 추운 겨울에도 샘이 얼지 않는다고 하며, 물이 맑고 풍부하며 수질이 좋아 475년(장수왕 63)에 인근지역을 다스리는 물노군(현 진천군) 도서현(도안현)의 읍치(邑治)가 자양천 변에 있었습니다. 하천의 중간쯤에는 1405년(태종 5)에 조선 시대 주요 교통로였던 시화역이 설치되어 그때부터 증평지역이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로서 역할을 해왔다고 봅니다.
연암천(硯岩川)은 두타산과 종지봉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내려오다가 음성군 경계인 백마령에서 내려오는 작은 하천과 합류하여 도안삼거리의 보강천에 이르기까지의 길이 약 8km의 하천입니다. 지명의 연원은 도안면 노암리에서 벼루 돌이 채석된 연촌리로 가는 벼루재 고개부터 물이 흘러내린다고 해서 벼루 연(硯)자와 바위 암(岩)자를 따서 연암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물길 곁에 있는 사기장 골에는 지금도 엷은 회청색의 대접과 접시의 파편들이 출토되는 분청사기 가마터가 있는데, 조선 시대에 이곳에서 만들어진 분청사기가 중앙에 토산 공물로 바쳐졌습니다.
삼국시대에 쌓은 산성들이 있습니다.
추성산성(杻城山城)은 이성산 정상에 한성백제 때 축조된 토성으로 남성과 북성으로 구분되고, 각각 내성과 외성을 갖춘 구조입니다. 성벽 상태가 양호하여 고대 토성의 특징인 판축 기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 내부에서 확인된 주거지, 망대지, 배수 시설과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통해 당시의 생활 모습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추성산성은 충주, 음성, 괴산에서 청주로 가거나 보은, 미원에서 진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두타산성(頭陀山城)은 두타산의 정상에 있는 석축 산성으로 남문과 동문지가 있으며 남문지의 외측에는 적 침투 방위를 목적으로 축성된 두 곳의 토루(土壘)가 있습니다. 성내에는 삼국시대의 경칠 토기 조각과 통일신라 및 고구려 시대의 토기 조각이 발견되며 2개의 우물터가 있습니다. 두타산성은 신라 장군 실죽(實竹)이 486년 이찬에 임명되어 백제군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는 설이 있으며, 실죽 장군은 보은의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개축하기도 하였습니다.
매봉산성은 이성산성, 수재산성과 비슷한 형태로 능선을 활용하여 토축한 것과 계곡부에 성벽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같습니다. 1997년 <曾坪 二城山城> 지표조사 보고서가 발표되었으나 구체적인 지표조사는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현지에서 유물이 수습되지 않아 정확한 시대는 알 수 없으나 서쪽에 있는 이성산성과 관련된 성으로 추측됩니다.
수재산성(壽才山城)은 해발 고도 198.5m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동쪽, 북쪽, 서쪽 일부에 토루가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반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고 남쪽 계곡에는 토루의 흔적을 볼 수 없습니다.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굴청이 골이라 불리는 남동쪽 계곡부에는 성을 방어할 수 있는 다른 시설물이 있었다고 하나 문헌이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군과 기자를 모신 사당도 있습니다.
단군전은 1948년 김기석 등 지역유지들이 홍익인간의 이념과 경천숭조 사상을 길러 민족정기를 빛내기 위해 본존과 담장을 세워 건립됐습니다. 1929년 세워진 일본 신사가 1945년 8월 16일 해방 이튿날 청년들에 의해 불타 없어진 그 자리에 건립된 단군전은 해마다 10월 3일 개천절과 음력 3월 15일 어천절에 단군전 봉찬회 주관으로 제향을 지내고 있습니다.
기성전(箕聖殿)은 1914년 한응각이 기자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입니다. 해마다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유림 행사로 제향을 지내고 있습니다. 영정은 설채지본(設彩紙本)으로,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있으며 영정 오른쪽 아래에 ‘김이삼 봉증’이라는 묵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김이삼이 모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마석은 500m 거리의 마을회관에 있습니다.
