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채희완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의 2021년 7월 1일자 '채희완의 탈춤1'으로 시작한 여섯번 째 글이다.
정병훈 : 민족극 운동이 사실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칼노래 칼춤’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모델이 됐었는데, 그래서 그 다음에 그게 활발하게 진행되다가 최근에는 뭐 좀 뜸해요. 새로운 작품이 나오는 것도 없고, 그래서 조금 <진주탈춤한마당>에서도 아쉬움을 많이 느끼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채희완 : 네. 지금은 민족극운동을 하던 연행단체들의 모임이 ‘한국민족극협회’로 되어 있습니다. 그 전의 이름은 ‘전국민족극운동협회’였습니다. ‘운동’ 자를 뺐습니다. 저의 생각하고는 반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민족극한마당’은 1988년도부터 매해 빠짐없이 해왔으니까, 꽤 됐을 겁니다. 지금 <한국민족극협회>에 가입하고 있는 단체는 20여 개가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라는 표현이 저는 괜히 부끄럽습니다. 지금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할 정도로 다소 소원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음 주 11월 18, 19일인가요? 녜. 통영에서 제 31회 ‘민족극한마당’을 한다고 합니다. 행사 초기에는 단체에 가입돼 있는 사람들이나 또 단체 단위에서 돈을 얼마까지 내가지고 그 행사를 치뤘습니다. 20만원에서 200만원 정도씩, 행사 참여비라는 이름으로 십시일반하는 거죠. 그리곤 사흘낮밤을 같이 놀고 마시고 같이 지내면서 자체 단합대회도 하고, 기존 기성 연극계에 대한 포문도 열면서, 근현대 시기에 한국땅에서 연행의 흐름에 큰 한 줄기를 형성한다고 하는 그런 포부와 믿음 속에서 했습니다.
지금은 기성 연극계, 또는 민족극계, 이렇게 구분하는 의미가 이제는 많이 바래졌니다만, 저는 아직도 기성 연극계에 대한 회한이 잠복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또 이제 거기 연극계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 가운데도 흔히 말하는 ‘마당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굉장히 동지적으로 생각하는 분도 많은 데도 불구하고, 또 거기에 둘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두 일을 같이 하는 김명곤 씨라든지, 김석만 씨라든지 이상우씨라든지, 손진책 씨라든지 여러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저는 구별을 짓습니다. 그래서 아예 이름까지도, 저는 ‘마당극’이 자꾸 연극쪽으로만 생각하게 된되면 이름마저 바꾸고 싶을 정도입니다. 고친다면 ‘마당극’이 아니라 ‘마당굿’이지요. 그 얘기는 하자면 좀 길고 중간 중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야 할 대목이 많네요. 다만 저는 ‘마당굿운동협회’라고 표현하고 싶었는데, ‘마당극’으로, 더 나아가서 ‘민족극’이라는 이름으로 정착이 되었습니다. 그 밑에 기반인 것이 ‘마당굿’인데, 당시 ‘마당’이나 ‘굿’에 대한 개념 설정이 일반화되는 데까지는 먼 거리여서 초기 상태에서는 ‘마당굿’이라는 것이 연행예술의 한 장르로 들어갈 수 없었던 때였습니다. 마당굿, 마당극을 합치고 양식적인 범주에서 나아가 좀더 이념적인 의미로 ‘민족극’이라는 개념을 갖기로 합의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민족의 현실과제를 제기하고 그 밝은 민중적 전망을 예축하는 연행행위라는 것이지요.한편 그러나, 양식적인 측면에서는 아직도 제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연행예술에 대해서 달리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탈춤을 하면서, 마당극이나 마당굿을 하면서, 이때 제가 말하는 굿은 넓은 의미도 있고 좁은 의미도 있습니다. 넓은 의미로 보는 것은 어떤 형태든 그것이 집합 모임의 표현물이라면 ‘마당굿’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민족통일대동장승굿’ 이라든지, ‘일본군위안부 해원상생굿’이라든지, ‘새물맞이굿’이라든지, ‘원효문예대제전’이라든지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런 것은 저는 ‘민족예술대동굿’이라 하여 넓은 의미의 마당굿의 개념에 둡니다. 제주도의 놀이패 <수눌음>이나 <한라산>에서 공연한 땅풀이, 잠녀풀이, 돌풀이, 백조일손 같은 마당극은 좁은 의미의 마당굿이라 할 만합니다.
