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채희완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의 2021년 7월 1일자 '채희완의 탈춤1'으로 시작한 일곱번 째 글입니다.
정병훈 : 예. 시간이 이제 한 2시간 정도 원래 하기로 했는데 아직 10분 정도 남았습니다. 그래서 또 플로어에서도 질문이 있을 것 같고,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들은 대개 많이 말씀을 해 주셨어요, 그냥 지나가는 얘기는 김지하 선생님의 영향을 받으셨다고 그럴까요, 또 우리가 미학 연구소에서도 모셔서 얘기 듣고 또 동학에 관한 것도 공부하고 또 연행을 하는 것도 같이 얘기한 것도 들었고, 김지하 선생님을 비롯해서 선생님 한테 영향을 많이 주셨던 분, 그분들에 대해서 잠깐 얘기해 주시죠.
채희완 : 사실은 오늘 이런 자리를 제의받고 뭔 얘기를 하는 게 좋을까 걱정을 했는데 저로서는 넉넉한 시간이 된다면, 탈춤을 접하고 난 이후에 내가 바라보는 세계와 학문 접근에서 관점의 변화, 그것을 좀 중심으로 해 보자는 생각이 있었고, 또 한 가지는 제가 이 탈춤을 이제 만나 실제로 해 보기로 춤을 추기도 하면서 만났던 탈꾼들, 특히 70년대에 탈춤을 추셨던, 말하자면 그 보유자 분들과 만나서 같이 얘기 나누던 것을 구술자료로 떠올려볼까도 했습니다.
저도 같이 출연도 하면서 특히 그 분들이 술자리에서 얘기하셨던, 저로서는 굉장히 감동적이고 충격적인 일화들이 좀 있었는데, 그것을 조금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정병훈 : 말씀하시는 분은 영산의 줄당기기의 조선생님이라든가.
채희완 : 네. 일봉(逸峰) 조성국(曺聖國) 선생님이시지요. 그 얘기를 한 번 해볼까 했었습니다. 김지하 시인에 대해서, 또 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 자리가 아니어도 될 듯합니다. 지금 몇 년째 잠적하고 계셔서 더욱 그리움에 사무칩니다만, 오늘은 이만 하구요.
조성국성선생님은 경남 영산마을에서 매년 3월초에 행하는 민속행사로 ‘쇠머리대기’와 ‘큰줄당기기’(중요무형문화재 이름으론 영산줄다리기로 되어 있습니다만)의 예능보유자이셨습니다. 조선생님은 7,80년대에 농촌줄을 대학줄, 통일줄로 뒤바꾸어 대학문화축전(대학페스티발, 대동제라는 이름의)을 탈춤이나 풍물굿 못지않게 통일줄당기기 전승판으로 몰아가게 하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자신을 농꾼, 줄꾼, 술꾼으로 자처하시고는 대학문화패들과 술친구처럼 어울리셨는데요. 88년도에는 <민족예술인연합> 창립 때에 고은 선생과 김윤수 선생과 더불어 초대 공동이사장에 추대되셨습니다. 그때 농사짓는 농꾼을 예술가로 받드는 <민예총>이기에 이사장직을 맡는다라고 일갈하셨습니다. 선생님은 30년전에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전국의 문화패들은 ‘3 1영산민속문화제’가 열리는 3월 1일부터 3일이면 선생님을 뵈러 해마다 영산줄당기기에 줄땡기려 모여듭니다. 이런 통과의례로써 문화패들은 범단합대회를 열고 한해를 맞이합니다.
정병훈 : 네.
임석재, 조성국 선생님들의 학문적 실천적 삶에서 큰 감화를
채희완 : 저는 탈춤을 접하면서 그야말로 최고로 영향을 입었던 분을 댄다면, 직접 탈춤 추신 분들이 아닌 분들로는 첫째로 임석재 선생님, 그 다음에 조동일 선생님도 계시고, 마침내는 김지하 시인이지요. 그리고 또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심우성 선생님도 계시고요, 정병욱, 이두현 선생님이 계시고요, 백기완, 무세중 선생님 계시고요, 정상박, 유민영 선생님도 계십니다. 또 탈춤현장 활동을 직접 하셨던 보유자 선생님으로 봉산, 강령탈춤에 김선봉, 김기수, 김용익, 최경명, 양소운, 윤옥 선생님, 오인관, 지관용, 오명옥선생님, 은율에 장용수선생님, 또 양주산대에 서정주, 김성대, 신순봉, 유경성, 석거억, 고명달, 박교응, 김상용 선생님 계시고, 70년대 전에 막 또 돌아가셔서 제가 접하지 못해 원망해 마지않는 통영오광대에 장재봉 선생님, 봉산탈춤에 김진옥 선생님, 동래학춤에 김희영 선생님, 그리고 직접 만나 정분의 자리를 마련했던 또 통영에 문창섭, 오정두 선생님, 고성에 조용배, 이금수, 허종복 선생님, 동래에 김동민, 문장원, 천재동 선생님, 그런 분들 얘기를 하는 거지요. 조금은 학문적인 술자리였어요. 어떤 분들은 주류문화에 한 획을 그으셨는데, 지금은...
