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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편은 친어머니 모르게 입양 보내진 덴마크 입양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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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편은 친어머니 모르게 입양 보내진 덴마크 입양인입니다"

[372명 해외입양인들의 진실 찾기] ⑫ 입양서류에서 확인되는 허술한 입양 시스템

저는 2003년 여름 남편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 해 한국에서 한인 세계입양인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제 남편은 덴마크 입양인입니다. 덴마크의 지인이 세계입양인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오셨고 잠시 안부 인사를 드리기 위해 모임 장소에 갔습니다. 그 곳은 제 남편과 쌍둥이 동생이 저의 지인과 남편의 친모를 만나 얘기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저의 남편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남편과 남편의 어머니는 서로를 마주보고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안부, 어떻게 지냈는지, 결혼은 했는지, 덴마크의 생활은 어떤지 등 많은 것을 묻고 답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저는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사소통이 어려운 두 사람의 사이, 눈으로 손으로 서로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제게는 보였습니다. 오랜 기간 그리움에 서로 꼭 손을 잡고 손등을 보듬어주며 서로에게 눈으로 안부를 나누는 듯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고 종종 한국에서 남편의 친모를 만나서 남편과 통화를 하였습니다. 매번 통화 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리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 참으로 가슴 아팠습니다.

"거기 부모님들께 정말 잘해라, 나는 부모도 아니다, 너희를 그렇게 나도 모르게 떠내 보내고 얼마나 너희를 찾아 헤매 다녔는지 입양단체에 연락을 해서 내 아이를 돌려달라 해도 이미 떠난 아이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해 버리는 입양업체에 난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단다. 내가 너무너무 미안하다, 내가 죄인이다, 아들아."

늘 항상 그랬습니다. 매번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고 죄인이라는 말씀….

한국 어머니는 싱글맘이셨습니다. 쌍둥이를 낳고 본처가 있는지도 몰랐던 남편에게 버림받고 두 아이을 키우기 위해 매일매일 힘겨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대학 진학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나이.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옆집에 아이를 부탁하고 여기저기 밤낮으로 일하러 다니셨습니다.

그렇게 매일이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보내셨던 한국 어머니는 어느 날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보니 아이들이 옆집에 없었습니다. 옆집에서 하시는 말씀은 외할머니라는 분이 오셔서 아이를 데려가셨다고….

청천벽력 같은 말에 모든 일을 접고 버스터미널로 가서 티켓을 끊고 본가로 갔고 아이를 잘 키우겠다고 말씀드리고 당분간만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서울로 다시 상경하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어는 정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본가에 찾아갔으나, 이미 아이들은 해외로 입양간 후였습니다.

그 당시 미혼모라는 차가운 시선을 외조부모님은 용납할 수 없었고, 친어머니의 동의도 없이 그렇게 지인을 통해서 입양기관으로 저의 남편과 쌍둥이 동생은 보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부모의 동의도 없이 입양기관으로 보내지고 해외로 입양되어지는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입양서류 중 하나인 해외 입양이민 승락서를 보면 남편은 무적아로 후견인에게 맡겨졌고 그 후견인은 아이의 장래 행복을 위하여 입양기관의 주선으로 외국인 가정에 입양이민 되어 가는 것을 승락한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게 어찌 가당한 일이 되었을까요?

버젓이 친모가 살아있고 친모가 아닌 다른 이가 입양 이민을 승락한다는 것, 절대 있을 수도 없고 있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엄연한 서류 조작입니다.

▲남편 이영씨의 입양 서류 중 영문 호적등본. 입양을 위해 어머니, 아버지 모두 ‘모름’으로 표기해 새롭게 만들어진 ‘고아 호적’이다. ⓒ황미정
▲남편 이영씨의 입양서류 중 해외입양승락서. 친모가 아닌 후견인이 입양에 동의했다. ⓒ황미정

▲남편 이영씨의 입양 서류 중 고아증명서. 입양기관인 한국사회봉사회 회장이 ‘고아’임을 증명했다. ⓒ황미정

1950년대 전쟁고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해외입양은 1970년대까지 미혼모나 아동 복지시설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됐다고 합니다. 특히 해외입양이 정점을 찍은 1980년대에는 출생아 중 1%가 넘는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됐다고 합니다. 이는 일종의 민간 외교정책으로 받아들여졌고 당시 한국 아동 한 명의 해외입양 수수료는 약 3000달러, 한국 돈으로 200만 원이 넘는 이 돈은 직장인 한 명의 연봉과도 맞먹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저의 남편 또한 한국 출신 덴마크 입양인들이 만든 덴마크한국인권리그룹(DKRG)을 통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해외 입양 과정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한 진실 규명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제 남편의 케이스는 조사 개시 결정 통지를 받았고 현재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한국은 1970년대 이후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고 세계가 주목하는 강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의 아이들은 해외로 입양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해외로 아이를 수출하는 나라로 살아가야 할까요? 더 이상 이런 아픔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 9월 283명의 해외입양인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입양될 당시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세 차례에 걸쳐 추가로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372명으로 늘어났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권위주의 시기에 한국에서 덴마크와 전세계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의 입양과정에서 인권 침해 여부와 그 과정에서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개입 여부에 대한 조사를 요청한 것이다. 다행히 진실화해위는 12월 8일 '해외 입양 과정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이는 한국이 해외입양을 시작한지 68년의 첫 정부 차원의 조사 결정이다. <프레시안>은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요청한 해외입양인들의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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