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96강은 쌀, 소금, 목화, 눈이 많아 사백(四白)의 고장이라 불리고 불교와 원불교, 천주교와 기독교 등 4대 종교의 성지가 있으며 칠산 앞바다에서 잡은 ‘밥도둑’ 영광굴비로 유명한, 전남 <영광고을>에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96강은 2023년 4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96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영광IC-법성면(매향비/백제불교최초도래지/법성진성/숲쟁이)-백수면(백수해안도로/정유재란열부순절지/원불교영산성지/융문당/융무당)-영광읍(신호준가옥/임진수성사/영광향교/홍교/점심식사 겸 뒤풀이)-군남면(매간당고택)-불갑면(내산서원)-묘량면(신천리삼층석탑/이규헌가옥/정렬각)-영광IC-서울의 순입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96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영광의 지형, 지세는 뚜렷이 삼분되어 있습니다.
영광의 지형, 지세는 전체적으로 중앙에 넓은 평야 지대를 사이에 두고, 동서 양쪽에 산악지형을 이루고 있어 뚜렷이 삼분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중앙의 평야 지대는 토양이 비옥하고 농경에 적합한 완만한 구릉지에 논이 많아 곡창지대를 이루고 백수, 염산 해안은 간석지가 발달되어 개발 잠재력이 큽니다. 남동쪽의 산악지대는 노령을 중심으로 하나의 산줄기를 형성하여 고성산, 태청산, 장암산, 불갑산, 군유산 등의 연봉들로 이어집니다. 북서쪽의 산악지대는 백수 북부의 법성면 일대로 해안까지 경사가 급한 지대입니다. 이렇듯 양쪽의 험준한 산악은 깊은 계곡을 형성하여 광활한 백수평야에 수원을 공급해 주는 하천을 형성합니다.
와천(瓦川)은 대마면 고성산(547m) 서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법성포구로 유입하는 물줄기로 성산리에서 성산천을, 계송리에서 영광천, 대산천, 장수천을, 길용리 일대에서 길용천을 합류하여 북쪽으로 흘러 법성면 대동리 일대에서 법성포구로 유입됩니다. 상류에는 대안제와 평금제가 있습니다. 하천의 이름은 법성포로 유입하는 하구에 있던 ‘와탄(瓦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불갑천은 불갑면 자비리 노은재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유입하는 물줄기로 녹산리에서 건무천을, 보라리에서 월산천을, 군서면에서 마읍천, 학산천을 합류하여 하류에 와서 넓은 간석지를 이루고 염산면 송암리 일대에서 서해로 유입되며 간석지 일대에는 곳곳에 염전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하천의 이름은 상류에 있는 불갑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용사취회형(龍蛇聚會形)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광이란 지명은 ‘신령스러운 빛의 고을’이란 뜻입니다. 풍수적으로 낙월면은 크고 작은 50여 개의 도서로 되어 있는 ‘창포성열(蒼布星列)’과 같은 형국이며, 법성포는 ‘와우형(臥牛形)’으로 장차 100여 년이 지나면 남토에 이름을 떨칠 성인이 난다는 지형이고, 영광은 ‘용사취회형(龍蛇聚會形, 용과 뱀이 서로 만나 화합을 여는 형국)’이라는 명당 터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전남의 서북부에 있으며, 동남쪽은 장성군과 함평군에 접하고 북으로는 전북 고창군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서해와 접해 있습니다.
영광의 역사는 마한의 부족국가로 시작됩니다.
영광은 삼한시대는 마한에 소속되었는데 마한 54개국 중 영광읍 일대와 염산면 일대, 군남면 남창리 일대 등에서 3개국이 부족국가를 형성하였으며 토착 세력을 형성하면서 인근의 부족과 융화하였습니다.
백제 시대는 근초고왕 때부터 영광지역에서는 무시이군(영광읍 일대), 고록지현(백수, 염산일대), 아노현(군남면 일대) 등의 군현이 설치되어 독립된 행정편제를 이루게 되었으며, 침류왕(재위 384~385) 원년에는 인도 고승 ‘마라난타’가 남중국 ‘동진’을 거쳐 지금의 법성 진내리를 통하여 전승한 백제 불교의 최초 도래지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는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 토벌 때 영광은 저항이 심한 고을로 분류되어 당나라가 통치하였고, 757년(경덕왕 16) 무시이군을 무령군으로 개칭하였으며, 진성왕 6년부터 후백제의 세력에 들어가 멸망 때까지 통치를 받았습니다.