충절과 학문이 높은 김득신, 신경행의 유적이 있습니다.
김득신 묘소는 한남금북정맥의 최고봉 좌구산 자락에 만장이 잡아준 명당이 조선 중기 최대의 점술가이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남봉 김치(金緻)와 그의 아들 백곡 김득신이 묻힌 곳입니다. 이 묘터는 구전에 의하면 김치의 상여가 좌구산과 구녀산 사이로 난 영남대로의 분젓치를 넘어 한양으로 가던 중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상여의 만장이 날아가서 이곳에 앉는지라 명당이라고 생각한 후손들이 이 자리에 묘를 썼다고 합니다.
김득신(金得臣)은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자는 자공, 호는 백곡, 구석산인, 본관은 안동입니다. 진주 목사 김시민의 손자이며, 부제학 김치의 아들입니다. 1642년(인조 20) 식년시 진사에 3등 81인으로 합격했습니다. 이후 음보로 참봉이 됐으며 1662년( 현종 3)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 지제교 등을 거쳐 가선대부에 이르고 안풍에 봉해졌으며 숙종 조에 청백리에 올랐습니다. 신흠, 이정구, 장유와 함께 한문 4대가로 특히 시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사기>의 ‘백이전’을 1억 1만 3천 번 읽고 그의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했습니다. 효종은 그의 <용호한강시(龍湖漢江詩)>를 읽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저서로 <백곡집> <종남총지>가 있습니다.
신경행 묘소에는 봉분과 상석, 묘비, 망부석, 문관석이 있는데 동자석은 2005년에 분실돼 새로 조각해 설치했습니다. 묘소 아래에는 1969년 10월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묘소 입구 길가에는 2005년 4월에 다시 신도비가 건립됐습니다. 청연사(淸然祠)는 신경행을 봉향하는 사당으로 묘소 옆에 있습니다.
신경행(辛景行)은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했고 4년 뒤 별시 문과에 병과 9인으로 급제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고 그 공으로 1593년(선조 26)에 한산 군수가 됐습니다. 1596년(선조 29)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3등에 책록돼 영성군에 봉해졌습니다. 그 뒤 공주 목사, 서흥 부사, 장흥 부사, 병조 참의, 동부 승지, 남원 부사를 지냈고 1608년(선조 41)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렀으며 사후 예조판서에 추증됐습니다. 광해군 때 귀향해 증평나들목 부근 여암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반계(磻溪) 위에 조은정을 짓고 만년을 보냈습니다. 또 월은동의 연모사에 운수정을 짓고 이곳에서도 낚시를 즐기며 수양하다 77세로 숨졌습니다.
군방서원(群芳書院)은 1688년(숙종 14)에 신경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습니다. 1760년(영조 36)에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807년에 신경행의 8대조인 고려 태학사 장(藏)을 추가 배향하였고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그 뒤 지방 유림과 자손들이 협력하여 복원하였습니다. 경내에는 영당, 신문, 양쪽 협문, 재실, 홍전문 등이 있으며 영당에는 신경행 유상과 청난공신 책록 등 유품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행정구역상 괴산군에 속해 있습니다.
구계서원지(龜溪書院址)는 증평읍 남차리에 있으며 1613년(광해군 5) 신경행을 비롯한 고을의 유림들이 조성한 서원으로 구암서원이라고도 합니다. 이준경, 서사원, 박지화, 이득윤, 이당 등 5명을 배향하였습니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현재 초석 일부만 남아 있으며, 주변에서 기왓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조선의 개국공신 배극렴, 연사종, 황희석의 유적이 있습니다.
