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늘 하던 이야기와 조금 다른 차원의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5월15일은 스승의 날인데, 원래는 음력으로 1397년 4월10일을 기념해서 만든 날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의 큰 스승은 세종대왕이고 그분의 생일을 양력(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5월15일이라 그날을 스승의 날로 정한 것이다. 그래서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에 반포에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논해보고자 한다.
세종대왕은 젊은 학자와 노신들과의 논쟁을 즐겼다. 젊은 사람은 진취적이고 늙은 대신은 보수성향이 강하다. 이들이 만나면 주로 노인들이 이야기하지만, 철학 논쟁에 들면 젊은이의 진취적 사고가 맞설 수도 있다. 이러한 신구의 논쟁의 가운데서 접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노인들의 경험도 중요하고 젊은이의 진취적인 생각도 필요하다. 세종대왕은 상당히 진취적인 생각으로 다스리려 했다. 오늘날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과감하게 시행하기도 하였다. 노비출신의 장영실을 등용한 것은 흔히 알고 있는 사실이고, 1430년 10월19일에는 출산한 여인에게 1년의 휴가를 주고, 복무를 면제해 주는 파격적인 제도를 만들었으며, 1434년 4월16일에는 사역인의 아내가 출산할 시에는 남편에게 30일의 휴가를 주도록 하였다. 시각장애인은 귀가 발달하였다는데 착안하여 악사로 채용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은 노인들(?)의 반대가 불편하여 훈민정음의 창제는 은밀하게 진행하였다. 그러다가 최만리 등이 데모를 하며 상소문을 올리니 그들과 담대하게 토론를 하였다. <훈민정음 반대상소문>의 내용은 논리적으로 탁월하여 세종이 아들 문종에게 읽어보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토론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임금이 소(疏)를 보고, 최만리(崔萬理)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중략>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세미(細微)한 일일지라도 참예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니, 만리(萬理) 등이 대답하기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어조(語助)와 문자(漢字)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을 변한 것이라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중략>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시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 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중략>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다.
세종은 처음에는 학자들에게 훈민정음이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아마도 가림토문자와 모양이 비슷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해 최만리 등은 글자를 만드는 법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새 글자가 맞다.”고 주장하며 또 “이두가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것인데, 외 설총은 옳고 임금인 나는 그른 것인가?” 하면서 논쟁을 한다. 사성칠운을 논하는 것으로 보아 세종이 언어학에 일가식견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정창손·하위지 등은 훈민정음의 창제에 동참했던 인물인데 훈민정음을 반대하고 나섰다. 아마도 유림의 압력(?)이나 친소관계에 따른 서명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우리는 흔히 훈민정음의 창제만 보고 최만리가 잘못했다고 하는데, 위의 논쟁을 보면 각자의 주장에 모두 일리가 있음을 본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훈민정음 반대상소문>은 논리가 정연해서 귀감이 될 수 있는 문장이다. 반대에 흔쾌히 응하는 세종이나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따지는 최만리의 기개에서 현대인들이 배워야 할 것이 많다. 감옥에 가뒀다가 하루만에 석방하는 것도 세종의 탁월한 리더십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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