고려 시대는 우와산에 우산고성을 축성했고, 941년(태조 23) 무령군을 영광군으로 고쳐 장성, 압해를 속국으로 무안군 소속이던 함농, 모평, 해제현과 장성군 소속이던 삼계현, 압해군 소속이던 염해현, 육창현을 속현으로 삼아 2군 6현을 다스렸으며 정주군 또는 오성군이라고도 칭했습니다. 992년(성종 11) 조세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되어 개경 이남에 12개 조창이 개설되자 부용포(지금의 법성포)에 조창인 부용창이 개설되었고 현종 때 전라도가 설치되어 도청 소재지를 전주에 두었는데 그 관할에 속했습니다. 문종 때 성산 읍성을 5년에 걸쳐 축성하고 모든 공청을 무령리로 옮기고, 부용포의 부용창을 법성포의 법성창으로 개칭했습니다.
조선 시대는 초기에 ‘남영북악’이라 하여 남쪽에는 영광, 북쪽에는 황해도 연악군을 옥당골이라 칭하여 영예로운 별칭을 얻게 되었고 남도의 28개 고을의 조세를 관할하였고 중종 9년 법성포 영(진)을 설치 수군만호를 배치하여 조선이 38척, 조군이 1,344명이 되었고 법성진성도 축성하였습니다. 정조 13년 영광군은 29면 680리를 관할하였고 고종 32년 전국이 23부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전주부 관할의 영광군이 되었습니다. 고종 33년 13도제 실시에 따라 전라남도에 소속되고 1914년에 내동, 외동, 산남 등 6개 면이 장성군에 편입되었고 지도군의 낙월, 위도의 2개 면을 넘겨받아 12개 면을 관할하였습니다.
1955년 영광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11면을 관할했으며, 1963년 위도면을 전북 부안군으로 넘겨주었고 1980년 백수면이 백수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 군남면의 오동, 옥실리가 염산면으로 편입되고 군서면의 녹사, 학정, 송림, 신하리가 영광읍으로 편입되었으며, 1985년 홍농면이 홍농읍으로 승격되어 3읍 8개면이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호구(戶口)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여 인심이 좋은 고장입니다.
<중종실록>에는 “영광은 불갑산과 모악산이 둘러싼 넓은 들판을 가진 풍요로운 고장이다. 서해의 칠산바다로 열려 있어서 바닷가의 물고기와 소금이 많이 나는 고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은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이라고 했는데 가구 수와 인구가 많은 영광은 살기 좋은 고장이며 어염시초(魚鹽柴草)가 풍부하여 인심이 좋고 산수가 아름다운 고장이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쌀, 소금, 목화, 눈이 많아 사백(四白)의 고장으로 불립니다.
칠산바다에서 잡아 법성포 바람에 말리면 ‘밥도둑’ 영광굴비가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밥도둑’의 명성은 영광굴비의 몫입니다. 그 명성의 진원지가 법성포로, 참조기를 소금으로 절여서 법성포의 바닷바람에 말린 것을 으뜸으로 칩니다. 칠산바다에서 잡힌 조기를 사려는 상인들이 전국에서 모여들면서, 서남해 물길의 중심에 자리 잡은 영광이 크게 대접받으며 그때 법성진성이 설치되고 법성창이 호남 제일의 조세창고로 성장하였습니다.
딸을 왕비로 들여서 권세를 누렸던 이자겸이 법성포로 귀양 와서 왕에게 진상하면서 “굽히지 않겠다”라는 뜻을 담아서 ‘굴비(屈非)’라고 써서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사실은 조기를 염장해서 말리면 몸이 자연스럽게 구부러지는데 이 모습을 보고 구부러진 조기라는 의미로 ‘구비(仇非)’라고 했던 것이 굴비로 변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법성포는 중국과 일본의 해상교통의 중심 항구로 조창이 있었습니다.
법성포는 삼국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중국, 일본과의 해상 교통로 상에 위치하는 우리나라 서해안의 대표적인 항구였을 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의 조창(漕倉)과 조운(漕運)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또한 서해에서 가장 품질 좋은 조기가 잡히는 칠산 앞바다에서 들어오는 조기 배로 파시를 이루었기 때문에 보부상들이 많이 모여들어 매우 번창했던 포구였습니다.
