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채희완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의 2021년 7월 1일자 '채희완의 탈춤'으로 시작해 지난 8월 14일에 실린 '탈춤과 나' "채희완의 탈춤 4"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서생 노릇과 딴따라
정병훈 : 그렇게 노시고도 아직도 미진하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한데요. 이대로 해서 잠시 물을 한잔 드시고 딴따라 얘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이 좋습니다. 지금 이제 그 논문 말씀하시면서 선생님의 탈춤 운동의 기조, 기반이 되는 생각들을 지금 얘기하고 계신데 저도 민중, ‘민중적 미의식’ 이라고 하는 것을 채희완 선생 논문을 통해서 처음 접했고 또 그 당시에 박정세 선생이 우리 선배였는데요. 졸업 논문으로 대학원 졸업 논문으로 민중의식에 대해서 또 논문을 쓰셨어요. 그래서 그 두 편의 논문이 제가 탈춤하는 데도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지금 이런 생각들이 저뿐만 아니라, 그 당시 대학생들, 대학 탈춤, 탈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딴따라 얘기를 조금 더 하시죠.
채희완 : 저는 낮에는 서생 노릇, 밤에는 딴따라활동을 하곤 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주다야싸’라는 게 있었습니다. 같은 장소인데 낮과 밤에 기능을 달리해서 납엔 다방, 밤엔 술손님을 받는 업소 ‘주다야싸롱’이라고. 이것을 저는 굉장히 근사하고 재미나는 업소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문화를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 우리 사는 집의 구조를 얘기하면서, 식당 따로, 침실 따로, 화장실 따로, 응접실 따로, 놀이마당 따로, 등등의 기능별로 구분하고 있는 집안 구조 배치는 그 한국의 민간인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안쪽에는 안방이 되고, 건너는 건넌방인데, 얘기하게 되면 응접실이 되고, 마시면 주방이 되고, 놀면 오락실이 되는 식으로, 또 그 방과 방 사이에 통로가 중간에 큰 마루로 되어 있어서 서로 통합니다. 또 안채와 바깥채 이것도 떨어져서 있지마는 사실은 통하고 있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어 비빔밥, 짬뽕문화, 얽히고 설키는 문화, 그렇게 가옥 구조를 얘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얽히고 설키고, 이는 공사 구분을 못하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른 얘깁니다.
딴따라, 연예 분야에서 가장 힘든 거는 아는 체 하는 걸 말리는 것 하고, 지 몸을 보여야 되는 것 하고지요, 그것이 충돌하는 거죠. 이제 ‘먹물 딴따라’라고 있습니다마는 먹물식으로 사는 거하고, 딴따라 식으로 사는 거는 참으로 두 가지가 같이 병행되기가 또 견디기가 참 어려운 지점인데, 저는 그렇게 스스로 어렵게 살아가는 중입니다. 강의실에 가서 딴따라식으로 하나의 공연물처럼, 한 강의가 나의 일인극이나, 나의 무슨 발표장처럼 하고 싶은 그런 욕망도 있었고 준비도 하고 그랬습니다마는, 아직까지 제가 강의를 하면서 스스로 신통해 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술집에 가면 그것은 저한테는 잘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건 장소 때문이 아니라 술이라고 하는 것이 주고 있는 문화적 표현력과 소통력이 앙분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그것하고 저는 신명의 산출력을 같은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한국민중문화의 핵심은 살풀이와 신명