정병훈 : 그 얘기는 따로 또 시간을 한번 잡아서 말씀을 듣기로 하고, 제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이 정도로 하고. 여러분들 지금까지 여러 얘기를 들으셨는데요. 혹시 질문이 있으시면 또. 새로운 얘기 거리를 꺼내고 싶으신 게 있으시면 질문해 주시죠. 네 김중섭 이사장님
김중섭 : 여기 계신 분들이 다 궁금증이 엄청나게 많으실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먼저 여쭙게 되어서 참 송구스럽습니다. 말씀 참 고맙습니다. 아주 채희완 선생님의 개인적인 경험, 또 뭐 민속극에 대한, 민족극에 대한 생각, 이런 것을 이렇게 직접 소상하게 들을 기회를 갖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두 가지의 질문을 가지고 있는데요. 하나는 굉장히 개인적인 일이고 또 하나는 일반적인 얘기인데, 첫 번째의 문제인 것은 1970년대 초를, 저도 제가 72학번인데 아주 잘 기억을 합니다. 71년도에 위수령이 나오고, 72년도 유신헌법이 나와서 계엄령이 선포되고, 그 뒤에 긴급 조치가 발효되고, 그런 가운데 민족에 대한 생각, 또 민중에 대한 생각으로 이런 활동을 계속해 오신 것을 충분히 이해를 하는데, 혹시 그 과정이 개인적으로 많은 동료, 학생들은 데모하다 잡혀가기도 하고, 아까 김상진 열사 말씀도 하셨는데, 그런 고민을 개인적으로는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그런 갈등, 이런 것을 혹시 겪으셨는지 아니면 그런 과정에서도 여전히 이 영역을 지켜오신 것은 어떤 힘이 작용을 하셨는지 그게 이제 개인적인 측면의 궁금증이고요. 두 번째는 아까 ‘칼노래칼춤’ 창작 말씀을 하셨는데 이게 이제 탈춤이나 이런 창작탈춤 같은 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것이 구현되고, 또 재연되기도 하고 이래오지 않았습니까?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 행사 <칼노래 칼춤>
20년 전에 진주에서 ‘백정’이라고 하는 창작 탈춤이 있었습니다. 형평사운동 기념사업회에서 80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졌던 것인데, 그 뒤에 그것이 다시 공연된 것을 저는 못 봤거든요. 이게 이제 탈춤이나 뭐 마당극이나 아니면 이런 것들이 좀 다시 반복되고, 재연되고, 재해석되고, 그 역사적인 사회적인 맥락을 사람들이 이해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더 삶 속에서 사람들의 삶 속에서 녹아질 텐데, 동학 100주년이면 1994년일 것 같습니다. 1894년이니까 그로부터 20여년 27년 정도가 지났는데, ‘칼놀이 칼춤’이 그 뒤에 어떻게 다시 재연됐었는지, 아니면 어떻게 그것이 계승됐는지 이런 것이 좀 궁금합니다. 두 가지 질문으로 너무 긴 ...