법성진 숲쟁이는 고려 시대 이래 전라도에서 가장 번창한 포구였던 법성포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법성진성과 일대의 숲을 이르는 말입니다.
‘법성진(法聖鎭)’이란 법성 지역에 구축된 수군의 행정구역으로 1398년(태조 7)부터 조창을 방비하기 위하여 만호의 지휘 아래 수군의 상비 병력이 배치된 이후 1485년(성종 16)에 <경국대전>에 보이는 수군 편제상 법성진의 모습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법성진성은 1514년(중종 9)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성의 전체 둘레는 약 800m로 추정되며 현재는 북벽만 전 구간이 남아있고 서쪽과 동쪽은 일부만이 남아있습니다. 성안에서 출토된 기와류, 자기류, 토기류 등의 유물이 모두 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조선 시대에 사용된 성으로 추정됩니다. 성벽에는 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전라도 관내의 군현 명과 쌓은 척(尺), 그리고 감관, 도색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글에 나타난 내용으로 보아 인원 동원은 물론 성의 축조와 관련한 당시의 제도 등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로 판단됩니다.
숲쟁이는 법성포 마을에서 홍농 방향의 지방도로 고개마루에 좌, 우측으로 산 능선을 따라 약 300m에 걸쳐 조성된 숲으로, ‘쟁이’란 재, 즉 성(城)이라는 뜻으로 ‘숲쟁이’란 숲으로 된 성을 의미합니다. 법성포구와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의 역할을 해 왔으며, 예로부터 파시로 몰려드는 보부상들이 이 숲에서 단오 행사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용왕제와 단오날 선유놀이 등 지금의 ‘영광단오제’와 지역의 각종 민속행사가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법성포 매향비는 고려와 조선, 두 시기의 내용이 함께 기록된 유일한 비입니다.
법성 입암리 매향비는 고려 말 1371년(공민왕 20), 조선 초 1410년(태종 10)에 걸쳐 한 비석에 2회의 매향 사실을 기록한 매향비입니다. 같은 비석에 시기를 두고 2회의 매향 사례를 기록한 매향비는 거의 유일한 사례입니다. 매향(埋香)이란 향나무를 묻는 민간불교 신앙 의례입니다. 향나무를 민물과 갯물이 만나는 지역에 오래 묻었다가 약재나 불교 의식용으로 사용했으며, 그 매향의 시기와 장소, 관련 인물들을 기록한 것이 매향비입니다.
현재 입암리 입정마을 노인정 옆에 있으며 1985년 농지 정리사업을 하다가 하수구에서 발견되어, 1987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습니다. 입정마을은 바다와 연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제방을 축조하여 현재는 주변이 들판으로 변했습니다. 이 비석이 서 있던 골목을 ‘빗독거리’라 불렀는데, 그 마을 앞까지 해수가 들어 왔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주민들은 그것이 배를 매는 계선주(繫船柱)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성포 조창이 형성되기 이전의 옛 법성 지역이 이곳과 연관된 곳으로 보입니다.
매향비는 사각 석주형의 자연석을 세워놓은 입석 형태인데, ‘홍무사년명(洪武四年銘)’은 1371년(고려 공민왕 20) 4월에 세운 것으로 화주, 매향의 시기, 장소, 방향, 참여자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영락팔년명(永樂八年銘)’은 글자 수가 비면에 비해 많은 편으로 글자의 크기가 작고 서로 붙어 새겨져 있으며 내용은 1410년 10월 매향비를 세운 것이며, 참여한 사람과 시주자의 인명을 적고 있습니다.
영산성지에 경복궁 북원의 전각인 융문당과 융무당이 옮겨져 있습니다.
조선 태조가 나라를 세운 뒤 1394년 새 궁궐을 고려 남경의 궁궐터 남쪽에 지었는데 남경 궁궐터에는 충순당, 취로정 등의 전각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곳에선 임금과 개국공신의 후손들이 모여 대규모 회맹을 실시한 회맹단도 있었습니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경복궁을 재건할 때 신무문 밖,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후원인 북원을 조성하고 그곳에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 경무대(景武臺)를 지었는데 경무대에는 임금의 휴식 공간인 오운각을 비롯한 32동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1927년 경무대를 비롯한 북원의 건물들이 헐렸는데 1928년에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진언종에 무상으로 대여되었고 1928년 8월 이후 한강 통에 있던 일본 사찰인 고야산(高野山) 용광사(龍光寺)의 건물로, 해방 이후에는 원불교 서울교당으로 사용되다가 용산 재개발사업으로 영광군의 영산성지로 이건되었습니다.
