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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미군기 이리역 민간인 폭격 참사…이제라도 진상규명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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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미군기 이리역 민간인 폭격 참사…이제라도 진상규명 필요"

이미영 감독의 '초토화작전' 다큐멘터리…미 공군기의 '계획된 폭격' 수많은 희생자 발생

▲한국전쟁 당시 미국 전투기가 포탄을 떨어뜨리고 있다. ⓒ<초토화작전> 갈무리 

1950년 7월 11일에 발생한 ‘미군기의 이리역 폭격 참사’는 오폭이 아니라 미군의 ‘초토화작전’에 의한 ‘계획된 참사’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고 있어 이에 대한 명백한 진실규명이 요구되고 있다.

최근 미군의 비밀자료가 공개되면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과 조준사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특히 이미영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 ‘초토화작전’은 미군의 기록과 증언을 통해 이같은 한국전쟁 당시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지난 13일 서울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공개된 ‘초토화작전’은 미군이 "왜 전선이 형성되지 않은 후방에 대해 폭격을 퍼부어 민간인의 희생을 자초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설명되고 있다.

당시 미군은 피난민 가운데 공산당원이나 북한국으로 위장해 자신들의 후방을 노린다고 판단해 이같은 작전을 벌였다는 것이다.

‘초토화작전‘에 따르면 미당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한달도 지나지 않은 1950년 7월 20일 민간인에 대한 폭격을 승인했다고 한다.

이후 한반도의 주요 도시 및 길목에서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천명을 상대로 공습과 총기를 활용한 조준 사격 등이 실시됐다고 했다.

여기서 1950년 7월 11일 미군기가 전북 이리역을 폭격해 사망 54명, 중경상 3백여명의 사상자를 낸 참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 이미영 감독이 미군 문서들을 통해 발견한 민간인 상대 작전 관련 사항들. ⓒ<초토화작전> 갈무리 

물론 ’초토화작전‘에 따르면 미당국이 1950년 7월 20일에 민간인에 대한 폭격을 승인했다고 하지만 이보다 9일이 앞선 11일에 이리역에는 B29 미군기의 폭격이 있었다.

'전라북도지'에 따르면 전북지역에서 북한군과의 첫 교전은 50년 7월 19일이다. 미군기의 이리역 폭격 참사가 발생한 7월11일은 북한군이 전북 이리지역에 진입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북한군이 전북지역에 집인하기 8일 전에 미군기가 이리역을 폭격할 이유가 있었을까?"에 대한 답변이 '초토화작전'에서 어느 정도 밝지는 셈이다.

▲55년 발간돼 철도박물관에 보관중인 <한국교통동란기> 중 이리역 내용ⓒ 최인

그 이전에 '전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전쟁사' 3권에 기록된 미 제5공군의 활동상황을 살펴 보면 '미 제5공군의 임무는 주요 교통로를 파괴해 후방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교량과 철도를 공격 목표 삼아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던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리역 폭격 하루전에 한국으로 이동한 미 제5공군은 북한군의 남침 저지를 위해 한강 이남을 중심으로 작전을 펼쳤으며 폭격기의 주 공격 목표는 교량과 철도, 기관차 등 였다고 '한국전쟁사'는 적고 있다.

이리역 폭격 하루 전인 7월 10일부터 26일까지 17일 동안 미군 폭격기의 출격 횟수는 모두 130회로 개전 전부터 10월말까지 245회에 걸친 출격의 절반이상을 차지했다.

미공군은 이 작전을 통해 천백여개의 폭탄을 투하해 5백17개의 목표물을 파괴하는 ‘철도차단선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한국전쟁사’는 이 작전을 ‘미 제5공군의 근접 항공지원작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리역 폭격 참사도 이 작전으로 인한 참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것이다.

당시 한국전쟁사 등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50년 7월 11일 당시에는 모든 전폭기가 대전의 엔젤로 통제소로부터 지휘를 받고 미 24사단과 합동작전본부가 대전에 자리잡고 있는 시점였다.

따라서 '이리역을 대전역으로 알고 오폭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50년 7월 11일 오전 11시쯤 우연히도 이리소방서 망루에서 근무하다가 미군 폭격기의 이리역 폭격 참상을 그대로 목격했던 이근배씨(99년 인터뷰 당시 75세)는 "미군기 두 대가 이리 시내 상공을 몇차례 선회하다가 군산쪽으로 날아 갔다가 다시 이리역 상공으로 날아와 폭격을 시작했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한 바 있다.

‘한국동란기’는 1950년 7월 11일 미군기가 이리역을 폭격하기 몇시간 전인 새벽에 아군 측이 이리에서 중부로 통하는 금강의 교량을 작전상 폭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군기는 11일 새벽에 금강의 교량을 오전에는 이리역을 그 다음날인 12일에는 금강 철교를 폭파했다고 ‘철도백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는 ‘초토화작전’에서 “피난민 가운데 공산당원이나 북한국으로 위장해 자신들의 후방을 노린다고 판단해 이같은 작전을 벌였다는 미군의 기록과 증언”과 일치하는 것이며 ’한국전쟁사‘ 3권에 기록된 미 제5공군의 주요 교통로를 파괴해 후방을 차단하는 임무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미영 감독은 '초토화작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그러한 사실들을 "미 공군 조종사 업무일지와 증언, 미군의 자료 등을 통해 확인했다"고 했다. 또 이를 통해 서울과 대전, 김천 및 북한지역에 대한 미군의 융단폭격 영상, 전투기를 활용해 민간인을 사살한 총격 영상 등을 발견했다고 했다.

여기에 덧붙여 이리역 폭격 대참사는 ’한국교통동란기‘ 145~147쪽까지 4쪽에 당시 참상이 상세히 기록돼 있을 뿐 아니라 ’한국철도백년사‘’철도 50년사‘등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는 99년 ’한국전쟁과 양민학살‘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리역 폭격 참사는 6.25전쟁 초기에 발생한 ’미군에 의한 체계적인 양민학살’로 규정한 바 있다.

이미영 감독은 "이같은 작전으로 자신의 할머니도 피난 길에서 세명의 자녀를 잃었다"며 "이 다큐멘터리가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과 유가족들, 그리고 한국사회에 추모와 애도의 한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정부 기관 간행문서로만 남아 있는 ‘50년 7월 11일 미군기에 의한 이리역 폭격 참사’기록이 ‘미군기에 의한 오폭’이 아니라는 진상을 밝혀내는 것이 뒤늦게 나마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의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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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

전북취재본부 최인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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