채희완 : 두 가지 질문으로 제가 이해하는데요. 한 가지는 탈춤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고초를 겪었습니다. 특히 그 오둘둘(522), 아까 얘기를 조금 비쳤습니다마는, 거기에 연루돼 가지고 붙잡혀서 재판받고 실형 당한 사람들의 구형 기간을 제가 계산을 해봤습니다. 만 5천 일이 넘었습니다. 저는 살아남았다는 게 아니라, 아까도 제가 말씀을 좀 하기가 좀 민망하지만 뒷감당을 해 주어서 조교 생활을 근근이 하고 있었던 1년 6개월, 저로서는 아직도 그것은 제가 감당해야 될 역사적인 빚입니다. 그래서 딴 일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저는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들이 치룬 역사적인 시간을 내게 넘김만큼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어떻게 할 건지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칼노래 칼춤’은 그 다음에 ‘백정’과 같이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저는 ‘백정’이라는 작품을 진주서 할 때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칼노래 칼춤’은 동학 100주년 행사 중에 하나였지만 그걸 역사맞이굿에서 뽑아내 가지고 따로 독립한 공연작품으로 그 해에 서울의 문예회관에서 또 마산, 광주에서 몇 군데 순회공연도 했습니다. 그때는 “마당극 20주년 한두레 20주년”이라는 이름으로 순회공연을 했는데요. 마당극 20주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1994년도부터 20년 전이니까 1974년도를 얘기하는 건데, 74년도에 마당극에 효시가 있었다라는 얘기겠지요. 그거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소리굿 아구’를 마당극의 효시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마당극의 원년과 그 첫 작품을 무엇으로 꼽느냐에는 서로 다른 견해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전해에 1973년도에 김지하 시인이 농촌 계몽 활극 마당극으로 ‘진오귀’라는 작품을 내놓으시고, 같이 연습도 하고 했는데, 정작 현장의 농촌 계몽극으로 작품을 수행하지는 못하고 교회당에서 소인극(아마츄어)으로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마당극의 전초를 보이는 것으로서, <서울제일교회>라고 박형규 목사님이 주재하시는 교회 교당에서의 첫 시도이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마는, 새로운 문예운동의 결의라든가 나아가 어떤 진동을 일으키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그 전에 아까도 얘기를 드렸습니다마는 대학 연극계에서 말하는 새로운 형식의 것이 일반 연극계에서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도되기도 했었습니다. 무세중 선생이라든지 오태석 선생이라든지 또 ‘형사반장’을 쓴 윤대성 선생의 ‘너도 먹고 물러나라’ 등등의 마당극 형식의 것이 있었고, 또<극단 에저또>에서도 실험적 양식으로 관중과 직접 맞대하면서, 오히려 관중이 출연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식의 연극 행위들도 있었고, 그리고 무세중 선생의 여러 그 파워풀한 행위예술과 육체 그 자체로서의 퍼포먼스도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시에 전위적인 그런 것이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탈춤 속에서 전위적인 것의 실마리를 잡고 이를 마당의 개념으로 파괴하면서 확충했습니다. 그 예로 의도적인 창작탈춤이라 할 수 있는 “소리굿 아구”를 들 수 있는데, 이를 마당극의 효시, 나아가 마당극예술운동의 시초라고 보는 겁니다.
<소리굿 아구>를 마당극운동의 효시로
그 연행작업에는 이른바 문화운동 1세대라고 하는 이들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참여와 예술운동성이 밑받침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운동이든 그것이 지님직한 이념성, 집단성, 조직성, 돌파력 등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지요.
탈춤은 당대의 전위적인 것이면서 그리고 전통적인 것이다. 모든 전위는 적과 마주하고 있는 ᅟᅥᆫ최일선 전인데, 그 앞장 선 자리는 전통에 대한 충돌 및 혁신에서 비롯된다, 지금 받아들이고 있는 탈춤은 전통적인 것이다. 이것을 파괴하면서 전위적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것을 부등켜 안아 가져가면서 파괴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가서 새로운 논법으로 더 분명하게 되었습니다만, 김지하 시인의 논법으로 치자면 “대결하고 있는 두 국면의 이중교호적 얽힘 속에서의 기우뚱한 균형”입니다. 대립되는 두 국면이 서로 부딪치면서, 제 3의 또 다른 극복의 세력으로 올라가는데, 대립되는 두 것이 지양(止揚), 끊고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는 것, 이것이 기존의 변증법의 논리라고 한다면, 김지하 시인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대립되고 있는 두 국면이 서로 부딪치면서 엉켜서 싸우고 지지고 볶고 하는데, 한편 얽혀 나아가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한 균형을 잡는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두 대립되는 요소의 이중 교호적 얽힘 가운데 기우뚱한 균형”
두 대립되는 요소의 이중 교호적 얽힘 가운데 기우뚱한 균형, 이러한 진행 방식을 동경했습니다, 우리 탈춤도, 또 우리 문화의 발전도 그렇다는 것이지요. 깨끗이 끊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안고 부딪치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 나가면서 굴러가며 전진하는 것이란 거지요. 순환적 진화입니다. 역사 발전 논리 전개의 핵심이 지니고 있는 민중적 화쟁(和諍)의 논법, 이를테면 한국적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원효스님이라든지, 동학 최재우 선사라든지, 그 분들의 삶과 논리 전개방식, 이것이 탈춤에 반영되어 있다고 하는 믿음 속에서 탈춤을 펼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탈춤을 통해서 우리가 그 분들의 생각들이 마땅하고 옳구나 라는 것을 검증해 보자, 이렇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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