융문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대청은 3칸이고 양옆에 방이 있었으며 넓은 월대를 갖추고 있어 하대의 넓고 큰 계단 아래에 하마석이 있었습니다. 문과 과거시험, 군대 사열, 망배례가 이곳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원불교 서울교당에서 법당으로 사용되다가, 영광 영산성지의 원불교 창립관으로 사용 중입니다.
융무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중앙에 대청 2칸, 좌우에 방을 1칸씩 두고 전, 후퇴가 있는 구조로 월대 위에 좌우로 협문과 3칸씩의 행각이 있는데, 북쪽의 협문의 이름은 본시문(本始門)이었습니다. 군병들을 대상으로 활쏘기 시험을 보거나 호궤(犒饋) 포상, 훈련, 무예 시범 등을 하였습니다. 원불교 서울교당에서 생활관으로 사용되다가, 옥당박물관 문화체험관으로 사용 중입니다.
읍치구역에는 읍성, 객사, 관아, 향교가 있었으나 지금은 향교만 남아 있습니다.
영광 관아 터는 영광 관아가 있던 곳으로 현재 영광군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영광은 고려 시대부터 영광군으로 불렸고 예하에 2개의 군과 8개의 현을 거느릴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인조와 영조 때 이 지역 사람의 역모 사건으로 두 번이나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1894년 4월 12일 동학농민군 일만여 명이 영광에 도착하자 영광군수 민영수는 배에 양곡을 싣고 칠산포 앞바다로 도망쳐버렸는데 농민군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관아로 들어가 무기고에 불 지르고 군기를 탈취하는 한편 호적을 불태웠습니다.
영광향교는 고려 공민왕 때 창건하여 1582년(선조 15)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다시 복원하였으며, 지금의 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어진 것입니다. 현재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이 남아있으며 전묘후학의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1400년(정종 2) 불에 탄 서울 문묘를 복원할 때 이 향교의 배치를 참고하였다고 합니다.
도동리 홍교는 성종 때 불교를 배척하였던 정극인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다리라고 전해집니다. 만든 시기는 정극인이 죽은 16년 후인 1497년(연산군 3)이며, 1728년(영조 4)과 1994년에 보수하였습니다. 실제 다리는 옛 성이 있었을 당시 나주와 함평 등지에서 영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었으나, 현재는 본래 모습이 훼손된 채 논밭으로 가는 샛길과 하천 옆길을 잇는 다리로 쓰이고 있습니다. 13개의 넓적한 돌을 이용하여 단순한 형태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모습인데 9개의 부재로 구성된 것처럼 보입니다. 인위적이고 세련된 다른 홍교와는 달리, 꾸미지 않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이 있는 다리입니다.
정극인이 불교를 탄압한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교 배척과 관련한 정극인의 일화가 있습니다. 정극인은 서울에서 대대로 벼슬을 하던 영광 정씨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17살이던 태종 17년에 부모를 따라 영광으로 내려가 살았고 29세 되던 세종 11년에야 성균관의 학생이 됩니다.
세종 19년 세종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은 왕실 원찰인 흥천사(서울 정동)의 사리전(舍利殿)을 창건하라는 교서를 내리자 그는 흉년이 들어 삼남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음을 들어 불사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임금의 총애를 받고 세도를 부리는 홍천사 주지 행호를 처형하고 승려들의 궁궐 출입도 금해 줄 것을 간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더 나아가 성균관 모든 유생의 권당(동맹휴학)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세종에게 불려가서도 “전하께서 불교를 숭신하시니 제 생들이 중이 되고자 합니다”라며 끝내 불교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크게 노하여 정극인의 참형을 명하지만, 영의정 황희의 진언으로 유배형을 받았으며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벼슬길을 포기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19세기 말 호남의 상류 주택이 남아 있습니다.