한국 문화의 핵심을, 왜 이렇게 두 가지를 얘기하지요? 한과 신명,고요와 앙분, 또는 딴 용어로 쓴다면 비정제와 균제, 질서와 혼돈, 또는 담백 소박과 거침이 없음, 말하자면 고구려적 활달한 신명, 또는 흥취, 또는 담대함, 그런 것과, 백제, 신라적 안온함과 고요함, 내재적인 힘에 비축된 것, 이 두 가지가 서로 교차되는 어떤 지점, 곧 한 쪽은 북방계열, 한 쪽은 남방계열, 기마민족적인 것과 농경민족적인 것, 해양민족적인 것 등등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만, 저로서는 민속학적 의미로서 살풀이와 신명, 이렇게 이제 보고 있습니다. 딴따라가 하는 일, 가져야 될 기초 심성이란 신명의 획득과 신명의 자기 실현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신명은 나의 신명이자, 이웃의 신명이고, 공동의 신명이고, 어쩌면 하늘님이, 자연이, 우주가, 생명 근원이, 우리에게 부여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런 그것을 우리의 민중적 신명이라고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개체 보존의 생체 에너지를 덜어낸 빈 자리에 민중적 신명으로 채워서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대신 대비해서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자를 딴따라라고 저는 규정 하고 싶은 것이지요. 거기에 저로서는 유리한 조건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런 식의 표현조차도 쑥스럽고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럴수록 이를 더 과감하게 표현해 내고자하는 욕구가 일기 때문입니다. 표현이 잘 안 되는, 미달되어 있는, 또 부끄럽고, 숨기고 싶고, 막 그런 것이 잔뜩 있는 사람이야말로 그 생존 에너지를 들어낸 자리에 그런 민중적 신명, 민중적 미의식을 채워서 더욱 강력한 표현의 방법을 얻어낼 수 있겠구나 싶기 때문입니다.
생존에너지를 덜어낸 자리에 민중신명을
그리고 저는 탈춤을 접하고 몇 차례 출연을 해 봤습니다. 대학 때는 탈춤반 회장을 맡았기 때문에, 회장은 중심역 그러니까 주역들을 맞죠, 잘 추거나 못 추거나 간에, 표현력이 어떻거나 관계없이 이제 파워 게임에서 이기고 있으니까, 그래서 노장역도 맡아 보고 또 4학년 때는 주위에서 하는 것을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미얄역도 해 봤습니다.
노장을 맡아서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어제 제가 정병훈 선생하고 그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직도 대부분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어디 가서나 누구보다 먼저 드러내고 앞장서고 하는 것이 다 맞지요. 그건 당연하기도 하지만은, 그런데 그렇게 안 해도 좋을 사람들조차 그렇게 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탈춤에서 주역의 한 인물로 되어 있는 것이 이제 노장인데, 노장은 파계승 과장에서 풍자의 중심 인물이죠,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그는 이 탈춤에서는 적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자의 대상인 것이죠. 그 긴 얘기를 하기가 좀 어려운 자리입니다마는 그와 대결 상황을 빚는 취발이는 누구인가. 그의 적대세력과 관계를 맺어준 사람이 소무입니다.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얘기는 소무의 시각으로 탈춤을 다시 보자라는 얘기입니다. 지금까지 탈춤 논의에 중심인물은 노장 또는 취발이, 말뚝이였습니다. 나중에 가서 할미과장에 미얄할미, 이렇게 되는데요. 소외된 사람들, 역사의 물 밑에서 떠오르지 못한 이전의 사람이라고 평가되는 사람들의 얘기라고 하는 탈춤에서조차 이들이 자기 얘기를 할 때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무, 또는 소매는 엑스트라를 갓 벗어난 조역입니다. 결코 주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소무가 없이는 노장도 나타날 수가 없고, 취발이도 나타날 수 없고, 그들끼리의 싸움도 벌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상에 드러나 있는 것은 노장과 취발이의 싸움입니다. 이들의 싸움만이 이른바 역사화됐지요. 그러나 물밑의 역사상 이 두 주역을 그렇게 하도록 바탕을 이루고 있는 세력, 또는 싸움의 매개자로, 또 싸움에 불을 질러주고 하는 역할을 소무가 하고 있다는 겁니다. 소무는 탈춤에서 과연 무슨 역할을 맡고 있는가. 그것이 탈춤을 하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된 그런 관점입니다. 지금 얘기가 다른 길로 많이 간 거 같은데...
