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선생님 생각이 더 자주 납니다. 이럴 때 선생님 같으면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아마 치열한 삶을 살고 난 이후 노년기 선생님 삶에서 제가 더 큰 영감과 격려를 받았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10여년 독일 유학생활에서 돌아와 이것저것 하던 시절 한 시사매체의 의뢰를 받아 선생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길>지의 신년특집 인터뷰였지요. 1997년 1월 신년호였으니 인터뷰가 이루어진 것은 1996년 12월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정년 은퇴하고 모처럼 그 홀가분함을 즐기고 계신 때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김영삼 정부 말기에, 사회주의 몰락 이후로 전지구적인 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을 때였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독한 이빨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던 때이기도 합니다. 선생님께 "한 말씀"을 요청하는 사회적 요구도 그치지 않을 그때, 선생님의 어떤 역할을 요구하는 그때,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날 보고 왜 활동하지 않느냐고 그러는데, 난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에 지족(知足), 족함을 아는 심정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 이 나이 되고 이만큼 살고 난 뒤에도 집착하고 무언가를 하고자 하고 욕심을 부리고 하는 것은 노욕(이걸 제가 老慾이라고 썼더니 선생님께서 老辱이라고 바로잡아 주셨지요)이란 말이야. (…) 난 그저 요만큼 남은 인생을 아주 만끽하고 싶어요. 한 시간도 꽉꽉 채워가며 살아가고 싶은 거예요. 이제까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고…"
이 말씀에 저는 이런 소회를 덧붙였더군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고…' 하는 마지막 말이 귓가에 남는다. 사실 그처럼 자신의 인생을 끝없는 긴장 속에, 순간순간 결단해야 하는 순간에 자신을 던지며 살아온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사람마다 장단점이 있는 것인데 난 싸우는 시대, 격렬하게 정면으로, 지식과 사상과 글로써 대결하던 시대(를 살았어요). 군사독재 시대가 어쩌면 나에게는 살맛나던 시대, 내가 나다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시대였던 것 같아요. (…) 난 싸우는 시기에, 사회의 권력이 조작하고 은폐하고자 하는 문제들, 주제를 골라서 하나씩 실증적으로 논파해나가는 것에 맞았던 것 같고, 지금은 뭐랄까, 하여간 나의 시대는 끝난 것 같은, 나의 지적인 활동의 전성기(prime time)는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죠. 나이도 그렇고 상황도 그렇고."
은둔고수의 삶을 즐기시려는 선생님을 저는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90년대 후반, 당시 제가 진행하게 된 기독교방송(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특별대담에 모시려 하니 선생님은 이 핑계 저 핑계 대시며 거절하셨습니다. 그래도 제가 포기하지 않으니 나중엔 "산본에서 목동까지 가기도 힘들다" 하셔서 제가 아예 방송국 차량과 장비를 모두 가져가서 선생님 댁에서 끝내 대담을 해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KBS TV에서 <정범구의 세상 읽기>라는 대담 프로를 할 때도 똑같은 실랑이가 있었지요. "텔레비전 같은 데 한 번도 안 나갔는데 어떻게 나가냐"는 말씀이었지만 사실은 선생님의 완벽주의가 출연을 망설이게 한 것이었지요. "나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지, 말로 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발표되는 글의 마지막 한 자, 한 자까지 치열하게 검증하고 퇴고를 거듭하여 세상에 내놓으시던 선생님 입장에서, 아무런 수정 없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대담이 얼마나 불편하셨을지, 지금 생각해도 참 죄송스러운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우리 시대 '사상의 은사'가 지식인들만의 은사가 아니라 저잣거리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게도 은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선생님을 몰아붙였던 것입니다.
산본 댁으로 찾아뵈었을 때 뒤쪽 창가로 펼쳐진 수리산 자락을 가리키시며 "어때? 어디 콘도에 온 거 같지?" 하시면서 코까지 벌름거리며 웃으시던 장면이 잊히지 않습니다. 돈암동, 제기동, 화양동을 거쳐 난생 처음 분양이란 것을 받아 온 산본 아파트. 그 현관에는 화양동 집 대문에서 떼어 온 나무 문패가 걸려 있었지요. "여러 십년 만에 모처럼 갖게 된 개인생활"이 너무 좋고, 그리고 무엇보다 "구공탄 밀어 넣고 빼던" 생활로부터 해방된, 평생 처음으로 꼭지만 틀면 자동으로 더운 물이 나오는 집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습니다. 정말로 갖고 싶었던 새 운동화를 얻어 신은 소년의 표정이 그랬을까요? 그 표정 위로 선생님이 하셨던 말들이 겹쳐집니다.