매간당 고택은 연안김씨 종가로 16세기 중엽에 김영이 군수로 부임하는 숙부 김세공을 따라 영광에 온 이후 연안김씨 직강공파가 정착한 집성촌에 1868년(고종 5)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옛집입니다. 풍수지리상 ‘매화꽃이 떨어지는 형국’ 또는 ‘학 형국’이라고 일컫는 길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건물은 사랑 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서당, 마부 집, 연못 등을 배치하였고, 중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아래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당은 언덕 뒤편 약간 경사진 곳에 있으며, 오른쪽으로 안채의 뒷마당과 통하게 되어 있고 사랑채의 남쪽에 배치된 서당 옆에 있는 넓은 연못은 지금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바깥 대문은 ‘현 소유자의 14대, 9대, 8대조가 효성이 지극하다’ 하여 나라에서 세워준 2층 누각형 정려문으로 ‘삼효문’이라 합니다. 옆으로 대문 1칸을 두어 평상시에 사용하고 삼효문은 집안의 중요한 의례가 있을 때만 열었으며 현판은 고종의 형인 이재면이 썼다고 합니다. 건물, 연못, 담장 등이 원형대로 잘 유지, 보존되고 있으며 대대로 물려온 교지, 관복, 호패 등 100여 점에 달하는 유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양반집의 규모와 배치 등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방 상류 주택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규헌 가옥은 전주이씨 양도공파의 종가로 임진왜란 때 영광 수성도 별장을 지낸 이응종의 생가이기도 합니다. 사랑채의 상량문에 따르면 1895년(고종 32)에 지은 것입니다. 건물구조는 안채, 사랑채, 사당으로 되어 있는데 안채는 앞면 6칸, 옆면 2칸 크기로 앞쪽과 좌우에 퇴를 두었고 방, 대청, 부엌, 건넌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1칸 크기이며 앞뒤로 퇴를 두고 방과 대청으로 꾸몄습니다. 사당에는 양도공 이천우의 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신호준 가옥은 신호준의 고조인 신굉규가 건물을 크게 중수하였는데 사랑채 상량문에 ‘숭정기원후사년병진팔월초(崇禎紀元後四年丙辰八月初)’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856년(철종 7)에 지은 것이며 안채 역시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하여 총 11동으로 구성된 큰 규모의 저택으로 안채는 중부지방 식 평면형인 ㄱ자형 집으로 작은방, 대청, 방 2칸, 마룻방, 안방, 부엌으로 구성되었고 사랑채는 대청, 방, 골방으로 구성된 一자형 집입니다. 사당은 신굉규의 아들 신휘상이 원래 안채 오른쪽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영산신씨 가문이 영광으로 이주해온 것은 조선 초기로, 신보안과 그의 아들 신사구의 처향(妻鄕)이라는 인연으로 이루어졌으며 신응순, 신응망 등의 저명한 인물이 배출되었습니다.
신응순은 자는 희순, 호는 성재, 본관은 영산, 영광 출생입니다. 과거 응시를 위한 공부를 싫어하여 경학에 열중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영광으로 침입하자 향교의 위패, 제기와 많은 서적을 배에 싣고 안마도로 피하여 귀중한 자료를 보존하였습니다. 1603년(선조 36)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대에 인목대비 폐비론이 불거지자 과장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곡식 수백 석을 모아 찬조하였고, 1627년(인조 5) 병자호란 때는 사계 김장생의 소모유사(召募有司)로 곡식 3천 석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1634년(인조 12)에 군수 원두표의 천거로 희릉참봉에 제수되었습니다. 저서로는 문집인 <성재집>과 <성재만록>, 그리고 <주자가례>에 주석을 붙인 <문공가례의절>이 있습니다.
신응망은 본관은 영산, 자는 희상, 호는 한사로 영광 출생입니다. 그는 “임진왜란 뒤로 가산이 탕진되었으므로 어머니가 식량을 꾸어주어 수은 강항의 문하에 가서 수업하였는데 학문이 날로 진취 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수은의 독실한 제자였습니다. 수은 문하에서의 수학을 토대로 1617년 사마시, 1624년 증광시 급제 후 승문원 주서를 거쳐 흥양현감, 공조정랑, 예조정랑, 경상도사, 함평현감, 황해도사, 공홍도사, 사헌부장령, 파주목사, 장흥현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은 1880년대 건축된 창녕조씨 충정공파의 집으로 현재의 가옥에서 7대가 약 100년 넘게 살았습니다. 장남댁(진사댁)은 법성진 첨절제사를 지낸 조병무가 지었습니다. 훗날 조병무의 아들 조강환이 그의 세 아들을 위해 첫째 아들이 거주하는 장남댁 근처에 차남댁(박사댁)과 삼남댁(참봉댁) 두 채를 더 지었습니다. 차남댁은 20세기 중반에 소실되었고, 장남댁과 삼남댁은 남아있습니다. 장남댁은 안채, 곳간채, 중문채, 행랑채 등 5동이며, 삼남댁은 안채, 문간채, 곳간채 3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충신열사들의 사당이 즐비합니다.