탈춤을 보는 새로운 민중적 관점, 소무의 눈으로 탈춤을
정병훈 : 아주 지금 자연스럽게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제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탈춤을 하는 관점, 탈춤을 보는 관점까지 말씀을 해 주셨는데, 선배님이 하신 활동 가운데서 이렇게 탈춤을 전승하고 탈춤을 연구하고 하는 일도 굉장히 중요했지만, 또 하나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신 것은 탈춤을 기반으로 해서 새로운 창작 탈춤을 만들고, 일종의 사회문화 운동으로서의 탈춤을 하시는 것인데, 제가 대학 다닐 때 ‘소리굿 아구’를 보았고요. 그 다음에 또 ‘칼노래 칼춤’ 이런 것이 아주 채희완의 최고의 작업이라고 지금 돼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이후에 전국의 민족극 운동을 일으키셨고, 마당극 판이 벌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셨는데, 그 얘기를 좀 듣고 싶어요. 그래서 창작극에 대해서, 관심은 당연히 민중적 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을 사회 현상과 접목시키는 일이셨을 텐데 그리고 ‘아구’라든가 또 ‘칼노래 칼춤’ 그것을 만들었던 얘기들, 그리고 민족극 운동을 펼치셨던 얘기들을 좀 듣고 싶습니다.
채희완 : 제가 말하자면 마당이나 무대의 출연자로, 춤꾼이나 연기자로 해 본 것은 열 몇 개, 몇 작품밖에 안됩니다. 물론 그 대학 탈춤 때는 배역도 맡고 하니까, 뭐 솔직히 말뚝이 같은 역도 했고, 주로 인제 봉산탈춤 같은 경우에는 확실히 첫목, 노장 같은 주역도 했습니다. 나중에 미얄 역을 해본 적도 있습니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무당역이었는데 그 춤이 조금, 그때 무당역을 맡을 만큼 갖추지 못해서 못한 채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러고 그 다음 해가 74년도이었죠, 그해 이른 봄에 이종구라고 하는, 제가 존경하는 작곡자의 졸업 발표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1부에는 그의 작곡 발표를 여러 가수와 연주자들이 하고, 2부에 ‘소리굿’ 이라는 이름의 공연을 했습니다. 대학의 서울 음대 강당에서 졸업발표회를 하고, 그 한 달 뒤에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이틀간 같은 내용으로 공연을 했는데 그것이 ‘소리굿’입니다. 그것은 김민기의 아이디어와 기획에다가, 음악에 이종구, 제작은 여럿이 같이 했고, 춤은 이애주 선생이랑 제가 맡아서 같이 했는데, 내용은 탈춤이나 남사당놀이에 있는 노장과장을 말하자면 번안한 건데요 아까도 잠깐 얘기를 드렸습니다만은, 취발이와 노장 싸움에 소무가 끼어들어 있는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1970년대 상황하고 물려가지고, 그 한일간의 문제로 돌려서, 소무를 한국 처녀, 노장은 쪽바리 사장, 취발이는 조선 청년 아구 그렇게 해 가지고, 기생관광을 온 쪽바리 사장을 환대하는 거대한 잔치가 벌어지는데 거기에 여인이 투입이 되고, 그 현장을 조선청년 아구가 급습해서, 한판 벌이는 활극이죠, 그리고 인제 결국은 쪽바리 사장한테 취발이가 대들다가, 여자 쟁탈전 속에서 아구가 엎어지는 비극적인 걸로 하기도 하고, 쪽바리를 물리치고 소무를 다시 얻어내는 그런 희극적이기도 한 작품입니다. 이거는 그 당시에 문교부장관이었던 민모 라고 하는 사람이 일본 국회에 가서 국회의사당에서 한 연설 대목을 듣고서 이에 분격한 사람들이 이 얘기처럼 하는 얘기를 들고나와 가지고 하는데요. 개발도상국인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를 이렇게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청산하려고 한다. 한국은 한국의 대학 교육에 특히 여대생 교육에 논개 정신의 부활을 심어주려고 한다. 일본 적장을 술판 접대에서 잘 다루어서 같이 빠져죽는 그것을 현대화, 시국화한다는 것인데요. 어려운 시절에 외화벌이로 몸을 투신하는 한국의 여인들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다. 언제든지 한국에 오셔 가지고 동참해 주셔서 굿판, 논개정신의 굿판에 오시기 바란다는 따위의 얘기를 했답니다. 그것을 이제 풍자하는 음악극이었지요. 그 이후에 몇 군데 대학에서 공연도 하고 원주에서 또 공연을 했습니다. 한 5년 전부터는 이제 ‘소리굿 아구2’로 해 가지고 소녀상 쟁탈전 얘기를 담아, 이렇게 제가 이런 것을 해왔습니다. 예. 극 내용상 길게 얘기할 자리는 아닌 듯합니다만.