마당극, 마당굿, 민족극, 민족예술대동굿
그 행사의 내용물이 저는 지금에 와서도 <한국민족극협회>에서 다시 의미 회복되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민족극 운동, 사실은 ‘운동’이라고 얘기하기가 제대로 어려운데요, 특히 그 90년대 이후 말하자면 적대 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에는 잠세화되어 그 대결상이 제대로 잘 안 그려지기에 민족극운동마저 잠세화된 채 극단마다 놀이패마다 각자도생에 목줄을 걸고, 그런 지경에 아직까지도 파묻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거기에 대한 마땅한 대책이 마련되고서, 실천적인 행동력이 공동으로 결집되어야 함에도 아직까지는 여의치 않은 것 같습니다. 다행히 대전의 ‘우금치’라든지 목포의 ‘갯돌’이라든지, 청주의 ‘예술공장 두레’ 및 몇 군데 단체는 자생력을 확보할 정도로 연행물로서 생계문제와 문화적 생업을 해결하고 잘하고 있는 좋은 예가 됩니다. 마는, 그러나 그 이외의 지역에 그 이외의 단체에 대해서는 저는 아직까지도 속수무책에 가깝다고 보는 거지요. 또 앞으로도 이런 일에 자신의 삶을 한 번 던져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밝은 전망을 던져주는 그 기초 바탕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그런 형편에서 민족극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게 바로 오늘에 대응하여 그 해법을 기다리는 원천적인 문제이지요. 또 특히 닥쳐온 4차혁명 앞에서 그리고 코로나펜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멀어져가고 사회적 격리가 생존의 한 방식으로까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수록 직접적인 대면이나 만남 자체가 자기생산력을 확보해주는 마당판에서는, 이런 격리의 시절이 몸을 서로 부대끼는 게 생명인 판문화로서는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역경을 헤치고 이를 대체시키는 방식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과연 어떠한 우리의 연행 활동이나 집단적인 행위 표출이 있어 이 난국을 헤쳐나갈 것인가는, 저로서도 풀어야 할 다급하고도 긴요한 과제이고 닥쳐온 시련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병훈 : 예. 얘기가 조금 돌아가지만은 이제 선생님이 서울에서 지내시다가 청주에 잠깐 계셨고, 그 다음에 부산으로 이제 자리를 옮기셨고, 부산대 무용과 교수로서 또 영상미학과를 창립하셔서 많은 제자들을 키우시면서 ‘민족미학연구소’를 1990년대 중후반에 만드셔서 지금까지 이끌고 계시는데요. 부산에서의 활동에 대해서 미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좀 말씀해 주시죠.
부산에 <민족미학연구소>와 부산대학에 ‘예술문화영상학과’를 창설해
채희완 : 명칭은 ‘민족미학연구소’라고 했습니다. 88년도 12월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줄여서 <민예총>이 발족이 되었습니다. 예술의 각 장르에서 민족예술 진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집합체이죠. 우리와 같이 이런 활동들을 하고 있는 분들이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에 관해서는 적극적으로 이 단체에서 담당하자는 의도로 생겼는데, 그 안에 <민족미학연구소>가 설치됐습니다. 91년인가요? <민예총>이 출범한 지 3년만에 염무웅선생이 초대 회장을 맡으셨는데, 그 다음에 제가 93년도인가 고사 끝에 책임자로 맡기로 되었습니다. 당시의 <민족미학연구소>는 <민예총> 단위 비평이론가들의 결집체이면서, 거기서 벌이는 각종 문예이론의 강좌를 통해 첨단 예술이론의 소통 통로이자 막대한 수강료 수입으로 단체운영자금의 주수입원이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잘 나갔고 나중에는 ‘민족예술대학’을 건립하자는 데까지 의욕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로서는 서울과 거의 동시에 부산에도 사설로 <민족미학연구소>를 개설하여 시민문얘강좌를 벌였습니다. <민예총>의 <민족미학연구소> 소장직은 당시 <민예총>의 호시절 때인데 민족예술대학 건립문제와 의견이 달라 그쪽은 그만두고, 부산의 연구소에 매진하면서 국립대학 내에 미학과의 신설을 위해 다시 뛰었습니다.
부산대학에 미학과가 생긴 건 부산대에 부임한 후 17년 애쓴 끝에 2005년도이고, 명칭은 ‘예술문화영상학과’입니다. 저로서 대학 무용학과 재직 25년만에 ‘예술문화영상학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1974년 서울대 미학과 조교에서 만 2년 근무하고 그만 둔 데에서 드디어 ‘미학과’로 온 것이었지요. 여러분, 탈춤을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학과에 주목해주시고, 많이 애용해 주십시오. 대학원 석박사 과정으로 ‘예술문화영상매체 협동과정’이 먼저 개설되었는데, 실제로 탈춤이나 마당극을 하는 동사(同事, 같은 일을 하는 동무들이란 뜻)들이 많이 학업을 같이 해오고 있습니다. 요즘은 마당극의 시세처럼 좀 소강상태입니다.
민중의 미적 삶에 관한 학문이 ‘민족미학’
한국미학, 한국민중미학이라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지마는, 민족의 현실과제와 밀착된 한국에서의 미학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한국미학은 일본미학이나 중국미학, 영미미학, 독일미학과 대등한 개념입니다.그러나 한국미학은 한국에서의 미학과는 의미층을 달리합니다. 한국에서 서양근대미학의 원조인 독일미학을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일본미학, 중국미학도 요구됩니다. 학문일반의 보편성을 여기서 재삼 확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말하자면 “오늘 이땅에서 미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시대정신과 함께하는 미학이란 학문의 개념은 어떻게 세워나갈 수 있겠는가. 분단체제라는 시대에서 ‘민족’이란 종족적이고도 문화인류학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을 염두에 두자는 것이지요. 폐쇄적인 민족주의 민족미학, 종족주의 미학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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