묘장영당(畝長影堂)은 묘장서원, 영당사라고 달리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의 개국공신인 이천우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입니다. 1416년(태종 16) 이천우의 퇴직 시에 그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화상(畵像)과 이응도(二鷹圖)를 하사하였습니다. 이후 영정은 영당이 건립되지 못하여 후손들에 의하여 전해 오다가 성종 대에 이천우의 증손인 부사맹 이효상이 담양에서 세거하다가 영광(묘량면 영양리 당산마을)으로 이주 정착하여 부조묘(不眺廟)를 건립하고 영정과 함께 유품을 보존하였습니다. 1616년(광해군 8) 현 소재지에 영당을 세우고 영정을 이안하였습니다.
훼철 이후 강당은 서당으로 사용했으며 1919년에는 강당에 4년 과정의 사립 영신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 1928년 후학과 향내 유림이 사우 복원을 추진하여 1934년에 옛터에 사우를 중건하였습니다. 건물 배치에 있어 중심축을 설정, 짜임새 있는 건축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각 건물의 구조도 무리 없이 안정된 형태를 취하고 있고, 중건 이후의 보존관리도 양호하며, 관련 자료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천우는 태조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의 둘째 아들로 여말선초의 격동기에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황산대첩 등 여러 차례의 왜구 토벌과 조선의 개국에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태종을 도와 제1차 왕자의 난(1938년)과 제2차 왕자의 난(1400년) 그리고 즉위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헌을 하여 각각 정사공신과 좌명공신에 훈록되었습니다. 완산부원군으로 진봉되고, 의금부 도제조를 지낸 뒤 다시 찬성사에 보직되었습니다. 사후에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양도입니다.
내산서원(內山書院)은 강항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1635년(인조 13)에 나라에서 ‘용계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고 1702년(숙종 28)에 중수하였으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학후묘의 배치로 강학 공간인 강당은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하였고 뒤에 있는 내삼문을 지나면 강항의 위패를 모신 작은 규모의 사당과 왼쪽 산기슭에는 강항의 묘소가 있습니다. 강항 비는 1820년 무덤 앞에 세운 비석으로 당대 유명한 문장가인 성담 송환기가 비문을 짓고, 명필가인 기원 유한지가 글씨를 썼습니다. 강항의 출생, 선조, 학문 수학과 관직 활동,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활동, 일본에서의 생활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강항은 본관은 진주, 자가 태초, 호가 수은으로 1567년(명종 22) 영광에서 태어나 159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아 활동하다가 왜적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 억류되었는데 일본에 있으면서 보고 들은 풍속, 지리, 정세 등을 기록한 <간양록(看羊錄)>을 집필했으며 일본에 성리학을 전파하여 일본 성리학의 비조가 되었습니다. 1600년(선조 33) 귀국한 후 벼슬을 사양하고 1618년(광해군 10)에 생을 마칠 때까지 영광에서 19년간 살며 독서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지산사(芝山祠)는 죽창 정홍연의 덕을 추모하는 사우로 강륜당과 지산사로 구성돼 있습니다. 1751년(영조 27) 창건 후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79년 현 소재지에 사우를 중건하고 복향하였습니다. 강륜당은 상량문을 볼 때 1932년(임신년)에 건립되었으나 지붕에서 숭정 10년(1637년) 명 망와를 비롯한 고식 기와가 확인돼 실제로는 더 이른 시기에 초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좌우로 자연스럽게 휘어진 곡재를 사용하여 조형성이 뛰어나며 부재들의 장식성 또한 돋보여 건축학적 가치가 높습니다.