창작탈춤 소릿굿 아구’와 창작춤극 ‘땅끝’
정병훈 : 그 다음에 ‘땅끝’과 ‘칼노래 칼춤’
채희완 : 그리고 인제 그 아까 ‘땅끝’ 이라는 작품 그거는 그때 초연을 한 것이었고,
정병훈 : 그때 ‘섬주’역이었지요.
채희완 : 섬주에게 점지 당한 여인, 동네 처녀 역할은 인제 이애주 선생이 맡고, 그의 애인 청년은 정재만 선생이라고 그 당시 뛰어난 그 남성 춤꾼이었습니다. 나중에 승무로 이애주 선생과 더불어서 인간문화재, 창호를 받았습니다. 그런 출연자 중에 한 사람으로 섬주로 출연해서 한 판 하게 되었는데요. 물론 그때는 피지칼한 조건이 기본인데 거기 좀 못 미치는 체격이었어요. 지금은 더욱 쪼그라들어 가지고 앉으나 서나 비슷한 키입니다. 섬주 역을 할 사람이 없다 보니까 제가 맡아서 소화했습니다. 그리고 졸업하고, 결혼하고, 며칠 안 되어서, 민속악회 ‘시나위’라고 하는 젊은 국악팀이 있습니다. 이들의 음악발표회에 악가무 일체의 한 부문으로 춤을 췄습니다. 최태현 선생의 창작 시나위 어둠이라는 작품에 춤꾼일을 한 것이지요.
<민속악회 시나위> 회원분들은 국립국악고등학교 출신들의 사람들이 아니고, 천대받던 민속악 중심으로 민속무 중심으로 한국 국악의 교육을 받았던 서울 예술고등학교 중·고등학교 출신들입니다. 사실은 이 자리는 그 얘기에 할 자리는 아닙니다만, 우리는 전통음악, 국악, 우리음악 이렇게 하지마는 그 안에 보면 크게 대별되어 있습니다 궁중 악무와 민속 악무, 그 대우의 격차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 학교가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아니면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입니다. 지금은 정말 많이 좋아져가지고 서울 국악 예술고등학교가 국립국악예술고등학교로 바뀌어졌습니다 거기에 민속악에 종사했던 그분들의 노고는 내역을 잘 모르는제가 보기에도 아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대학의 국악과, 또는 전통음악과, 또는 한국 음악과로 돼 있는 거기에 지원자들, 더 나아가서 교수님들 분포로 보면은 궁중악, 정악에 해당되는 사람이 9쯤 되면 민속악에 해당되는 사람은 1 정도였습니다. 근데 1959년도에 서울대 음악대학에서 국악과가 처음 생긴 그 직후에는 10대 0이었습니다. 민속악은 교수도, 커리규럼에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점점 상황이 바껴지면서 지금은 5대 5 쯤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전체적인 인상은 궁중악과 정악이라고 하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이론도 그렇습니다. 이 자리에 민속학 전공 하시는 분도 계시고, 이 국악과 출신도 있으시겠지만, 저는 그것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타파되어야 될 그런 걸로 보입니다. 아직까지도 탈춤은 전문 한국춤 교육기관인 대학에서 한두 시간 끼어져 있는 대학이 한 두 군데 밖에 없었습니다. 40 여 무용과가 있었는데 그 중에 두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근데 그 두 군데 마저 무용학과가 없어지는 바람에 전국에 있는 무용학과에서 탈춤을 하나의 전통춤으로라도 교습시간을 갖고 있는 대학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예종이 생겨가지고, 민속연희학과가 생겨서 아예 탈춤이나 굿이나 풍물을 주 전공으로 하게끔 한 것은 정말 다행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 많은 예술대학에 전통음악 교육, 전통춤 교육이 없다는 것은, 판소리나 탈춤 교과목이 없다는 것은 정말 이 교육 프로그램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그런 교육정책으로서의, 그 뭐냐 한마디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지...