배극렴 묘소는 두타산 대봉산 아래 송오리 마을 뒤 산기슭에 있습니다. 묘소에는 호석이 둘러있고, 앞에는 장명등과 문관석, 상석, 향로석 등이 있고 묘소에서 20여m 아래에는 1888년( 고종 25) 당시의 대사헌 박성양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배극렴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진주, 상주 목사, 계림, 화령 부윤, 합포진 첨사 등을 역임했고, 1376년( 우왕 2)과 1378년(우왕 4) 왜구격파에 공을 세웠습니다. 이성계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고 1388년(우왕 14) 조전 원수로 위화도 회군을 결행했습니다. 이후 1392년 이성계를 추대, 개국 일등 공신이 돼 성산 부원군에 봉해지고 문하 좌시중에 이르렀습니다.
정후사(靖厚祠)는 정후공 연사종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본래 1813년(순조 13) 연사종을 추향하고, 후손인 안음 현감 연충수, 의민공 연최적, 동중추 연세홍을 배향한 양양재를 금당서원이라 불렀습니다.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됐다가 1915년 정후공의 영정만을 모신 정후사가 재건됐습니다. 연사종은 여말선초의 무신으로 자는 불비이고, 본관은 곡산이며 함흥 출신입니다.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 우군도통사 이성계를 따라 종군했고, 조선이 건국되자 원종공신과 회군공신에 책록되었으며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4등이 됐습니다. 이후 상장군, 호조전서 등을 지내고 곡성군에 봉해졌습니다.
양무공사(襄武公祠)는 조선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평해군에 봉해진 양무공 황희석을 모신 불천위 사당입니다. 1595년(선조 28)에 세워진 사당은 그 앞에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건물 둘레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습니다. 사당 앞에는 1978년에 세운 ‘평해군묘정비’가 있습니다. 그는 1381년(우왕 7)에 왜구가 침입해 전라도 전역이 소란해지자 체찰사로 파견돼 진압했으며 1388년 요동 원정군이 발진하자 청주상만호로서 예하 군사를 이끌고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갔습니다. 이성계가 회군을 단행해 반정에 성공하자 동지밀직사사에 올랐으며, 1389년(공양왕 1) 회군 공신에 책록됐습니다. 1392년(태조 1) 개국공신 2등에 추가 책록되었고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곡산 연씨 효열문이 많이 있습니다.
곡산연문 효열각은 정후공 연사종의 정려와 그의 손자인 연재관의 처 청송 심씨의 정려를 복설한 정려각입니다. 연사종의 정려문은 본래 경기도 양주 노원에 있었으나 후에 도안면 화성리로 옮겨왔고, 청송 심씨는 남편 연재관이 죽자 염습한 후 약을 먹고 남편을 따라 죽었습니다. 1796년(정조 20)에 청송 심씨의 정려가 내려졌으며 그다음 해에 그녀의 정려문이 건립되었습니다.
곡산연문 쌍효각은 1887년(고종 24), 위독한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다리를 베어 피를 먹여 연명시킨 효자 연주운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를 세웠고, 이후 그의 손자인 연면회의 정려를 합설했습니다.
곡산연씨 열녀각은 장환일의 처 곡산 연씨의 정려로 남편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5일간이나 연명시켰으나 끝내 남편이 세상을 뜨자 부인 연씨는 약을 먹고 남편을 따라 숨졌습니다. 1892년(고종 29)에 영부인에 증직되고 정려를 내렸습니다.
연종록 부부 정효각은, 연종록이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고, 노모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목숨을 연명시킨 효자이며, 그의 부인 순흥 안씨는 상을 당한 후 매일 묘소 앞에서 통곡하여 무릎이 물렀다고 합니다. 이를 알게 된 조정에서는 1895년(철종 10)에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동몽교관에 증직하고 정려를 하사하였습니다.
연병호 생가는 1910년에 건립된 후 지붕 등이 변형됐다가 1986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고, 1996년과 1998년 새롭게 영당과 삼문이 건립됐습니다.