정홍연은 본관은 동래, 자는 덕일, 호가 죽창으로 1565년(명종 20)에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1593년에 왜란을 피해 가족과 함께 영광으로 내려와 영광군 백수읍 지산리에 정착하였습니다. 선공감 감역, 제용감 판관, 거창현감, 양천현령, 동복현감, 익산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624년부터는 관직을 그만두고 영광에서 살다 1639년(인조 17)에 생을 마쳤습니다. 수은과 죽창은 수은이 일본에서 돌아온 1600년부터 수은이 생을 마감한 1618년까지 영광에서 교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흥서원(驪興書院)은 진주강씨 강석덕, 강희안, 강희맹, 강귀손, 강학손 등 진주강씨 사평공파 선조 다섯 분을 배향한 서원으로 이흥사, 경앙문, 모현당, 숭의문, 팔룡당 등이 남아있습니다. 강당인 모현당은 원래 1800년(정조 24)에 이흥재로 건립됐으나, 중수기와 상량문을 볼 때 1918년 중수, 1933년 증축 중수한 뒤 1958년에 다시 중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1940년대 초부터 이흥학원이 개설되어 1951년까지 운영하였으며, 한국전쟁 때는 인민위원회 사무실로도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중앙 2칸에 대청이 있고, 대청 좌우로 방이 2칸씩 구성되는 등 강당으로는 매우 큰 규모를 보이며, 건물 곳곳에서 근, 현대적인 장식기법이 확인되는 등 문화재적 가치가 높습니다.
무령서원(武靈書院)은 1748년(영조 24) 문안공 김심언, 충절공 김해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광읍 동부면 기천에 사우를 창건하고 기천사라 하여 제향해 오다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1903년(광무 7) 설단 향사해오던 중 1933년에 현 소재지에 이건하여 무령서원이라 개액하고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훼철된 뒤 세운 유허비의 비문이 당대 학자 송사 기우만의 문집에서 확인되며, 중수 때의 상량문이 전해지고 있는 등 기천사와 무령서원의 역사성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영광김씨 선조 8위를 배향하고 있습니다.
송촌사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김사모와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그의 세 아들 김억명, 김억룡, 김억호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왜란 당시 순국하신 충적을 추모해 1757년에 사우를 창건하여 제향해 오던 중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유림들의 발의로 복건되었습니다. 유허비는 이들 부자의 충절을 기리는 비로, 1908년 호남 의병장 송사 기우만이 직접 비문을 쓰고 세우는 등 그 역사적, 학술적 의의가 큽니다. 또한 소장된 고문서는 모두 50점으로 18∼19세기에 작성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교지, 소지, 호적단자 등으로, 송촌사 배향 인물의 후손들이 향촌에서 누대로 가계를 계승하여 정착해온 내력을 알 수 있는 기록유산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높습니다.
김사모는 조선 중기 무신으로 자는 대유, 호는 모재, 본관은 김해입니다. 1573년(선조 6)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기시 첨정으로 부사 송상현의 막하에서 동래성을 지키다가 함락되자 송상현과 함께 순절하였으며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습니다. 슬하에 세 아들, 군자감 첨정 김억명, 호분위 부사정 김억룡, 의흥위 부장 김억호는 모두 정유재란 때 남원 병사 이복남과 함께 남원성을 사수하다 순국하였습니다.
임진수성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영광 읍성 방위를 위해 굳게 뭉친 선비 55인의 의열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입니다. 영광군수 남궁견이 상복을 입고 있을 때 수령이 부재한 상황에서 당시 영광의 사림들은 1592년(선조 25) 10월 18일부터 이듬해 2월 28일까지 약 5개월간 자치적으로 읍성을 지켰는데 그들은 부서를 24개로 편성하고 각 부서의 책임자를 배정하여 수성군 방위조직을 갖추었습니다. 55인의 명단을 보면, 이응종이 도별장을 맡아 지휘했고, 만호를 지낸 강태가 부장을 맡았고 그 밑에 종사관, 참모관, 장문서, 수성장, 도청서기, 군관, 수문장, 유군장, 중위장, 중부장 등의 직제를 두어 수성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도 명단에 들어있는데 그가 맡았던 직함은 문서를 다루는 장문서였습니다.
<임진수성록>은 당시의 활약상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는데 1748년(영조 24) 당시 의병들의 후손인 정치형 등이 영광에 왔던 어사 한광희의 도움으로 간행하였으며, 책 끝부분에 ‘상지이십구년계유중추개간우봉정사(上之二十九年癸酉中秋開刊于鳳停寺)’라고 씌어 있어 1753년(영조 29)에 봉정사(현재 장성군 삼계면 소재)에서 인쇄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렬각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영광군에 피신해 있다가 왜군의 추적을 받자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에서 칠산 앞바다에 뛰어들어 정절을 지킨, 동래정씨와 진주정씨 문중의 아홉 부인을 기리기 위해 숙종 7년(1681)에 세운 정려입니다. 정려란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를 칭찬하기 위해 그들이 살던 고을 입구에 세우던 비석 또는 문을 가리킵니다. 처음에는 8분을 모신 정려를 함평에 세우고 정등의 부인인 밀양박씨는 따로 그녀의 고향인 영광군에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모두 소실되어 그 후손들이 1960년 지금 있는 자리에 다시 세웠습니다.