정병훈 : ‘칼노래 칼춤’하고 민족극운동 말씀하시다가 약간 좀 이렇게
채희완 : ‘칼노래 칼춤’이라는 작품은 1994년도 2월에, 그 해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되는 때여서 그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했던 마당극입니다. 동학 농민 전쟁 100주년을 기념한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습니다만은 동학 농민 전쟁의 시발점인 고부, 정읍, 만석보, 그 역사적인 현장에서 행사를 100년 만에, 그 행사가 있던 역사적인 사실들을 재현해 보자고 하는 것이 기본적인 의도였습니다. 이름하여 고부봉기역사맞이굿이라 이름지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 고봉기역사맞이굿과 ‘칼노래 칼춤’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습격한 것이 첫 출발점이고, 그 이전에 여러 차례 전봉준 장군과 그의 아버지의 삶에서 또 겪었던 어려움과 참상, 농민들의 봉기에 이르는 과정 등과 관련된 내용들을 관객을 모아가지고, 11개의 마당굿으로 했습니다. 사발통문과 기포의 모의, 고부관아 습격, 백산 전투, 만석보 쟁탈 등으로 만들어서 이틀간 그 현장에서 관중들이, 구경 온 관람객들이 어떤 때는 농민군이 되고, 어떤 때는 차출된 관군들이 되기도 해서 현장에서, 그 동네이니까. 정읍에서, 고부에서, 말목장터로, 말목장터에서 행렬을 지어서 만석보 있는 데까지 쭉 같이 도보행렬처럼 역사 기행처럼 역사 답사의 발걸음처럼 관중들이 함께 동참하는 그런 기획적 의도를 가지고 했던 역사맞이굿의 한 가지였습니다. ‘칼노래 칼춤’은 한자로 풀이하면 ‘검결’입니다. 그것은 동학의 일대 교주였던 최제우 선생이 창안한 노래와 춤입니다. 지금 다행히 노래 가사는 남아 있습니다마는, 춤은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이 ‘검결’이라고 하는 노래는 동학 교도들이 예배 때 올리고, 또 일반 집회 때도 올리고, 또 이 전쟁 때에는 예비군 훈련 종목으로 되듯이 군사 훈련의 한 가지로도 쓰여졌던, 그런 군가이면서 그리고 창검술의 일종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중심 상징과 의미 배경으로 해서 작품을 짜보자고 했는데요. 그것의 효시는 동학농민전쟁의 일선 투쟁 현장에 가 있는 그런 농민군과 후방에 있는 이른바 배경세력들, 말하자면 그들을 독려하거나 위로하거나, 또는 어떤 때는 최일선에서 앞장서서 개전을 선포하는 그런 역할로서의 풍물패, 탈꾼들, 그 역할 중에 풍물패, 탈꾼들의 역할을 하고 있는 요즘으로 하면 문화패의 역할들을 한통속으로 엮어보자고 하는 게 ‘칼노래 칼춤’이었습니다. 중심은 정치 일선의 싸움의 현장에 있는 사람과 후방에 있는 문화패들, 또 어떤 때는 최일선에 가 있기도 하는 문화패들의 그 노력이, 일이 역사적으로 보면 서로 다르지 않다라는 것을 딴다라 식으로 선포하고 싶은 그런 속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이지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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