연병호(延秉昊)는 청안 중명학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맏형 병환이 1910년 경술국치를 통분해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함께 망명했습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귀국해 활동하던 중 비밀조직인 청년외교단이 수색에 걸려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 후 재차 망명해 독립혁명당을 조직했습니다. 1937년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 중 체포돼 옥고를 치렀습니다. 국내에서 조국 해방을 맞이해 임시정부환국준비위원회를 발족, 영접부장에 추임됐으며 1946년 한독당 창당을 발기해 중앙위원 겸 훈련부장, 애국선열사적조사위원장에 추임되었습니다. 1945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괴산에서 입후보해 당선, 제헌국회의원이 됐고 그 뒤 재선되었으며 1963년 향년 70세의 일기로 타계하니 사회장으로 장례 후에 석곡리 선영에 안장됐다가 1976년 국립묘지 이범석 묘 옆에 이장됐습니다.
고려 시대의 불상과 석탑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광덕사 석조여래입상은 둥근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 석불입상으로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있고 넓은 얼굴에 코가 크고 두 귀는 비교적 큰 편이며 눈을 반쯤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몸체는 얼굴에 비해 짧은 편이며 법의는 통견으로 양팔에 걸쳐 있고 배 아래로 활 모양의 주름이 조각돼 있습니다. 조각 수법이나 규모의 장대함 등으로 보아 10세기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율리 석조 관음보살입상은 본래 마을 입구에 있었는데 1979년 삼기 저수지가 완공돼 수몰되자 10여m 위 언덕으로 옮겼다가 2006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불상은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인상은 풍만하나 목에 삼도가 없고, 수인은 여원인, 시무외인을 하고 있으며 법의는 양쪽 어깨에 걸쳐 입은 통견입니다. 이전할 당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숭정후갑신년십월일립(崇幀後甲申年十月日立)'이라 적혀 있어 1704년(숙종 30)에 조성된 것처럼 기록돼 있으나 불상의 조각 양식으로 볼 때는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남하리 석조보살입상은 논과 밭 사이에 3개의 불상이 나란히 있습니다. 이중 가장 큰 불상은 머리에는 관대가 있는 비교적 높은 보관을 썼는데, 두 귀 위에 장방형의 홈이 있어 보관에 장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마의 눈썹 사이로 백호가 양각돼 있습니다. 두 귀는 길며 목에는 삼도가 있고 법의는 통견으로 옷 무늬의 조각 양식이나 수법 및 규모의 장대함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초기 10세기 때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은 충북지역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삼존불과 반가사유상과 여래 입상 등을 한곳에 모아 놓은 불상군입니다. 화강암 벽의 3면에 모두 다섯 구(軀)의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앞면에 본존불과 좌우 협시불의 삼존불을 두고 왼쪽에 여래입상, 오른쪽에 반가사유상이 배치돼 있습니다. 전체적인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 보아 대략 9세기경에서 10세기 초를 즈음하여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는 1954년까지 암자가 있었는데 폐사됐으며 마애불 곁에는 남하리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남하리 사지 삼층석탑은 자연 암반 위에 방형 대석을 기단으로 삼은 삼층석탑으로 탑신부와 상륜부에 노반이 남아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인근의 염곡소(焰谷所)에서 많은 불을 다루면서 화기를 누르고 마을의 화재와 주민들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비보책으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가뭄이 심하면 이 노반의 방향을 다르게 놓아 비가 오기를 기원했다고 합니다.
미암리 석조 관음보살입상은 미암1리 미륵사 근처에 수령 300여 년의 느티나무 아래 세워진 보호각 속에 있습니다. 석조 관음보살입상은 눈썹 사이에 백호가 양각돼 있고,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고 법의는 통견이며 두 발은 땅에 묻혀 있고, 시멘트로 목 부분을 보강해 놓았습니다. 보관의 화불이나 보개의 표현, 옷 무늬와 상호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제작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7월) <증평고을>을 확인 바랍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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