"아무 노력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 불면불휴(不眠不休), 각고(刻苦)의 세월이었지…"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서는 안 돼. 그리고 신념이 주춤해서도 안 돼."
선생님께서 떠나신 지 이제 햇수로 벌써 13년째에 접어듭니다. 선생님께서 삐뚤빼뚤한 글씨로 힘겹게 쓰신 연하장들도 받아보지 못한 지 오래 됐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옛날 선생님께 받은 편지와 연하장들을 찾아보려다 포기했습니다. 여러 수십 번의 이사를 다니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우상과 맹신, 독재의 정글 속을 포효하던 호랑이 같던 선생님이지만 제게는 육친의 정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1985년 6월쯤이지요? 하이델베르크대학 초청으로 몇 개월 독일로 나오셨는데, 오랜 해직과 투옥생활 끝에 처음으로 해외에 나오신 것이었습니다. 아마 사모님과 함께 누려보는 첫 호사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집에 오셔서 많고 많은 음식들 중에서 유독 깡통에 든 옥수수를 맛있게 드시던 기억이 납니다. 일제강점기 중학생 시절, 공부보다는 매일 노역에 끌려다니시면서 드셨던 옥수수 생각이 나서 그러셨다고 하셨지요. 1986년인가 독일에 잠깐 들르셨을 때, 일부러 저희 집까지 오셔서 사모님께서 싸주신 고춧가루를 보물단지처럼 내놓으시던 모습, 새벽 일찍 깨셔서 잠 많은 젊은 부부를 깨우지도 못하고 무료하게 앉아 계시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2000년 봄, 제가 갑자기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산본에서 일산까지 그 먼 길을 혼자 오셔서, 시끌벅적하고 정신없는 정당 행사에 '뻘쭘하게' 앉아 계시다 가시던 모습,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상하게 가슴이 아려옵니다. 제가 정치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많이 걱정하셨을 텐데 따로 내색은 하지 않으시고, 그냥 그렇게 다녀가셨습니다.
겉으로는 고집스럽고 칼날 같은 모습이지만 주변의 모든 사물에 대해 깊은 연민과 관심을 보이시던 선생님, 실수하는 인간임을 감추지 않으면서 스스로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평생 노력하셨던 분,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평등하게 대하려 노력하셨던 분,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잃지 않았던 선생님의 삶을 닮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할 때 선생님께서도 낙담이 크셨지요. 그때 선생님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이기적 본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자책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호야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였지만 실제로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의 이기적 욕망에, 그 현실에 낙담하면서도 또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픔을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아마 공식석상으로는 마지막 행사가 되었을 '인권연대 10주년 기념식'(2009년 7월)에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 이명박 현재 이 정권의, 오로지 물질밖에 모르는, 숭배하여야 할 가치는 오로지 물질밖에 모르는, 그것을 신격화하는,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의 존재가치가 말살되어가는, 이러한 체제를, 정권을, 우리 그 많은 40년의 고생 끝에 받아 쥘 수밖에 없었던 것도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다. 우리 자신들이 한 일이다."
오늘날 만약 살아 계신다면, 투표를 통해 등장한 이 윤석열 정권에 대해서는 어떤 말씀을 하실지, 아니 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선생님께 송구해집니다.
"하여간 나의 시대는 끝난 것 같은…"
1996년 12월에 하셨던 말씀이 여전히 귀에 남아 있습니다. 어느새 저는 그때 선생님의 연배를 넘어 있습니다.
"나이도 그렇고, 상황도 그렇고…" 그때 덧붙이셨던 이 말씀도 떠오릅니다.
하릴없이 나이는 먹고, 그러나 세월은 여전히 강퍅한데, 이럴 때 선생님이 계셨다면 뭐라고 말씀하셨을지, 선생님, 많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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