마을 미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남죽리 미륵불은 마을의 태평을 기원하고 안녕을 지키는 숭상물로 석주형 입석의 정면에 상을 조각했으며 상부에 석등의 하대석과 같은 형태의 팔각형 석재를 올려놓았고, 얼굴 모습은 굵은 선으로 긋고파서 정연하지 못한 편입니다. 1882년 조봉욱이 미륵당을 지어 미륵불을 보호했다는 구전과 석장승 형태 등을 볼 때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연동리 미륵불은 마을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 있는 불상으로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며, 1986년 현재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입석 형태를 띈 석재 전면에 얼굴상만 조각해 놓았고, 팔과 다리 부분은 조각하지 않고 가슴 아래는 사면 모두 매끈하게 조각했으며, 머리 위에는 둥근 개석이 올려져 있습니다. 석불입상과 석장승 중간 형태를 보이는 미륵불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진내리 미륵불은 2017년 조성한 보호각 안에 모셔져 있으며, 제작 시기나 전래에 대해서는 마라난타가 최초 백제 불교 전래 때 모셔왔다는 설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조각상으로 조형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주민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의를 올리거나 기도하는 공동체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의 민간 신앙 등 민속 생활사를 살필 수 있는 문화재로 민속학적 가치가 큽니다.
야월리 미륵불은 자연석의 입석 위에 석조 갓을 쓴 미륵불로 원래 마을에는 할아버지 미륵불(당산 할아버지)과 할머니 미륵불(당산 할머니)이 함께 있었으나 할머니 미륵불은 유실되어 1999년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구전에 따르면 미륵불들은 100년 넘게 마을을 지켜오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정월 보름에 이곳에서 마을의 태평과 무사함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폐사지에는 석탑만 홀로 서 있습니다.
신천리 3층석탑은 이흥사(利興寺)의 옛터에 남아있는 석탑입니다. 이흥사의 창건 시기와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인 18세기경까지 그 맥을 이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던 받침돌만 남아있고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다른 돌로 조성되었으며, 지붕돌은 두텁고, 낙수면은 경사가 급합니다.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단주리 석탑은 월평사지에 남아있는 석탑입니다. 월평사는 문헌자료에서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나 당간지주와 함께 석탑이 남아 있고 주변에서 기와 편 등이 확인돼, 절터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석탑은 현재 3층까지 남아있으나 구전에 의하면 원래 7층이었다고 하며, 석탑의 지대석은 흙에 묻혀있어 전체가 확실히 보이지 않으나 동쪽 변은 보이며, 긴 장대석을 2단으로 쌓아 마치 2중 기단의 석탑처럼 보입니다. 남아있는 지대석, 기단부, 탑신, 옥개석 등으로 볼 때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교와 원불교, 천주교와 기독교 등 4대 종교의 성지가 있습니다.
법성포(法聖浦)는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384년(침류왕 원년) 백제에 처음으로 불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으로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이며, 마라난타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이 불갑사입니다. 백수읍 영산성지는 원불교의 창시자인 박중빈 대종사가 탄생하고 진리를 깨우쳤다는 곳입니다. 영광읍 영광순교자기념성당은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천주교 순교지이고 염산면 염산교회는 한국전쟁 당시 77명이 순교한 한국 최대 개신교의 순교지입니다.
불갑사는 창건 시기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384년(침류왕 원년)에 마라난타가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문주왕 때 행은이 창건하였다고도 합니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에 중창하였고, 고려 후기에 각진국사가 머무르면서 크게 중창하였는데 당시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렀으며 사전(寺田)이 10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1802년(순조 2)에 득성이 대대적으로 중창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 중창을 거치면서 절의 규모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팔상전, 칠성각, 일광당, 명부전, 만세루, 범종루, 향로전, 천왕문 등이 있으며 각진국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700년 정도 된 참식나무가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4월) <영광고을>을 확인 바랍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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